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자입니다. 따라서 구원을 받기 위해서 뭘 해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신자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그리스도만 증거 해야 하는 자가 곧 신자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만 증거 해야 한다는 것은 교회도 증거해서는 안된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설령 내가 속한 교회가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고, 내가 속한 교단이 옛날에 어떤 신앙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줬다고 할지라도 교회란 자랑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또한 여러분이 수십년 신앙생활을 해오는 동안 그 어떤 체험과 경험을 했다고 하더라도 여러분의 체험과 경험을 자랑하거나 증거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곧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오랜 세월동안 한눈 팔지 않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 오셨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노력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은혜 없이 신앙생활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렇다면 증거할 것은 내 신앙생활이 아니라 그리스도여야 할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설령 누군가가 신앙 때문에 목숨까지 버렸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하신 분은 그리스도입니다. 즉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게 되었다'는 것이 성경이며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자가 진심으로 은혜 아래 있는 신자입니다.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은혜가 그를 주장하고, 은혜가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증거 되 어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인 것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위대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를 통해서 자기 개인의 신앙체험이나 경험이 증거 되고, 교회가 증거 되고, 교단이 증거 되어진다면 그는 은혜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법 아래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법은 곧 행위를 요구하고, 법 아래 있기 때문에 자기 행위를 증거 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14절에서 말하는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다'는 말씀을 오해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즉 구원을 얻은 신자는 이제 죄가 주관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죄를 짓지 않는 자가 되었고, 또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우리가 때로 실수를 하고 잘못된 행동을 해도 은혜가 우리를 붙들어서 구원시키고야 만다는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듣기에는 그럴듯한 말이고 뭔가 우리를 안심시키는 것 같은 말이지만, 사실 이것은 자기 구원에 관심을 두고 있는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즉 자기 사랑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사람들이 어떻게든 자기 구원을 확보할 수 있는 논리를 만들기 위해서 성경을 해석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는 우리의 어떤 죄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즉 우리의 모든 실수와 허물도 덮어버리는 것이 은혜입니다. 결국 우리들의 허물과 실수에 관계없이 은혜가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한다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문제는 그 은혜아래 있는 자의 태도입니다. 우리의 허물을 보지 않으신다는 은혜 아래 있다면 이 사람은 과연 무엇으로 즐거워해야 합니까? 자기 구원으로 즐거워해야 합니까 아니면 그리스도의 은혜로 즐거워해야 합니까? 분명 후자입니다.
5:11절을 보면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고 말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한다고 말합니다. 즉 신자의 즐거움에는 '나는 천국 간다'는 것이 우선되는 것이 아니라, 천국갈 수 없는 죄인이 천국가게 되어진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를 즐겁게 하는 것입니다.
만약 은혜로 즐거워하지 못하고 자기 구원으로 즐거워하게 될 때, 이 사람은 자기 구원의 확고함을 자기 행위에서 찾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법 아래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은혜 아래 있는 자는 은혜를 즐거워하고 그리스도의 은혜만을 증거 한다는 것을 잊어버릴 때, 은혜 아래 있음을 곧 구원에 대한 확고한 보장으로 여기게 되고 그럴 때 15절과 같은 의문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15절).
사실,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을 자기 구원에 대한 확고함으로 이해하게 되면, '그렇다면 마음대로 죄를 지어도 되는가?'라는 질문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6:1절에서도 그와 같은 질문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러나 이러한 질문을 하게 되는 이유는 곧 앞서 말한 대로 '자기 구원'에 빠져있기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은혜 아래 있는 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하지 못하고,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이 나에게 어떤 유익을 가져다주는가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15절에 대한 답이 16절부터 18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이 말씀이 은혜 아래 있다고 해서 마음대로 죄를 지어도 된다는 것이 아님을 답해 주고 있습니다.
성경이 참된 백성과 백성이 아닌 자를 구분할 때 참으로 오묘한 것을 기준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종교 행위를 통해서 또는 인품과 도덕을 통해서 누가 참된 백성인가를 구분하려고 하지만, 그 기준은 사람들에게 많은 혼란을 줄뿐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에게서도 훌륭한 인품을 찾아볼 수 있고, 또 인품이나 도덕, 그리고 종교 행위라는 것은 얼마든지 위장하고 꾸밀 수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속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백성과 백성 아닌 자를 구분할 때 그 기준은 '누가 과연 성경을 자기를 기준으로 해서 바라보지 않느냐?'는 것에 있습니다.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똑같은 성경구절을 해석한다고 해도 인간을 기준으로 해서 해석하는 것과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해서 해석하는 것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뭔가 하나라도 교차점이 없고 공통점이 없습니다. 철저하게 서로가 분리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도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해서 이해하려는 사람에게만 이해되어질 내용일 것입니다.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을 수가 없다'는 말은 신자는 이제부터는 죄를 짓지 아니하는 자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그것이 인간을 기준으로 해석하는 경우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이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하고 있을 때 어떻게 해석되어지는 것입니까?
16-18절에 보면 죄의 종, 순종의 종, 의의 종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것은 인간은 누구의 종이든지 관계없이 종으로 살아가는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즉 인간 스스로의 뜻과 의지대로 자기 마음과 자기 생각을 다스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죄의 종이든 의의 종이든, 종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애당초에는 죄의 종으로 살았습니다. 그런 인간이 죄에서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죄의 종은 무엇이고 의의 종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부터 설명을 하겠습니다.
죄의 종이든 의의 종이든 관계없이 종이란 자기 마음대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종에게는 자기 나름대로의 계획과 목적이 있을 수 없습니다. 종은 주인의 명령에 의해서 주인의 뜻을 따라 움직이고 주인의 뜻을 보여주는 역할을 할뿐입니다. 종은 주인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스스로 노력하고 애를 써도 주인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곧 종입니다.
그런데 17절에서는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라고 말합니다. 즉 우리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죄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죄의 종이라는 말을 죄를 많이 짓기 때문에 하는 말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그렇다면 죄를 덜 짓는 사람은 죄의 종이 덜 되어 있는 것입니까? 전에 죄를 많이 짓는다 짓는다는 차원으로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어떤 행동을 했느냐에 관계없이 인간의 죄인입니다. 즉 죄에 빠져 있는 죄의 종된 상태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깊이 깨닫고, 이사야처럼 하나님이 영광을 체험하고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사 6:5)라는 고백을 하고, 또 사도 바울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는 고백을 해본 사람만이 '의의 종'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죄의 종이나 의의 종이라는 말을 죄를 행하고 의를 행한다는 행위의 차원에서 이해하시면 안됩니다.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죄의 종된 상태이며, 의의 종이란 자기가 바로 죄의 종으로 살아가는 망해야 할 죄인임을 진심으로 깨달은 자가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음을 깨닫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그 의만을 증거하며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 곧 의의 종입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오로지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할 뿐입니다.
그런데 17절에서 말하기를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서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말도 역시 인간 편에서 보면 우리가 힘써 하나님이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의의 종이 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식의 해석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무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 스스로 순종해서 의의 종이 될 수 있다면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가 왜 필요합니까? 우리 힘으로 순종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모든 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았다라고 할 때,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여 의에 이르게 되었다면 그것도 역시 순종할 수 있는 마음을 우리에게 허락하셨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감사할 것 밖에 없습니다.
은혜 아래 있는 의의 종이란, 의를 행하는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증거 하는 자임을 잊지 마십시오. '내가 이렇게 의로운 일을 했다'는 내 의가 아니라 '주님께서 죄인된 자에게 이렇게 의로운 일을 하셨다'는 것을 증거할 때 그가 바로 의의 종입니다.
신자가 자기의 의를 보일 필요가 없다면, 낮아지는 자리인들 어떻고 무시 받는 자리인들 어떻습니까? 교회에서 노회에서 총회에서 꼭 힘있는 직책을 가져서 내가 무시 받지 않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까? 나는 얼마든지 무시 받고 조롱 받아도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 지신 그리스도의 의가 무시 받는 일에 참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의의 종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자신이 낮아짐으로서 그리스도의 의가 높아질 수 있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어떤 낮아지는 자리를 준비하셨다고 하더라도 순종해지는 자가 바로 의의 종으로 살아가는 신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