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5:9-11 화목

여러분은 예수님 앞에서 무엇을 원합니까? 예수님을 원합니까 아니면 자기의 구원을 원합니까? 혹 예수님이 없이는 구원도 없고 천국도 없기 때문에 예수님을 원하는 것은 아닙니까? 예수님보다도 예수님 때문에 얻어지는 것에 더 관심을 가지고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하는 것에는 예수님은 피하여 도망쳐 버린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기를 원했지만 그것은 예수님이 좋아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만들어 내는 떡에 더 관심을 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혹 이러한 유대인들의 모습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모습은 아닌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천국 간다'라고 할 때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은 무엇을 생각합니까? 천국 가는 것에 관심을 두게 됩니다. 그리고 '천국을 위한 예수 믿기'가 되어버립니다. 이것은 믿음을 자기 구원과 연결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결국 다른 말로 하면 '천국만 아니라면 예수고 뭐고 안믿는다'는 심보인 것입니다. 믿기 싫은 것을 천국 때문에 할 수 없이 믿어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할 수 없이 하는 부분들이 우리에게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목사이기 때문에 기도하고 장로이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 장로라는 직책에 대한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서 할 수 없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목사 장로라는 직책만 아니라면 기도 안하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할 수 없이 하게 되는 것은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목사로서 살려고 하기 때문에 하기 싫은 기도를 억지로 해야 하고, 장로로서 살려고 하기 때문에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라는 것은 죽음과 연관됩니다. 믿음은 '이제 뭘 어떻게 할까요?'가 아니라 '주님을 따라 죽겠습니다'라는 고백을 하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믿음이 우리에게 묻는 것은 '살려고 하느냐 죽으려고 하느냐?'입니다.

신자는 믿음에 대한 오해부터 버려야 합니다. 믿음은 신자의 행위를 위한 힘이 아닙니다. 믿음은 내 힘으로 살아보려는 시도가 부질없음과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 때문에 지금껏 살아오고 있었음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예수님의 뜻은 예수님이 죽으신 자리에서 함께 죽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운명입니다. 이 운명은 누구도 거부할 수 없고 바꿀 수가 없는 고정된 것입니다. 문제는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뜻을 세상에서 사는 것으로 뒤바꿔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들이 확장과 번성을 외치고 부흥을 외치는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는 자는 살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정신나간 소리로 들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살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애쓰고 살아가는 세상에서 죽기 위해 살아라는 말씀이 황당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는 것은 잘 압니다. 그러나 세상은 사람들이 살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 때문에 온갖 더러움이 난무하고 판을 치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죽기 위해 산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평안이며 진리인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죽는 것과 연관이 있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 곧 피와 연관이 있습니다.

본문 9절에 보면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피로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는 것이 예수님을 아는 바울의 믿음입니다. 피로 인해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는 것은 의에 있어서 피말고 다른 것은 끼워 넣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심지어는 피를 믿는 인간의 믿음도 의에 끼워 넣을 수 없습니다.

마 26:28절에 보면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는 말씀을 합니다. 예수님이 흘리신 피를 그냥 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의 피'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약속은 피입니다. 피 외에 다른 것은 주님의 약속에 결코 포함되지 않습니다. 교회 부흥도 사업 성공도 좋은 대학 합격도 대기업에 취직하는 것도 모두가 약속에 포함된 것이 아닙니다.

구약 때부터 하나님이 하신 약속은 여러 가지가 아니라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오직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언급할 뿐입니다. 약속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요구하면 언제언제 주시겠다는 확답을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쪽에서 일방적으로 정하시고 이루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이 일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약속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살과 피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언약의 피를 제자들에게 나눠주시는 것은 제자들로 하여금 언약의 피에 참여하자는 초청입니다. 즉 예수님이 죽음에 참여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초청은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주어졌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서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는 것은, 의롭게 되어서 천국 가는 것을 좋아해라는 것이 아니라 '너희도 그리스도의 언약의 피'에 동참하겠느냐를 묻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피에 동참하자는 예수님 앞에서 '나 살려달라'는 외침이 어떻게 나옵니까? 살려고 하지 말고 죽으려고 하라는 예수님 앞에서 '나 죽기 싫다'는 외침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까? 결국 이것은 '피'라고 하는 통로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정을 통로로 삼고 예수 앞에 나오려고 하기 때문에 '나 좀 봐달라'는 말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찾아 나오는 예수님은 '기도하면 살려준다'는 약속을 가지고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는 분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서 피를 흘리시면서 '나와 함께 죽자'고 기다리는 분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피의 약속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살려주는 분으로 오해하고 살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이것을 우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이 피를 흘리셔야 했습니까? 10절에 보면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는 말씀대로 하나님과 우리의 원수된 관계 때문입니다. 오늘날 신자들은 '하나님과 원수 되었다'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분노하신다'는 것에 대해서 점차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자신을 하나님의 원수된 자로,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으로 보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원수된 자가 그리스도의 피로써 화목하게 되었다는 말씀에 대해서 실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수로 살아본 적이 없고 진노 대상으로 살아 본 적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가려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에 대해서 진노하시는지를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노하신다는 말씀에 대해서 의아해 하는 것입니다. 9절에서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고 말하고 있는데, 정작 그 말씀을 대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피로 인해서 의롭다 하심을 얻고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았다고 해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무엇에 대해서 진노하신다고 생각하십니까? 주일에 교회 안나오고 놀러간 것 때문에 진노하신다고 생각합니까? 십일조 안하는 것 때문에 진노하신다고 생각합니까? 하나님의 진노는 다른데 있습니다. 롬 1:18,19절을 보면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고 말하고, 21-23절을 보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해서 분노하시고 진노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허망한 생각과 미련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사람과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어 버린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이 받으셔야 할 영광을 다른 것으로 바꾸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하나님의 진노가 이해가 되십니까?

신자가 하나님의 진노를 모르면서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세상 전체를 물로서 심판 해버릴 정도로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진노에 대해서 별 마음을 두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관심이 있다면 그분이 무엇에 기뻐하고 무엇에 화를 내는가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이 하나님의 진노가 예수님의 피로서 사라진 것처럼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는 절대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진노를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여있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후서에서도 하나님이 진노로 인해서 세상이 불에 태워지고 사라질 것을 예언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담담하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우습게 여기거나 농담으로 여기거나 다른 사람의 일로 여겨버리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마치 노아 시대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노아의 말을 농담으로 여긴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는 결코 멈추어지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약속대로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근거가 피에 있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를 아는 자는 자연히 그리스도의 피에 관심을 둘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전혀 도움되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피를 믿는다는 기독교가 오히려 피에 대해서 관심이 희미해지는지도 모릅니다. 피를 믿는 기독교가 피에 대해서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것, 이것이 오늘날 현실입니다.

세상은 썩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몽땅 썩어질 것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썩어질 세상 것으로 영광을 얻으려고 야단법석입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의 피마저도 세상영광을 얻는데 도움이 안된다고 여겨지면 팽개쳐버릴 정도입니다. 그래서 오직 피를 말하는 복음이 교회에서 환영을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이유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썩어질 세상 것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예수 덕분에 세상 영광을 가져보기를 원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천하에 가장 어리석은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자임을 늘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진노 아래 있는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서임을 다시 한번 마음에 두십시오.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서 즐거워 할 수 있는 신자로 살아가십시오. 하나님이 진노를 생각하고, 진노 아래서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세상에서 하는 일이 안된다고 해도 괜찮은 것 아니겠습니까? 어차피 잠시 머물다가 떠날 세상이고, 다 썩어지고 불에 타버릴 것들인데 그것에 미련을 둔들 결국 우리들의 마음만 아프고 염려와 근심만 끊이지 않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때문에 세상을 하나님의 심판의 장소로 보고, 세상의 것을 썩어질 것으로 볼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복을 받은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