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5:15-19 한 사람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아주 귀한 말씀이라고 생각들을 하지만 귀하다고 생각만 하면 뭐합니까? 무엇 때문에 말씀이 귀한지도 모르면서 '귀하다'고 떠든다고 해서 신자되는 것도 아니고 말씀을 믿는 것도 아닙니다. 말씀은 말씀으로서의 가치와 존귀를 알 때 비로서 귀한 말씀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에 담겨 있는 생명을 발견했을 때 귀한 말씀이고 은혜의 말씀이지 생명을 발견하지도 못한 소경으로서 어떻게 말씀의 귀함을 알겠습니까?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말씀의 존귀함과 가치를 생명을 기준으로 해서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기준으로 해서 찾습니다. 즉 내 마음에 와 닿고 내 마음을 흡족하게 해주고 뭔가 위로를 던져주고 내 생각에 맞아 떨어지는 말씀을 들었을 때 '은혜 받았다'고 하고 '참 귀한 말씀이다'고 칭찬을 합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사람에게는 은혜의 말씀이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냉냉한 말씀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가령 평소 인간의 도덕적인 삶에 관심을 두고 있었던 사람이라면 도덕적인 삶을 외치는 설교를 들었을 때 '은혜 받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도덕적인 삶에 대한 관심보다는 선교하는 것에 모든 관심을 두고 있던 사람이라면 도덕적인 삶에 대해서 시큰둥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목사들은 여러 사람들이 즐겨하는 각가지 입맛에 맞춘 설교를 하기 위해서 참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의 존귀함과 가치를 내 감정을 가지고 분별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내 감정은 그 자체가 이미 내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고전 15:48-50절에 보면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흙에 속한 자로서는 하늘에 속한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흙에 속한 내 감정으로 하늘의 진리를 이해하고 분별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크나큰 실수를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은 받는 자에 의해서 이해하는 방향이 전혀 달라지게 됩니다. 하늘에 속한 자라면 하늘에 속한 말씀으로 이해될 것이고, 땅에 속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세상적이고 육신적인 개념에서 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땅에 속한 자에게 말씀을 이해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서 말씀은 우리를 살리기 위한 설득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누가 하나님 백성이며 하늘에 속한 자인가를 구별하는 말씀으로 다가온다는 사실에 눈이 띄어져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보는 자의 마음대로 보여지게 됩니다. 윤리도덕군자의 마음으로 보게 되면 윤리와 도덕을 가르치는 말씀으로 보여지고, 교회 부흥에 마음을 두고 보게 되면 교회를 부훙을 돕는 말씀을 보여지게 되고, 생존에 집착한 마음으로 보게 되면 나의 생존은 돕는 말씀으로 보여지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내 마음이란 아무리 깨끗하고 양심적인 마음이라 할지라도 육신적인 마음일 뿐입니다. 나의 욕구와 소원을 그대로 간직한 마음입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말씀을 대하고 분별하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뿐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기 마음은 덮어 버리고 오직 성경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마음으로 말씀을 대해야 합니다. 그럴 때 내 마음으로 보지 못했던 하늘의 진리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마음으로는 볼 수 없는 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한 사람으로 인한 죽음과 한 사람으로 인한 생명입니다. 그런데 죽음과 생명에 대한 문제는 평소 인간의 관심거리가 아닙니다. 인간은 말씀에서 죽음과 생명이란 문제는 제해버리고 오직 세상에서 생존하는 문제에만 치중하고 살아갑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가 관심거리입니다. 죽음이란 문제를 생각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바르게 살면 그것으로 자신의 마지막이 달라질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15절에서는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라고 말합니다. 또 16절에서는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라고 말하고 17절에서는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라고 하고, 18절에서는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것같이"라고 말하며, 19절에서는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라고 말합니다. 이와같이 여러 구절에서 말하는 것은 한 사람으로 인한 죽음과 정죄와 사망과 심판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이 현실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접하고 또 가까운 친지와 식구들의 죽음을 통해서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는 문제들입니다.

죽음은 분명 세상에 죄가 들어왔고 그 죄로 인해서 사망이 왔으며 사망이 왕노릇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든 문제를 죽음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어떻게 살것인가?'라는 물음을 던져 놓고 그것을 가지고 고민하고 이러저런 궁리를 한다는 것은 인간의 운명이 어떤 것인가를 모른다는 증거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죽음에 대한 문제에 무지하기 때문에 자연히 죽음을 극복하고 존재하는 생명에 대해서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죽을 병에 걸린 사람이 어디에 병을 고칠 수 있는 약이 있다고 할 때 그것으로 달려가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죽을 병이 걸렸으면서도 자기의 병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사람은 약에 대해서 관심을 안두게 됩니다. 자기하고는 별 상관없는 일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바로 이런 상태입니다. 죄라고 하는 죽음에 붙들려 살아가고 있으면서 자기를 붙들고 있는 죄를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죽을 병에서 살리는 약에 대해서는 단지 듣는 것으로 지나쳐 버리고 오직 '무엇을 할 것인가'에만 열중하고 살아갑니다. 아무리 위대한 일을 했다고 해도 결국 죽는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말입니다.

결국 사망이라는 자신의 상태를 도외시한 채 말씀을 대하기 때문에 사망을 극복하고 주어지는 생명이라는 엄청난 은혜로 즐거워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마음으로 말씀을 대하는 자에게서 나타나는 태도입니다.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말합니다. 즉 죽음의 이유는 범죄입니다. 보통 범죄라 함은 사회적인 차원에서 나쁜 일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범죄의 차원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깨끗하지 못한 것'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이 만드신 본래의 모습이 아닌 것은 모두가 범죄한 것으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인간을 평가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인간의 행동과 인간 관계를 보고 선인과 악인을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깨끗함의 여부를 보시고 판단하십니다. 때문에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죄인 됨을 피할 수 없습니다. 죄지었기 때문에 죄인이 아니라 죄중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이미 죄인인 것입니다. 이렇게 사망이라는 울타리 속에 갇혀 살아가는 인간들이 그 속에서 무슨 착한 일 좋은 일을 했다고 해서 사망이란 울타리를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까? 전혀 아닙니다.

이렇게 사망에 갇혀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희망을 주고 기쁨을 주는 말씀이 오늘 본문에 같이 등장을 합니다. 15절에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고 하고, 17절에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리로다"라고 말하고, 18절에서는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고 하고, 19절에서는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으로 인해서 죄가 들어오고 사망이 들어온 세상에 한 사람의 의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은혜가 넘치고 생명안에서 왕노릇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사망을 이기는 것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행동입니다. 그 행동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에게 은혜가 넘치게 되고 의롭다 하심을 받고 생명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복음이라고 합니다.

은혜란 죽음을 이기는 요소가 들어있습니다. 죽음을 이기지 못한 은혜는 은혜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교회들은 인간의 감정을 자극하고서는 그것을 은혜라고 떠듭니다. 은혜는 내 기분에 좋고 내 마음에 맞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은 인간의 모든 것을 부수면서 들어옵니다. 그 어느것 하나 용납하지 않습니다. 생명은 인간이 추구하고 인간이 목표했던 모든 것들을 쓰레기라고 공격을 합니다. 이러한 생명이 우리에게 들어올 때 과연 내 기분이 좋고 마음에 흡족하겠습니까? 오히려 심한 충돌과 갈등이 발생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감정과 내 마음을 가지고 말씀을 분별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 중심으로 나가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내 마음과 충돌이 일어난다고 해서 말씀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분명히 오늘 말씀에서 한 사람으로 인해서 죄가 들어오고 사망이 온 것 같이, 한 사람의 의의 행동으로 인해서 은혜가 넘치게 되고 생명이 왕노릇하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겠습니까? 자기 마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말씀을 대한 자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죽음을 바라보는 자입니다. 이런 신자가 그리스도의 의의 행동을 의지하게 될 것이고 생명이 왕노릇 함으로 사망에서 벗어난 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의의 행동이 우리에게 은혜의 선물을 넘치게 하였으니만큼 우리는 자기의 행동을 보지 말고, 자기의 행동에 의의 의미를 두지도 말고 오직 예수님 한 분의 의의 행동 때문에 은혜가 넘치게 되었음을 감사하고 그것을 기뻐하는 것이 곧 신자의 본분임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