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6:12-14 의의 병기

처음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것은, 최초의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독자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서 하나님의 일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선한 존재로 살아갈 수 있었다면,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 인간은 자동적으로 악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만으로는 선이 나올 수가 없고 오직 악한 모습만 나올 뿐이라는 것입니다. 선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서 하나님의 선을 보여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에게서 하나님이 떠났습니다. 인간 자체가 이미 선하신 하나님이 함께 할 수 없는 더러운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지상에다가 하나님이 거할 실 장소를 마련하신 것이 구약에는 성전이고, 신약에는 그리스도로 나타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그리스도안에서만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리스도안으로 인도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지 우리들 스스로 그리스도에게 갈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러한 모든 것을 종합하면, 인간은 결코 스스로의 노력이나 자질로서 선을 행할 수 없고, 그 선을 발판 삼아서 하나님께 복을 요구할 수도 없으며 천국도 꿈꿀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떠나 버린 인간은 비록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해도 나아질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기독교를 자기를 위하여 이용할 뿐입니다. 성경을 읽어도 성경을 이용하려고 할 것이고, 기도를 해도 기도를 이용해서 득을 보려고 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떠난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서 보여지는 모습들입니다. 타락한 본성이 인간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오로지 자기 자신을 확고히 세우기 위해서 발버둥 칠 뿐이지 하나님을 생각한다거나 하나님을 위해서 하려고 하는 것은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타락한 본성으로도 얼마든지 예배하고 헌금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예배와 헌금이 누구를 향하는가를 추적하면 인간의 악함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말로는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헌금한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은근히 속마음으로는 자기가 한 행위가 하나님 마음에 들기를 원할 것입니다. 하나님 마음에 든다는 것은 곧 복으로 연결된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본성의 행위는 모두가 자기 자신을 향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모든 행동의 주체가 자신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죄가 우리 속에 있음을 경고하고 있고, 우리는 말씀을 경청함으로서 자신의 죄에 대한 발견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 13절에 보면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우리들의 몸이 무엇인가에 드려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불의의 병기로 죄에 드려지는 것이 아니면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 우리들의 몸입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것은 없습니다. 즉 아무에게도 드려지지 않는 몸이란 없다는 것입니다. 불의가 아니면 의의 병기로 쓰여지고 있고, 죄가 아니면 하나님에게 드려지고 있습니다. 지금 이순간도 역시 우리는 둘 중의 하나에 드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려진다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사람들은 이것을 쉽게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모든 것으로 간주하려고 합니다. 즉 인간이 생각하는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모든 것, 다시 말해서 전도하는 것이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몸이라고 생각하고, 봉사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고, 특히 신학교가서 목사 되면 완전히 의의 병기로서 하나님께 드려진 몸으로 여겨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언제 전도하는 몸을 받으시겠다고 하셨습니까? 봉사하는 우리 몸을 받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목사로 일하는 것을 받으시겠다고 하셨습니까? 그렇다면 옛날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하나님이 대환영을 하는 존재들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생각이지 하나님의 생각이 아닙니다.

일단 하나님께 드려진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떠난 자이기 때문에 여전히 악을 행하는 더러운 자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악한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다는 것입니까? 이런 말을 하면 반발을 하기를 지금은 우리가 예수를 믿기 때문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을 전혀 모르고 성경을 말하는 증거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내가 예수님을 믿어서 그 대가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내가 예수님 안에 거함으로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는 것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요14:2,3을 보면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합니다. 여기서 처소를 예비한다는 것은 실제로 우리가 거할 천국을 짓는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처소를 말합니다. 이것이 어떤 장소를 말하겠습니까? 지상에 하나님이 거할 수 있는 깨끗한 처소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거할 처소는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스스로 그리스도 안에 거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죽인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를 그리스에게로 인도하시고, 그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가 되게 하겠다는 뜻입니다.

요 17:21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라는 말씀대로 우리는 성령으로 인해서 그리스도 안에 아버지 안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가 덮임 받고 의인으로 여김 받으며 그 의로서 하나님께 바쳐지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의 역시 우리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는 따로 의를 행할 필요가 없습니다. 즉 따로 의를 행함으로서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야 할 필요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 가운데 있고 우리는 그 의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가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분명합니다. 인간의 의를 내세우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만 자랑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의 병기로 하나님에게 드려지고 있는 신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의의 병기라고 하니까 우리들이 의를 행해서 악을 물리쳐야 하는 것으로 오해하면 안됩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이 떠난 인간은 절대로 의를 행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함께 한 자만이 의를 행할 뿐인데, 하나님이 함께 한 분은 오직 그리스도 한분이지 우리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의를 찾아서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갈 수밖에 없고,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간 자는 자기에게는 의가 없고 오직 불의만 있음을 알고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살고자 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불의의 병기로 죄에 드려진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의로부터 독립해서 자기 스스로 의를 이루려고 하는 것입니다. 불의의 병기란 윤리 도덕적으로 나쁜 일을 지칭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궁극적으로 그것도 다 포함된 말이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스스로 의를 이루려는 인간의 패역함입니다. 그리스도의 의에 항복하려는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그리스도에 대해서 열정이 있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 시들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세대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식었다기 보다는 처음부터 신앙의 출발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처음부터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열성, 자기 노력, 자기 인격과 도덕성, 자기 만족을 찾는데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은 주님이 다 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인데, 오늘날 신앙인에게서 이것을 찾아보기 힘들어졌습니다. 은혜도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은혜가 되어지고, 기도를 해도 예수님이 하신 일을 생각하며 기도해야 하는데 오늘날 신자들은 자기 경험을 통해서 모든 것을 얻으려고 합니다. 은혜도 자기 경험을 통해서 받으려고 하고, 하나님이 함께 하심도 자기 경험을 통해서 느끼려고 합니다. 성령이 나를 변화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말씀을 적용하고 실천함으로서 변화되려고 합니다. 이것이 소위 QT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자기를 의지하고 스스로 믿음을 세워보려고 하는 것이 불의의 병기로 죄에 드려지고 있는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씀한다고 해서 '드려야'하는 것이 우리들의 일이고 책임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흔히 목사들이 우리가 구원받은 자로서 하나님께 해야 할 책임이 있는데 그것은 나 자신을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과연 인간에게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드릴 만한 자질이 있느냐를 물어야 합니다. 물론 거듭나고 구원받은 사람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성령으로 인해서 인간에게 선을 행할 수 있는 자질이 생겼다는 뜻이 되고 결국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해 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의 일은 우리에게 선을 행할 수 있는 자질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을 스스로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는 것이 성령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설령은 우리로 하여금 오직 그리스도만을 알아 가도록 할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서 벗어날 때 우리를 책망하시면서 다시금 그리스도를 향하게 하십니다.

신자는 이미 하나님께 드려진 자입니다. 즉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은 너는 이미 하나님께 드려진 자이니까 드려진 자답게 살아가라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드려진 자 답게 살아간다는 것은, 특별한 행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죽은 자였는데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서 다시 살아난 자가 되었다'는 것을 고백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살았으니까 그리스도만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런 신자는 자신의 행위를 자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우리를 구원했음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의는 우리 행위의 결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이고 약속일 뿐입니다. 때문에 우리의 행위에 의해서 흔들리는 의가 아닌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반석이신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14절에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는 말씀대로 신자는 죄의 주관을 받지 않습니다. 즉 사망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 아래 있는 자입니다.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를 살렸기 때문입니다. 의로 살림 받은 우리는 이제부터 주의 것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주를 위해서 살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려진 자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항상 자신을 살피면서 오직 그리스도의 의만 자랑하십시오. 그것이 의의 병기로 살아가는 주의 백성의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