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6:6-11 죽은 자와 산 자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상식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살이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 나라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말씀을 대하는 우리들이 하늘 나라에 대한 사고방식을 갖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로 가득차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오늘 본문 역시 그렇습니다. 세상 어디를 가도 들을 수 없는 말이고 또 세상 살기에 바쁜 사람들에게는 전혀 흥밋거리가 되지 않는 말만 늘어놓고 있습니다.

본문은 한마디로 말해서 '신자로서 누리는 은혜가 어떤 것이며 은혜 받음의 증거는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씀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은혜를 안다고 하고 은혜 받은 증거가 있다고 말은 하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전혀 은혜도 아닌 것을 은혜라고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흔히 간증을 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은혜를 들어보면 모두가 극적인 순간이 연출된 사건을 가지고 은혜라고 말합니다. '돈 100만원이 필요했는데 기도하니까 다른 사람을 통해서 채워주시더라'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팔아먹고 있습니다. 그리고 듣는 사람들도 그러한 간증을 들으면 '아멘' '할렐루야'하고 정신없이 외치면서 자신에게도 그러한 극적인 순간의 은혜의 체험이 주어지기를 기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사람들이 기대하는 은혜는 자신의 삶을 형통하게 해주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은혜 받았다고 하는 증거도 역시 신비적인 체험으로 생각합니다. 가슴이 뜨거워진다든지 눈물이 솟구친다든지 감정이 복받쳐 오르는 체험들을 가지고 은혜 받은 증거로 생각해 버립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신앙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오늘 본문과 같은 내용들이 마음에 와 닿을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세상이 알 수 없는 은혜와 은혜의 증거가 무엇인가를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제대로 알고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죽는다는 말이 많이 나오고 산다는 말도 나오고 있습니다. 죽고 산다, 이것이야말로 십자가의 오묘한 진리이고 비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진리와 비밀을 이해하지 못하고서 십자가를 안다고 할 수 없고 은혜를 말할 수도 없습니다.

10절에 보면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라고 말씀을 하는데, 사도 바울이 이 말을 하게 된 동기는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대로 1절의 말 때문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이 말은 죄를 많이 지으면 은혜를 더 많이 알 것이 아니냐는 반문이라는 것을 설명 드렸습니다. 여기에 대한 답이 2절의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지금껏 사도 바울은 율법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구원은 율법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 믿음조차도 우리가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은 행함입니다. 그런데 그 율법을 무시한다는 것은 결국 인간의 모든 행함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행함은 그 어떤 것도 구원에 보탬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또 믿음의 증거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드러내고 자랑하는 것이지 결코 행함으로 증거 되는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이렇듯 인간의 행함을 부정할 때마다 불평을 터뜨리면서 노골적으로 시비를 거는 것은, 그러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안하고 놀고만 있어도 되겠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다 하신다는 말에 노골적인 불만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무 것도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이 말속에는 '우리가 아무 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는데 교회가 되느냐?'는 조롱도 같이 섞여 있습니다.

신자들이 봉사도 안하고 헌금도 안하고 아무 것도 안해 버린다면 교회가 어떻게 유지가 되고 목사는 또 뭘 먹고사느냐는 생각이 포함되어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아주 타당한 말 같지만 이것은 인간의 입장에서 타당한 말일뿐이지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결코 타당한 말이 아니라 지독한 불신앙을 드러낸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람이 아무 것도 안하면 교회가 안된다는 것은, 날마다 교회로 모이게 하시고 교회 되게 하시는 성령님의 활동을 정면으로 무시하는 것입니다. 물론 헌금을 안해버리고 봉사를 안해 버리면 교회가 어려워지고 심하면 문을 닫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목사의 생활이 어려워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문을 닫는 것은 은석교회이지 하나님의 교회가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신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시기 위해서이지 목사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목사가 오직 은혜만 강조하고 행함을 무시하는 것은 교회를 어렵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또 그속에 자기 생활을 걱정하는 의도까지 포함되어 있다면 그것은 분명 불신자입니다. 늑대가 양의 탈을 쓰고 양들을 유혹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시절에도 그러한 노골적인 불만을 터뜨리는 사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1절의 말을 하고 그에 대한 답으로서 2절부터의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6절에 보면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이 아주 어려운 말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쉽게 생각해 버립니다. 보통 이러한 구절을 대할 때 사람들이 이해하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우리의 죄를 지고 죽으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죄와 상관이 없는 자가 되었다'는 것으로 십자가에 대한 모든 이해를 결론 지으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 해서 죽으셨다는 것에 대해서 이해하고 감사하는 것이 십자가의 모든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십자가의 전부라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에 대해서 항상 긴장하고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현대 교인 치고 십자가가 우리 죄를 대신해서 예수님 죽으신 현장이라는 것을 모르는 자가 없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은 십자가에 대한 그러한 오류들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6절에서 '예수와 함께 못박힌 것은'이라고 말하고, 8절에서도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십자가라는 것은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은 고난의 현장으로 종료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죄인인 우리 자신들이 죽어야 할 현장으로 이어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나의 죽음이 없이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것으로서 십자가를 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현대 교인들이 크게 오해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을 믿는다고 하고 감사하기만 하면 죄에 대한 모든 부분들, 그리고 십자가에 대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이해가 현대 교인들로 하여금 입으로는 열심히 십자가를 말하지만 삶은 전혀 십자가와 상관이 없는 쪽으로 나아가도록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겨우 교회생활이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 믿음을 버티고 있는 수준으로 전락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은, 십자가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로 이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시기를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자기 십자가, 즉 우리가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할 십자가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한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굳이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습니까?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꼭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것입니까?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번거러운 일을 왜 하셨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죄인임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세상을 다닌다고 할 때 드러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죄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서 하신 모든 일은 하늘나라가 어떤 곳인가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예수님이 우리의 손을 붙들고 예수님이 하신 일을 하나하나 견학하게 하신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일을 통해서 도저히 하늘나라에 맞지 않은 악한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종착역은 죽음이라는 것을 십자가를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구원하면 됐지 무엇 때문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이 필요하느냐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은혜는 죽음의 현장에서 터져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안다고 해서 구원받은 자가 아닙니다. 은혜를 아는 자가 아니라 은혜 안에 거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은혜 안에 거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이 필요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는 것은 실제로 몸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된 나는 죽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마음 깊이 느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 받은 증거입니다.

10,11절에 보면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도 역시 몸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들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죽는다거나 산다는 말은 몸이 죽고 산다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언제나 몸에만 관심을 두고 사는 우리들이기 때문에 죄에 대해서 죽었다거나 하나님에 대해서 살았다는 말들에 대해서 실감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다시 살았다는 것도, 예수님은 하나님이니까 당연히 다시 살지 않겠느냐라고 생각해 버리면 부활이라는 것이 우리들에게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우리들에게 뭔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면 의미가 달라집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죄로 인한 죽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죄 때문에 죽어야 할 인생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때 예수님의 부활이 희망으로 다가올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 죽은 자가 우리들입니다. 이 말은 예수를 믿고 거듭나면 죄에 대해서 감각이 없어졌다거나 죄를 짓지 않는 자가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죄로 인해서 이미 죽은 자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를 죽은 자로 취급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바로 죄에 대해서 죽은 것이었습니다. 죽은 자이기 때문에 다시 산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윤리적인 행동을 밥먹듯이 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우리를 산 자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라고 말하면서 이와 같이 너희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 산 자로 여기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살으심은 예수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도 이어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살으심입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을 다시는 사망이 주장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산자로 여김 받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며 놀라운 상입니다. 이 상을 날마다 감사하고 마음속에서 체험하고 누리자고 십자가를 바라보자는 것입니다. 십자가에는 죄에 대해서 죽은 현장이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보며 나의 죽음을 인식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어떤 것인가를 알게 됩니다.

생명은 죽음을 통과한 자에게만 주어집니다. 따라서 날마다 세상을 살면서 짓고 있는 자기 죄에 대해서 외면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생명이란 하찮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날마다 삶속에서 터져나오는 자기 죄에 대해서 자신을 죽은 자로 여길 때 하나님이 은혜와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서 하나님에 대하여 산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