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6:1-5 죄와 은혜

마 23:15절을 보면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하신 책망의 말씀인데, 바리새인들이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해서 온 사방을 다니면서 열심히 전도해 놓고는 막상 교인 한 사람이 생기면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든다고 하면서 도리어 사단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현실이 바로 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현대 교회들의 전도에 대한 열심은 참으로 대단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힘들여 전도해 놓은 교인이 교회에서 몇 년 지나고 나면 어떻게 변합니까? 물론 다는 아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교회를 오래 다닐수록 위선적으로 되어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자가 교회를 다니면서 오랫동안 설교를 들었기 때문에 어떻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살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다는 것입니다. 머리에는 그리스도가 있는데 마음에서는 그리스도를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처음에는 말씀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서 가책을 해보기도 하고 기도도 해보지만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하나님이 용서해 주신다는 말을 이용해서 자신의 허물을 덮어 버리려고 합니다. 즉 세월이 흐를수록 하나님이 용서해주신다는 사실에 대해서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때문에 저는 대표 기도하는 분들의 기도 내용 중에서 싫어하는 문구 중의 하나가 '엿새동안 지은 죄를 용서해 주시고'라는 대목입니다. 6일 동안 하나님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던 사람이 기도 한마디를 가지고 모든 것을 해결해 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회개할 필요도 없이 주일에 한번 교회에 나와서 '6일 동안 지은 죄를 용서해 주시고'라는 말 한마디로서 자신의 모든 행위에 대해서 방어막을 쳐버리는 뻔뻔함을 보이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런 기도에 익숙해져 있을수록 자기 죄에 대해서 둔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죄에 대해서 둔해져 있으니까 내가 지금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옳은 것인지 잘못된 것인지 점검하고자 하는 마음도 생기지 않고, 그냥 자기 좋을 대로 살아가다가 주일 되면 겨우 교회라고 찾아오는 형편입니다. 이런 결과로 믿는 것과 사는 것이 별개의 문제로 독립이 되버리는 것입니다. 믿는 것과 사는 것이 별개의 문제로 독립되어 있기 때문에 말씀으로 내 가슴을 치는 살아있는 신앙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리고 결국 머리로만 믿으려고 하는 신앙 아닌 신앙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슴을 치는 살아있는 신앙이 있습니까? 날마다의 삶에서 자기를 돌아보면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이 발견되어질 때마다 내 자신이 미워지고 하나님이 두려워지고 세상이 싫어지는 모습이 발견되어집니까? 만약 여러분에게 그러한 모습이 없다면 분명히 여러분의 신앙에는 문제가 있다는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가슴을 치는 신앙이 아니라 머리로만 아는 신앙은 항상 죄에 대해서 둔할 수밖에 없고 법적인 신앙만 나타내 보일 뿐입니다. 이렇게 이렇게 하지 않으면 믿음이 아니라고 하면서 법적인 것을 가지고 남을 비판하고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잘못됨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항상 내 가슴을 치는 신앙의 삶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도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남을 보겠다는 것입니까? 그래서 여러분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6일 동안 지은 죄 용서해 달라는 틀에 박힌 기도를 하지 마시고 하루하루 살아가시면서 발생하는 모든 삶속에서 말씀을 가지고 자신을 치는 신자로 살아가시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날마다 여러분의 삶에서 여러분을 감시하고 책망할 때 비로소 여러분의 삶을 통해서 설교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어떤 사람들은 '그것은 이론이지 실제로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가?'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이론이라는 말로 일축해 버리고자 하는 것은 결국 그렇게 살기 싫다는 자기 의도를 드러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말은 맞는 말이지만 그렇게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은 결국 삶이 우선이지 말씀이 우선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육신의 삶을 위해서는 땀흘리고 뛰어다니고 체면도 버릴 수가 있고 자존심도 버릴 수가 있다고 하면서도 말씀을 세우기 위해서는 결코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하늘의 생명보다는 육신의 삶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 입으로 아무리 그리스도를 말하고 믿음을 말한다고 할지라도 결국 '가짜'라는 진단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저는 가능하다면 여러분의 마음을 헤집고 확인해 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마음에 예수님이 계시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가득차 있는 하늘 나라에 대한 열망이 있는지 아니면 하늘나라보다는 세상을 살아가는 재미가 더 마음을 크게 차지하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여러분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진단하고 확인하는 삶을 게을리 하지 말기를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자신의 마음을 점검해야 할지를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수시로 자기 마음의 상태를 점거하면서 살아가시라는 것입니다. 부부싸움을 했으면 싸움을 하고 나서 '왜 싸웠는지 싸울만한 것으로 싸웠는지' 말씀을 통해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있어야 하고, 자식을 나무랐으면 왜 나무랐는지 돌아봐야 하고, 주일 예배에 빠졌다면 과연 무엇 때문에 빠졌는지를 점검하면서 과연 나 자신이 진짜 귀중하고 가치 있는 것을 좇아 살아가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삶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제가 당부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1절에 보면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라고 말씀합니다. 이 구절은 지난주에 말씀드렸던 율법에 대한 이야기에 계속된 말씀입니다. 지난주에는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실천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범죄함을 더욱 드러내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율법이 주어지니까 사람들은 그 법을 지키고자 온갖 노력을 다합니다. 그리고 그 노력의 결과로 법을 실천하는 모습이 보여질 때 사람들은 실천하는 자기의 의를 드러내게 됩니다. 자기의 의를 드러냄으로서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희미해지게 됩니다. 말씀대로 실천했고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했으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잘한 것이고 하나님 보시기에 잘한 것이 있으니까 은혜를 주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결국 공짜로 주어진 은혜가 아니라 잘한 것이 있으니까 당연히 받는 것으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죄를 드러내기 위해서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랑할 수 있는 실천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에 대한 부분입니다. 하나님이 말한 것을 내가 실천했다는 것이 자랑거리이고 자기 의를 드러내는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하라 하지 말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의로 여길만한 실천 역시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현대 교회는 주일을 지키는 것을 의로 여깁니다. 그리고 주일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구약의 '안식일을 지켜라'는 율법에서 이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만약 안식일을 지켜라는 법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주일을 지키는 것을 의로 삼을만한 근거가 사라집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주일 지켰다는 것을 자랑하고 의로 내세울 수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내면에 감추어져 있는 자기를 의지하고 자기 행위를 믿는 범죄함이 드러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인간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죄의 정체를 하나한 밝혀내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죄를 드러내게 함으로서 죄를 덮어버리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가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많이 깨닫기 위해서 죄를 더 많이 지으면 되겠네'라는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의 의를 포기하지 못하는 인간이 하나님을 난처하게 하기 위해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질문입니다. 그러면 여기에 대한 답은 무엇입니까? 2절에 보니까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고 합니다. 죄에 대해서 죽은 우리가 죄 가운데서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하나님의 은혜로 죄를 용서받은 신자는 죄를 떠난 자가 되었는데 어떻게 죄를 더 지을 수가 있느냐는 뜻이 아닙니다.

2절의 말씀은 죄가 왕 노릇하던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이제는 은혜가 왕 노릇 하는 자가 되었는데 어찌 죄에 거할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죄와 상관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왕노릇한다면 항상 은혜의 쪽으로 가려고 애를 쓰는 것이 당연한데 어떻게 은혜를 더 얻기 위해서 일부로 죄의 자리로 들어가고자 할 수 있느냐는 뜻입니다. 이것은 은혜가 왕 노릇하고 있는 신자의 모습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조그만 죄를 용서받으면 은혜도 조금 알게 되고 큰 죄를 용서받으면 은혜를 크게 알게 된다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모든 죄를 다 덮고 있다는 것을 무시한 생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은 죄를 지어서 은혜를 더하게 하면 되느냐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이 죄는 작은 죄 큰 죄의 구분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100만원을 사기친 사람이 있고 살인 강도를 한 사람이 있다고 할 때 누구의 죄가 더 큽니까? 세상 적인 시각으로는 살인 강도한 사람의 죄가 더 크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말하는 죄란 인간 관계에서 발생한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죄는 인간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죄를 말합니다. 따라서 100만원을 사기 쳤든 살인 강도를 했든 그 행위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을 보시는 것입니다.

사기를 쳤든 살인 강도를 했든 그 마음의 출발은 똑같이 돈입니다.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는 탐욕에서 사기를 치고 살인 강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비록 사기를 치지 않고 살인 강도를 하지 않았다고 해서 죄인이 아닙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사기나 살인강도라는 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 마음에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는 역시 사기친 사람이나 살인 강도나 같은 사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보시는 죄입니다.

따라서 죄를 적은 죄 큰 죄로 구분할 수 없고 은혜 역시 큰 은혜 적은 은혜로 구분할 수도 없습니다. 즉 사기를 치고 살인 강도를 하고 또는 그런 행위를 하지 않은 자신을 보지 말고 자기 속마음, 즉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는 마음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것이 죄로 드러나게 되고, 그 죄에 대한 동일한 형벌은 사망입니다. 따라서 자기 행위를 보면 자기 죄에 대해서 가벼운 마음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가벼운 잘못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죄는 죄이지만 적은 죄로 보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에 은혜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행위를 보지 않고 마음을 볼 때 행위에 관계없이 '나는 죽은 자다'는 선고를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 사기를 한 사람이나 살인 강도를 한 사람이나 그런 행위를 하지 않은 사람이나 동일하게 자신을 죽은 자로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죄를 더 지어서 은혜를 더하게 하겠다는 말은 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은혜는 사기 치고 살인 강도한 행위를 덮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고 세상을 더 사랑하는 우리의 더러운 마음을 덮어버립니다. 따라서 자기 자신의 더러운 마음을 아는 자는 은혜를 더 받기 위해서 뭘 한다 안한다는 말을 할 수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가 왕노릇하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죽은 자입니다. 죽은 자가 은혜를 더 얻기 위해서 뭘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단지 외부에서 주어진 것으로 감사할 뿐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더하기 위해서 죄를 더 지으면 되겠네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죽은 자임을 모른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생각은 여전히 죄가 왕노릇하고 있는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자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면, 그것은 앞서 말한 대로 신앙이 머리에만 살아있고 가슴에 살아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 가슴을 치는 신앙이 없기 때문에 머리로 이런 생각 저런 생각만 굴리면서 끝까지 인간을 부인하기 싫어하는 의도가 담긴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 받은 자의 특성은 은혜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사망에 처한 내 죄를 덮고 있는 은혜를 자랑하기 바쁘지 은혜를 더 받기 위해서 죄를 더지으면 되는가라는 생각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은혜가 왕노릇하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감사하다는 심정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받은 은혜가 적다고 하면서 은혜를 더 받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한다는 것은 여전히 받은 바 은혜가 없이 죄에 끌려 살아가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설교를 시작하면서 믿음과 삶이 구분되면 안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날마다 살아가면서 확인해야 하는 것은 '내가 죽은 자로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향해서 죽은 자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믿는다면 날마다 죽은 자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왜 성경은 우리가 죽은 자임을 강조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죽은 자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얻고 새로운 생명을 얻은 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그리스도와 합하여 죽은 자가 되었다고 하고 함께 장사되었다고 하고 주와 함께 살리심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자기의 죽음을 모르는 자는 결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얻는 새생명의 비밀을 알 수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