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5:20-21 율법과 은혜

여러분이 식당에서 음식을 먹을 때 더러운 바닥에 떨어진 것을 다시 집어서 대충 닦아낸 다음 다시 먹습니까? 그럴 사람은 없다고 봅니다. 더러운 바닥에 떨어진 것은 더러운 먼지가 얼마나 묻었든 상관없이 버려 버립니다. 조금 더러우면 대충 닦아서 먹고 많이 더러우면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더러운 바닥에 떨어진 것이라는 그것 자체가 먹지 못할 조건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인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처음 인간을 창조했을 때는 깨끗한 존재로 창조했습니다. 하나님께 기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인간이 더러운 죄에 떨어졌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그러한 인간을 다시 집어서 대충 씻어서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겠습니까? 아예 버려버리는 것이 당연합니다.

세상의 모든 인간은 죄에 떨어진 자들입니다. 죄 아래서 살아갑니다. 무엇을 해도 인간은 죄인입니다. 이것만큼은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어떤 착한 일을 해도 '나의 본질은 죄인이고 더러운 존재다'는 것은 잊으면 안됩니다. 여러분이 행한 착한 일 때문에 '나는 죄인이다'는 인식이 희미해진다면 아예 착한 일을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죄인은 죽을 때까지 죄인이며 산더미 같은 착한 일을 쌓아놔도 그 결과는 죄인입니다. 만약 이점을 거부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스스로 죄인임을 자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죄가 속에 감추어진 채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내면에 감추어져서 고개 숙이고 기회를 엿보고 있는 죄를 드러내기 위해서 율법을 주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현재 많은 교회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 반대되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는 율법을 말할 때 행함의 대상으로 말합니다. 할 수있는데까지 최선을 다해서 실천해야 할 신자의 덕목으로 가르칩니다. 율법을 지키라고 하면서 '이것을 지킨다고 해도 역시 죄인입니다'라는 말이라도 하면 좋겠는데, 지키면 지킬수록 믿음이 있는 사람이고 복받을 사람이 되어 가는 것으로 가르쳐 버립니다. 하기사 지켜도 역시 죄인이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율법을 지키라는 말을 하겠습니까? 지켜도 죄인이라면 누가 율법을 지키려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율법이 주어진 그 이유가 아주 명확하게 명시되어 있습니다. 20절에 보면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고 합니다. 율법이 가입한 것, 즉 율법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상을 주기 위함도 아니고 복을 주기 위함도 아니라 오직 범죄를 더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이해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보통 법이라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짓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만들어 졌습니다. 이것이 법에 대한 일반 상식입니다. 그런데 20절에서는 율법이 주어진 것은 죄를 짓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범죄를 더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즉 죄를 조장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율법이다는 뜻이 됩니다. 여러분은 이 말이 이해가 됩니까?

그렇다면 율법이 범죄를 더하게 한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이것은 결국 '하라' '하지 말라'는 법을 통해서 인간의 내면에 숨어져 있는 죄의 모습을 끌어낸다는 뜻의 말씀입니다.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는 죽는 이유를 몰랐는데, 율법이 주어짐으로 해서 죄 때문에 죽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율법을 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해 보십시다. 율법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인간의 자랑거리가 사라집니다. 바리새인들이 자랑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자기들은 율법을 받은 자이고 율법을 지키는 자라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자기들만이 하나님의 백성이고 구원받을 존재라는 것을 자랑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만약 율법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그들은 무엇을 자랑했겠습니까? 율법이 없다면 제사하고 구제하고 십일조 한다고 해도 그것을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하라고 말씀하지도 않은 것을 하면서 '나는 이것을 했다'라는 자랑을 할 수 있습니까?

오늘날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의 교회가 신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의 대표적인 것은 주일 잘지키는 것, 십일조 하는 것, 봉사 잘하는 것 등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하나님의 법으로서 신자들에게 제시합니다. 일단 하나님의 법으로 제시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시키는 것이고 그것을 실천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는다는 것이 법의 공식입니다. 실천하면 그만한 대가를 준다는 것은 세상 상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하나님이 법이라고 말씀하는 것을 실천하면서 그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게 됩니다. 실천했으니까 뭔가 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들이 율법이 없을 때 드러나겠습니까? 안식일 지키라는 법이 없는데 주일을 지키면서 그것을 신앙이라고 말하고 복을 받는 방법이라고 말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요구하지 않은 것은 실천할 필요도 없고 실천한다고 해도 자기 자신에게 복으로 다가오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실천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예 처음부터 실천해야 할 이유도 없고 실천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무엇이 드러나지 않습니까? 자기 중심으로 살고 자기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죄가 드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천국보다는 상을 기대하고 살아가는 죄가 드러나지 않게 됩니다. 그럴 때 인간은 자기의 죄를 모르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율법을 주심으로서 인간의 내면에 감추어져 있는 죄를 끄집어 내시고자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 때문의 인간의 죄를 드러내시는 것입니까? 그 이유도 역시 20절을 보면 명확하게 나와 있습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은혜는 자신의 죄를 깨달은 사람에게 넘친다는 뜻입니다. 결국 자신의 죄를 모르는 사람들이 말하는 은혜는 진정한 은혜가 아니라는 뜻이 됩니다.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거저 주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은혜는 '나는 받을 자격이 없는 자다'는 것을 아는 그 자리에서 넘치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에게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 은혜가 아니라 일한 대로 받는 삯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상급을 말하지만 상급이라는 것도 역시 일한 대로 받겠다는 생각에서 나온 말입니다. 내가 한 것만큼 받아 챙기겠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무시하고 행한 대로 대해달라고 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행한 대로 보응 하십니다. 그렇다면 그 결과가 무엇이겠습니까? 행한 대로 보응 하실 때 결과는 사망일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은혜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필히 자신의 죄를 알아야 합니다. 자기 죄를 알고 자기 의에 대해서 완전히 포기할 때 십자가의 피가 우리의 죄를 가리우고 우리를 의로 여기시고 천국가게 하신다는 하나님의 은혜가 가슴에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분명히 율법은 실천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를 더하게 하셔서 자신의 의에 대해서 포기하게 하시고 은혜가 넘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율법을 들이 대고 실천을 요구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다 아니할 수 없습니다.

구원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우리의 죄를 극복하고 주어집니다. 자기 죄를 극복하고 주어지는 구원은 생각하지도 않고 단지 2천년 전에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다고 말만하면 주어지는 구원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의 죄와 상관없이 단지 예수 믿는다는 말만 하면 주어지는 구원으로 인식되어 버립니다. 이것을 위해서 율법을 주시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자신의 뿌리 깊은 죄를 알게 하고, 상대적으로 구원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깊고 넓은가를 알게 하시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그러면 죄를 앎으로서 은혜가 더욱 넘친 자에게는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까? 21절에 보면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은혜가 넘친 자에게는 은혜가 왕노릇 한다고 합니다. 사망이 왕노릇한다는 것은 사망 아래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은혜가 왕노릇한다는 것은 은혜가 나를 붙들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영생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은혜가 나를 붙들어서 영생에 이른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 아닙니까? 신자는 은혜가 왕노릇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되기 때문에 이젠 더 이상 구원을 위해서 보태야 할 우리의 노력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말을 하면 '그러면 은혜로 구원을 얻으니까 아무 것도 하지 말란 말이냐?'는 반문을 합니다. 이것은 아직까지 행위를 자기를 위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하게 되는 말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위한 행위가 아니라 주님을 위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무엇을 하든지 주를 위해서 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가 왕노릇하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알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실패할 수밖에 없고, 미련하고 완악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합니다. 그럴 때 실패하지 않으시고 사망을 이기신 분으로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더 이상 죄가 그 운명을 좌우하지 못합니다. 이제 우리의 인생과 영혼과 운명은 주님의 손에 붙잡힌 바 되었고 그의 약속이 이루지기 위해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간섭하시고 일하십니다. 은혜 앞에서 자기 것을 내어놓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이것처럼 미련한 짓은 없습니다.

신자는 은혜에 끌려가는 자입니다. 내어놓을 것도 은혜입니다. 은혜로 살아가고 은혜로 천국 가는 그 기쁨과 행복함을 내어놓으십시오. 그것이 신자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세상 것이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입니다.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하는 은혜가 우리를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실패한들 그것으로 영생이 취소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두려울 것이 무엇입니까? 문제는 사람들이 영생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영생에 관심이 없는 분이 교회는 왜 오는 것입니까? 교회는 오직 생명을 얻고자 원하는 신자의 모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