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죄의 문제입니다. 죄를 말하지 않고 심판을 말한다는 것은 심판을 무력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세대가 죄를 무시하고 있습니다.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죄에 대해 관심이 없이 살아갑니다. 죄를 모르기 때문에 죄의 함정 속에 빠져 있으면서도 그 현실에 대해서 눈을 뜨지 못합니다. 자신이 죄속에 있음을 모르기 때문에 심판에 대해서 무감각해지는 것은 당연하고, 심판에 대해서 무감각한 채 교회에 모든 관심을 두고 살아가기 때문에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대해서도 무감각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말하면서도 사실상 그리스도의 피의 중요성과 은혜는 망각하고 있는 이상한 세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찾아야 할 이유는 오직 죄 문제의 해결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이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죄 문제의 해결 말고 또 다른 목적이 있으신 것입니까? 예수님은 오직 죄를 해결하기 위해 오셨기 때문에 우리도 역시 주님 앞에 나오는 목적은 죄문제 해결밖에 없습니다. 만약 그외 다른 것을 목적으로 하고 주를 찾는다면 그것은 주님을 이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 12절을 보면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한 사람, 아담으로 인해서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그 죄로 말미암아 세상에 사망이 왔으며 이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고 합니다. 이것은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그대로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는 죄가 있고 그 죄가 우리를 사망으로 몰고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죄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나의 인격과 성품과 인내를 가지고도 얼마든지 죄를 물리칠 수 있을 것처럼 여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피흘림에 대해서 시큰둥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 믿는다고 말했으면 됐지 그것을 날마다 고백하고 살아야 하느냐'는 식입니다. 또는 나는 항상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간다고 자신만만하게 말하기도 합니다. 누가 피를 안믿는다고 하느냐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죄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모순을 드러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피를 아십니까? 제가 하나마나한 질문을 했습니까? 그러나 하나마나한 뻔한 질문이 아니라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우린 보통 '나는 그리스도의 피를 안다'고 생각합니다. 또 그렇게 여기고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피'에 대해서 말하면 '나도 안다'라는 반응부터 먼저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를 알기 위해서는 필연코 죄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죄를 모르고서 피를 안다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우리를 사망으로 끌고 가고 있는 것은 죄고, 피는 우리를 생명으로 끌어간다면, 이것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으로서 죄는 무엇이고 피는 무엇인지에 대해서 아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무엇 때문에 사망에 처하게 되고 무엇 때문에 생명으로 인도 받게 되는가를 알 것이 아닙니까?
죄의 결과가 사망이라는 것은 아담 때부터 이미 경고하신 말씀입니다. 창 2:17을 보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인간에게 '절대 죽지 않는다'는 말을 했고, 그 말에 넘어간 인간은 죽음을 생각하기보다는 눈앞에 보이는 선악과에 더 욕망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죄가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죽음이라는 것을 무시하고 현실에 욕망에 매달려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피는 심판을 전제로 하고 이 땅에 떨어집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철저히 현실의 욕망에서 벗어난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했을 때도 사탄은 현실의 것을 들고 나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무시하고 말씀을 내세웁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로 하여금 현실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지 현실을 도와주는 것이 아닙니다. 약 4:13,14절에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말합니다.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가 바로 우리들의 진짜 현실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현실은 무시하고 눈에 보이는 현실의 욕망에 매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2천년 전의 피흘리신 예수로 만족하려고 합니다. 오늘날에 십자가에 달리시고 피흘리시고 있는 예수님은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자신들이 열심히 예수님을 믿고 있고 예수님의 일을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에 있어서 십자가 지신 예수님은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2천년 전의 예수님이 날 위해 피흘리셨다는 것을 알고, 그 때문에 내가 죄사함 받고 구원받는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다 된 줄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롬 5:11절의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라는 말씀에도 이미 흥미를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 할 수 있는 근거는 죄와 피가 무엇인가를 알았을 때입니다. 9절에서도 말씀하시기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고 합니다. 과연 이러한 말씀들이 우리와 상관이 없는 것입니까? 아니면 어제 내가 피를 믿고 의롭다 하심을 얻고 구원을 얻었기 때문에 오늘은 나하고는 상관이 없는 말씀입니까? 우리는 죄에서 떠난 자가 아니라 다만 죄에서 그리스도의 피 때문에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일뿐입니다. 오늘도 내일도 피 때문에 의롭다 여김을 받고 살아가야 할 자입니다. 2천년 전에 피흘리신 예수님이 오늘 내 앞에서 내 죄 때문에 피흘리신 예수님이 되어져야 합니다.
이런 말을 하면 어떤 사람은 '날마다 죄만 생각하고 피만 생각한다면 예수님의 일은 언제 하라는 말이냐?'라는 반문을 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요 6:29절에서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교회와 연관지어서 생각하고 종교 행위와 연관지어서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피를 마음에 두고 그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일인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죄가 무엇인가를 아는 자는, 온통 죄에 파묻혀 살아가는 자신을 발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고백과 함께 주님께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죄를 아는 자는 용서하게 되어지고, 자랑하지 않게 되어지고,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을 의지하지 않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선은 행하고 죄는 거부할 힘이 없습니다. 날 때부터 죄가운데서 태어나기 때문에, 이미 죄가 왕노릇하고 있기 때문에 죄를 거부하거나 피할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 지시고 부활하심으로서 사망을 이기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생명에 대해서 소망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세상에 죄가 들어온 결과는 인간이 선악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선악을 알게 됨으로서 모든 일에 있어서 선한 것과 악한 것으로 구분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내 마음에 드는 것은 선한 것으로 간주하고 받아들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악한 것으로 간주하고 밀쳐 내 버립니다. 그러나 선과 악에 대한 판단 기준은 우리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나 중심으로만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선과 악은 오직 말씀이 구분할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말씀을 대할 때 '내 마음에 드는가 안드는가?'라는 시각은 버리고 '과연 하나님의 뜻이냐 아니냐?'라는 시각을 가지고 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는 '나'가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것을 세상에 나타내는 것이 최고의 관심사였습니다. 멋들어진 교회를 만드는 것도 예수님의 관심이 아니고 교인들을 많이 끌어 모으는 것도 관심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겠다고 하는 우리들이 관심을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고 살아가는 모습은 자기를 사랑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며 세상이 아니라 천국에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것으로 보여지는 것이지, 교회생활의 열심을 통해서 보여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신자로서 천국에만 소망을 두고 사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천국 때문에 기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신자입니다. 이 기쁨이 있기 위해서는 필연코 죄로 인한 인생의 마지막에 대해서 철저하게 절망을 해야 합니다. 이 절망이 없이 살아가기 때문에 항상 현실에 대해서 희망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대해서 희망을 두게 되고, 사람에 대해서 기대를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여러분이 신자로서 아름답고 이상적인 교회를 원하고 꿈꾸는 것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이왕이면 사랑으로 넘치고 서로서로 아껴주는 그런 교회에서 신앙생활의 재미를 맛보고 은혜라는 것을 체험해보고 싶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욕망임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이 욕망 때문에 교회가 자신이 원하고 희망하는 모습으로 나아가지 않을 때 실망을 하게 되고, 그 실망으로 인해서 그리스도를 믿는 기쁨조차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문제 있기 때문도 아니고 신자가 문제가 있기 때문도 아니라 전적으로 나 자신의 문제임을 알아야 합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는 신자가 그립습니다. 교회로 말미암아 교회 안에서 즐거워하는 것은 신앙도 아니고 신자도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교회가 다 무너지고 교인들이 다 사라져도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천국 또한 영원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걱정입니까? 죄를 알고 그리스도의 피를 앎으로서 현실을 바라보기보다는 심판이라는 내일을 오늘로 여기고 살아가십시오. 죄 파묻혀 살아가는 나 자신을 바라볼 수 있다면, 진실로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서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