교회가 떠들고 있는 것은 교회 성장, 전도, 선교, 구제, 기도 등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하나님의 일로 단정하고 교인들에게 가르치며 실천하라고 강요하기 이전에 먼저 물어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를 위한 것이냐?'라는 물음입니다. '신자는 이것을 해야 한다'라고 하기 이전에 누구를 위해서 해야 하느냐를 먼저 물어 보자는 것입니다. 교회 성장을 외치고 있다면 '누구를 위한 교회 성장이냐?'를 먼저 물어 보자는 것입니다. 전도를 외치고 선교를 외친다면 '누구를 위한 전도이고 누구를 위한 선교인가?'를 먼저 물어보자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을 위한 것이다'라는 답을 내린다면 '어떻게 해서 하나님을 위한 것이 되느냐?'라는 물음을 또 다시 해야 할 것입니다. 혹 이러한 물음에 대해서 답을 내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내 일을 해왔다는 증거 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위해서다'는 생각도 없고, 하나님을 위해서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어떻게 해서 하나님을 위한 것이 되는 것인지도 확실하게 알지 못한 채 했다면 그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고 엉터리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이 나를 위한 것인지 하나님을 위한 것인지도 구분하지 못하고 할 때가 많습니다. 또 무엇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 되는지도 모른 채 단지 '하나님을 위해서 한다'는 맹목적인 생각으로 움직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이 순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교회를 나온 것이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여러분 자신을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까? 대부분은 예배를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한 것이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나왔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배를 드림으로서 그것이 나에게 복으로 주어진다는 생각은 버려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했는데 자신의 복을 기대하다면 그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주일을 지키면 복이 주어진다고 주장하는 것에도 모순이 있는 것입니다. 말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세상일을 다 쉬고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자라고 하면서도 왜 '주일지키면 복을 받는다'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까? 도대체 복을 받기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입니까? 차라리 '그래 나 복받을려고 주일지킨다'라고 해버리면 솔직하다고나 하겠는데, 그렇게 하면 자기의 속마음이 드러나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그럴듯한 명목을 내세워서 주일을 강조하고 그러면서도 뒤로는 복을 기대하는 것은 참으로 위선과 가식으로 무장된 인간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인간이 제 아무리 '하나님을 위해서 한다'라고 주장해도 결국 모든 것은 자기를 위해서하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뭔가를 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하자'라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자'라는 그 마음이 누구의 마음이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서 나온 '하자'라면 분명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 되고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이 되지만 내 마음에서 나온 '하자'라면 나의 일이 될 수밖에 없고 나를 보여주는 것으로 그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혼동을 하는 것은 같은 '하자'라는 마음인데 이것을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인지 아니면 내 마음인지를 구분하느냐는 것입니다. 오늘은 여러분이 이점에 대해서 잘 이해하고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우선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인간의 행동 자체에 하나님의 일이라는 의미를 두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에 꼭 어떤 의미를 부여하려고 합니다. 의미가 부여되지 않은 행동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내 행동을 가치 있는 것으로 격상시키기 위해서는 필연코 의미를 부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인들에게 어떤 행동을 요구할 때 필수적인 것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의미가 부여됨으로서 교인들로 하여금 '아 이렇게 하는 것이 가치 있는 행동이구나'라는 인식을 가지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교인들에게 '전도하라'고 할 때 그냥 '전도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전도는 예수님의 지상 명령입니다. 모든 족속으로 세례를 주고 제자를 삼아라고 하신 말씀대로 전도합시다'라는 식으로, 전도해서 사람들을 교회로 데려오는 행위에 예수님의 명령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전도라는 행위를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가치 있는 행위로 격상시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가치 없는 행위보다는 가치 있는 행위를 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가치 있는 행위를 함으로서 자신 역시 가치 있어 지는 것, 이것이 인간의 행동 내면에 감추어져 있는 실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의 마음에서 나온 행동이냐'는 것은 인간의 행위에 부여된 가치를 없애버릴 때 드러납니다. '이것은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는 행동이다'라고 했을 때, '의미도 가치도 없는 것이라면 내가 왜 하느냐?'라는 반발을 한다면 결국 그 사람의 행동은 자기 마음에서 나온 자기를 위한 행동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가치 없는 행동을 함으로서 행동을 한 자신에게 주어지는 혜택이 아무 것도 없어진다는 것에 대한 반발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에서 나온 행동은 자신에게 주어질 혜택을 기대하는 것도 아니고, 자기를 위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해도 아무런 의미도 없고 가치도 없다'라는 말을 해도 '어차피 가치 없는 인간이 무슨 가치 있고 의미 있는 행동을 할 수 있느냐'라고 하면서 변함없이 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에서 나온 행동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스스로 가치 있는 행동을 함으로서 좀 더 나아진 인간이 되어 보려고 애를 씁니다. 이것이 주님을 믿지 못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5절에 보면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소망을 이루는 것은 우리의 가치 있는 행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되었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환난 속에서 즐거워하고 인내하고 연단하고 소망을 이루어갈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주로 말미암아 되어지는 것입니다. 주님께만 모든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것까지도 성령이 오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셨기 때문이지 결코 우리들의 믿음의 자질이 훌륭해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6절에서는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해 죽으셨다고 하고, 8절에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확증되었는데, 그 죽으심은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한 죽으심이었고 죄인된 자를 위한 죽음이었습니다. 결국 인간의 자질이나 행동은 전혀 도외시한 죽으심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결코 스스로 가치 있는 행동을 함으로서 우리 자신을 위대하게 만들어서 믿음과 사랑을 확증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해 죽으셨고 죄인된 자를 위해 죽으셨는데, 오늘날 성도들은 자신의 행동을 통해서 경건해 지려고 애를 쓰고 있고, 죄인이 안되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행동에 대한 가치와 의미를 없애 버릴 때 반발할 수밖에 없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하는 것은 하나님께 뭔가 해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이 하신 일, 즉 십자가에서 피흘리신 그 일만 높이고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경건치 않을 때 우리를 위하여 그리스도가 죽으심으로 확증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항상 또 다른 사랑을 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올 때마다 '하나님 사랑해주세요'라고 떠들어댑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모두가 세상의 복이고, 형통이고, 문제 해결이고, 내가 하는 일을 도와주는 것으로 일관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확증되었는데도 그 사랑 말고 또 다른 사랑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서 복주시는 사랑이 아닙니다. 설령 그것이 여러분 보기에 가장 선하게 보이고 교회의 사명이라고 여겨지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은 교회의 일을 도움으로서 확증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서 이미 확증된 것입니다. 그것도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경건치 않을 때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는 자신의 경건치 않음과 죄인 됨을 아는 자이며 그런 우리를 위해서 피흘리신 그리스도의 피를 가장 귀하게 여기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달라고 한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가치 있어 보이는 행동을 했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이미 주어졌습니다. 문제는 그 사랑을 아느냐 모르느냐 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알고 싶다고 해서 알아지는 것이 아니라 5절에서 말씀하는 대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모든 것은 주님 편에서 합니다. 우린 다만 깨달아지고 알게 된 것으로 감사하고 살아가면 됩니다. 이러한 얘기가 성령을 받지 않은 자에게는 닫혀지고 이해할 수 없는 얘기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 신자는 행동이 있으되 행동에 어떤 의미나 가치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오직 중심은 그리스도의 피며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교회도 중심으로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확증된 그 사랑을 중심으로만 살아가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