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죄는 항상 자신에 대해서 만족을 누리지 못하게 합니다. 이는 비교 본능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보다 많이 가지고 많이 누리고 잘 된 자가 눈에 뜨이는 이상 인간은 항상 부족함을 느끼면서 세상에 목말라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갈증은 오직 생수 되시는 그리스도만으로 해소가 될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만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자이면서도 그리스도만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것을 원하고 있고 갈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 스스로 진단하고 들여다 볼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죄가 들어오고 그결과로 사망이 왔습니다. 14절의 말씀대로 사망이 왕노릇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즉 어느 누구도 사망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죄에 대해서 심각한 마음을 가지지 않고 있고 사망에 대해서도 심각함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쓸데없는 것에 마음을 두고, 쓸데없는 것 때문에 마음을 상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저나 여러분은 죄에서 벗어난 자들이 아닙니다. 죄를 이기는 자들도 아니고 사망을 이긴 자들도 아닙니다. 아직 우리는 죄의 세력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증거는 우리 역시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죄에 대해서, 사망에 대해서 관심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죄나 사망을 하찮게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망은 그 어떤 인간도 자기의 종으로 지배해 버립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에서 가장 선하고 착하다고 해도 사망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선함과 착함이 사망을 이기지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죄를 자기 양심과 윤리 도덕 또는 자기 신앙심을 가지고 이겨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급한 문제는 무엇입니까? 돈입니까? 건강입니까? 직장입니까? 그러나 돈이 있어도 결국 죽는 것이 우리의 마지막입니다. 아무리 건강해도 대기업에 취직해서 떵떵거리는 사람이 되었다고 해도, 모든 사람은 사망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가장 급한 문제는 사망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사망을 빼놓고 우리들의 모든 문제를 생각하니까 인생의 참된 의미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엉뚱한 것에 목메어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마지막은 부자와 가난한 자, 배운 자와 못배운 자, 강한 자와 약한 자로 구분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사망의 종으로서 영원한 멸망에 빠져야 할 운명 앞에서는 오직 사망에 빠진 자와 생명으로 들어갈 자로 구분될 뿐입니다. 그런데 죄를 모르고 사망을 모르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으로 자신을 평가하고 비교하고 구분하면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남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과 한탄과 불평과 불만 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죄가 있는 세상에 대해서 희망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윤리와 도덕으로 세상을 채우면 죄는 완전히 없앨 수 있겠지만, 그래도 천국과 비슷한 세상은 만들 수 있지 않겠느냐는 허황된 꿈을 버리지 못합니다. 이러한 허황된 꿈이 교회에도 만연하지 않습니까? 소위 이상적인 교회를 만들어 보겠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이 곧 세상 위에는 사망이 왕노릇하고 있다는 것을 무시한 생각입니다.
죄가 들어온 세상에서 모든 사람은 죄의 종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롬 3:9절에 보면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고 합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모두가 죄 아래 있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선언입니다. 이런 이유로 어떤 인간도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실체입니다. 다시 말해서 선을 행함으로서 죄를 극복해보겠다는 발상 자체가 이미 죄 아래 있는 인간의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선을 행함으로서 죄를 극복하자'는 것 자체가 죄가 세상에 들어온 것을 모르는 것이고, 자신이 죄의 종으로 산다는 것도 모르고, 인간에게는 그 어떤 희망도 없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선을 향한 욕구가 그리스도를 가려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하다고 인정할 분은 오직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 외에 그 어떤 것에도 선의 의미를 두어서는 안됩니다. 제아무리 기독교적이고 종교적인 모습이라고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행동이 아닌 것에는 선의 의미를 두면 안됩니다. 오늘날 교회가 엉망이 되가는 이유는 바로 이점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기독교적인 것에 선의 의미를 둬버리기 때문에 교회가 교회의 모습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교회는 선한 일을 하기 때문에 교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무리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교회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향한 믿음, 오직 그것 하나 만으로 교회로 인정받는데는 전혀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들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십자가를 믿는 믿음만 있으면 뭐하나 믿음으로 행해야지'라고 말합니다. 즉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인간편에서 하는 행동이 있어야 참된 교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 아래서 교회는 소위 믿음의 행동이라는 것을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그 행동에 열심인 자들이 곧 진짜 신자이고 진짜 교회인 것처럼 선전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교회가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있습니다. 13절에 보면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죄는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의 율법이 있기 전에도 있었는데, 율법이 들어오기 전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즉 죄가 무엇인지를 몰랐다는 것입니다. 죄가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에 인간의 행위에 대한 포기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이 들어옴으로서 모든 인간의 행위에 대해서 죄를 선포해 버립니다. 율법 앞에서는 어떤 인간도 행위를 주장하고 자기의 의를 내세울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율법을 지킨다, 말씀을 지킨다고 하면서 오히려 행위를 조장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포기하도록 요구하는 행위에 대해서 오히려 율법을 가지고 행위에 의미를 둬버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의미를 무시한 채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에게 교회에 대해서 절대로 이상적인 생각을 품지 말라는 것을 부탁드립니다. 교회를 향한 이상적인 생각은 그리스도를 향한 여러분의 시각을 가려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보기보다는 교회를 보게 하고, 그리스도로 즐거워하기보다는 교회로 즐거워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원하는 즐거움을 교회가 충족시키지 못할 때 교회를 향해서 불만을 내뱉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분명히 아셔야 할 것은, 교회는 여러분의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서 모이는 곳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교회란 내 욕구를 버리기 위해서 모이는 것이지 내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모이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교회로 모이실 때 스스로의 마음을 점검하시고 모든 욕구를 버리겠다는 각오로 나오셔야 합니다. 그 속에는 교회에 대한 욕구, 목사에 대한 욕구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대해서, 또는 목사에 대해서 어떤 욕구를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여러분의 기준이고 여러분이 원하는 것이지 결코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에 대한 욕구 불만이 여러분의 신앙의 삶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빼앗아 버린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교회가 여러분의 원하는 것 기뻐하는 것을 채워줌으로서 가지는 즐거움과 기쁨은 결코 옳은 것이 아닙니다. 단지 내 마음에 들기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할 뿐입니다.
사람들은 내 마음에 들고 내가 원하고 바라는 형태로 존재하는 교회를 참된 교회라고들 말하지만, 참된 교회는 인간의 마음에 드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교회입니다. 만약 인간 마음에 드는 교회가 참된 교회라면 아마 참된 교회의 모습은 여러 가지로 찢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마다 각자 원하는 교회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참된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의 피가 있느냐 없느냐로 구분될 뿐입니다. 내 마음에 드는 교회가 참된 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에 감사하고 그 피를 중심으로 모이는 교회가 참된 교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상하게 감사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니까 꼭 내편에서 보답을 하겠다고 설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리고 죽으실 때 우리에게 보답을 바라보고 죽으셨습니까? '내가 너희들 때문에 피흘리고 죽으니까 너희가 나에게 감사한다면 앞으로 좋은 교회 만들고 구제 많이 하고 선교도 열심히 하는 그런 교회를 만들어라 그것이 나에 대한 보답이다'라고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단지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하실 일을 한 것뿐입니다. 그리고 그 피로 인해서 생명을 얻은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에 감사할 뿐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이상적이고 훌륭한 교회를 만든다고 해도 그 교회가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교회도 결국 마지막때는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오직 남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이 아닙니까? 그리스도의 몸은 이상적인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열정적으로 찬양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구제하고 선교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모인 것을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자신이 죄 아래 있고 사망의 종노릇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자신에 대해서 철저히 절망한 채 오직 모든 희망을 예수님의 십자가에만 걸고 주님을 찾아 나오는 자입니다. 이런 신자는 이미 자신을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은 자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만 바라보라고 하는데 왜 거기에 대해서 의심을 가지는 것입니까?
죄란 그리스도의 피에 다른 것을 첨가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이미 인간의 모든 행위에 대해서 의를 두지 말 것을 요구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 율법의 의미를 무시한 채 인간의 행위에서 의가 되는 행위를 따로 구분하고 그 행위를 그리스도의 피에 첨가하고 있습니다. 결국 뭔가를 함으로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고 피를 믿는 자로 살아가고 있다고 착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신자의 신앙생활에 가장 방해되는 것이 예배드리는 것이고, 성경공부하는 것이고, 전도하고, 기도하고, 헌금 드리고, 선교하는 것 등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아마 이런 말씀을 드리면 의아해 하실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대로 제가 생각하는 신앙의 삶과 여러분이 생각하는 신앙의 삶이 서로 다르다면 제 말에 대해서 의아해 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의 피만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을 신앙의 삶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기에게서 어떤 행위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믿음과 연결시키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피가 나를 살린다는 것만 철저하게 믿고 살아가면 그것이 곧 신앙 생활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은 신앙생활을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다면 예배드려야 하고 전도하고 헌금하고 구제해야 하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감사를 하게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에게 문둥병을 고침 받은 사람들이 10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단 한명만이 다시금 예수님께로 돌아와서 감사를 했습니다. 문둥병 고침 받았다고 가서 복음을 전도하고 예배드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감사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교회에서 하는 행위들이 자칫 잘못하면 그리스도의 피를 가리고 감사를 가려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오히려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것으로 말씀을 드리는 것은, 여러분이 신앙적인 행위와 일상적인 행위를 구분해서 생각할 위험이 있기 때문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일과 자기 일을 따로 구분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배가 신앙생활에 방해되기 때문에 하지 말자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가 신앙에 방해가 되는 경우는 예배를 드림으로서 '예수 믿었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신앙생활에 방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배를 드리면서도 '하나님이 죄 아래 있고 사망의 종으로 살아가는 제가 하나님께 나와서 예배드리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라는 마음으로 기뻐할 때 예배가 신앙에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15절에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오직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다고 말합니다. 예수님 한분이 잘하셔서 그 선물이 오늘 우리들에게 넘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또 잘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것입니까? 인간이 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그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겠습니까?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이 되겠습니까? 이미 주님으로 주어진 선물이 저와 여러분에게 넘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만 그것을 감사하고 누리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넘치고 있기 때문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누리는 자가 바로 자유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