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6:19-20 연약함

오늘날 신자들은 하나님의 용서에 익숙해져 있다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죄를 지으면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라고 한마디만 하면 그리스도의 피로 용서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피의 용서에 익숙해지다 보니 점차적으로 죄에 대해서 둔해져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말씀을 들으면서 자신의 삶에 대해서 가책을 받기도 하고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것도 세월이 지나다 보면 하나님의 용서가 있다는 사실 때문에 둔해져가는 것입니다. 결국 신앙과 삶이 서로 독립하게 되고 신앙은 삶을 주관하지 못하고 삶은 신앙에 순종하지 못하는 이중적인 모습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믿는 것과 사는 것이 서로 별개의 것으로 존재하고 따로 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신자들의 현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자들이 설교를 들으면서 '아멘'을 외치지만 무슨 의도로 아멘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듣기 싫고 지루한 설교가 끝나서 기쁘다는 의도로 아멘 하는 것인지, 아니면 설교 끝나면 아멘 하는 것을 하나의 순서로 인식하고 아무 생각 없이 튀어나오는 아멘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멘이라는 말은 진실로 그러합니다라는 뜻입니다. 즉 그 말씀이 진실이며 그 말씀대로 되어집니다라는 뜻이 아멘입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설교의 내용은 전혀 생각지도 않고 단지 아멘이라는 말로서 설교하느라고 수고한 것에 대한 응답 정도로만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설교를 들으면서도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의도는 전혀 없이 설교를 듣는 것, 그러면서도 말씀을 통해서 찔림을 얻지 못하는 것, 당당하게 예배당에 들어왔다가 당당하게 나가는 이것이 오늘날 신자들의 현실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서도 무엇 때문에 예배당을 찾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예배당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헌금한다고 해서 복주시는 것이 아니라고 누누이 강조했으니까 복받기 위해서는 나오는 분은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또 예배당 나온다고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도 했으니까 천국 가려고 예배당 나오는 분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뭔가 얻을 것이 없는 은석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주일이면 꼬박꼬박 찾아 나오는 것을 보면 참으로 신기하기만 합니다.

신자가 예배당을 찾아 나오고 말씀을 듣는 것은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자기의 삶을 말씀을 통해서 점검해 보고, 내가 과연 누구의 편에 서서 살았던가를 확인하기 위해서 듣는 말씀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항상 말씀은 우리를 찌르는 것이고 우린 말씀 앞에서 가책과 부끄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 앞에서 떳떳할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만약 말씀에 대해서 떳떳하다면 말씀이 의도하는 근본을 피해버렸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말씀 앞에서 자기의 잘못을 알고 가책을 느낀다면 그것은 말씀이 의도하는 근본의 문제를 알고 있고 그것을 마음에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기도하라'고 설교했는데, 기도를 열심히 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가책을 느끼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린 가책이란 인간 본질적인 모습이 드러나는 것에 대한 가책이지, 본질은 감추고 행위의 부족만을 가지고 가책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인간의 본질을 발견하게 되면 본질을 발견하지 못한 채 스스로 뭔가 해 보겠다고 설쳐대었던 모든 행위에 대해서 부끄러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행위를 가지고 떳떳해 하고 자랑을 한다면 그것은 아직까지 인간을 모른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19절에 보면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고 말씀합니다. 육신이 연약하다는 것, 이것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연약하다는 것은 병들기 쉬운 나약한 몸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연약함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의에게 드릴 수 없는 것에 대한 연약함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스스로 구원을 향해갈 수 없고 구원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마 8:17절에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병을 고치심으로서 인간의 연약함을 친히 담당하시는 그리스도를 보여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 역시 우리의 질병 자체를 짊어져 주신다는 말씀으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오늘날 신자들에게 질병은 없어야 합니다. 질병이란 인간의 죄의 결과입니다. 이 죄에 대해서 싸우고 대항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결국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드러내는 것이 질병이고, 예수님을 이 질병을 고치심으로서 죽음에 대해서 대항하지 못하는 인간의 연약함을 짊어지실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의 본질이 연약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스스로 믿음이 있는 모습을 성취하려고 하는 것이나 자신이 의로워 지고 자신의 힘으로 설려고 하는 것 자체가 죄며 부끄러움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인간은 약하다'는 말조차도 자기를 위해서 이용하고자 합니다. 즉 말씀이 요구하는 모습과 거리가 멀어 있을 때, 자신의 부족을 드러내며 그리스도를 바라보려고 하기보다는 '인간은 약하니까 할 수 없지'라고 하면서 자신의 죄에 대해서 정당성을 부여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끝까지 죄를 피해보려고 하는 의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신이 연약할 때의 인간의 실체는 의를 행할 능력이 없이 오직 자기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리기에 힘쓴 삶을 살았을 뿐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애초부터 죄속에 갇혀 있는 연약한 존재임을 모를 때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어도 되느냐'는 물음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연약한 인간은 의와 죄를 구별하여 스스로 죄를 택하고 의를 택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런데 은혜 아래 있으면 죄를 지어도 되느냐는 것은 내 스스로 죄를 선택해서 지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 인간의 연약함이라는 본질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 본질을 모르기 때문에 무엇을 해도 그것은 불법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연약함을 담당하신 그리스도를 모른다는 것 자체가 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연약한 인간을 하나님은 어떻게 바라보시느냐는 것입니다. 연약한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연약한 인간이 강해지기를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연약함을 아는 가운데서 죄를 고백하기를 원하십니다. 죄짓지 않은 인간이 아니라 죄가 무엇인가를 아는 인간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죄를 안다는 것은 인간의 본질을 알았다는 것이고, 인간의 본질을 알았다는 것은 겉이 아닌 속을 볼 줄 아는 눈이 뜨여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시는 것은, 단지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죄를 죄로 느끼는 마음, 죄를 죄로 아는 그 마음의 진실을 용서하시고 이러한 인간 됨을 의롭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의란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으로 되고 화해되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는 말씀은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 즉 하나님은 창조주며 우리는 피조물이라는 관계 속에서 살아갈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는 말씀을 우리 스스로 자기 자신을 의에게 종으로 드려서 거룩함에 이를 것을 명령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인간은 연약해서 스스로 의를 행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항상 자신을 불법에 드리기에만 소질이 있는 인간이 스스로 불법에서 떠나서 의로 향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을 말해주는 것이 20절입니다.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우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해서 자유 하였다고 합니다. 의에 대해서 자유 하였다는 것은 의에 대한 의식이 전혀 없이 살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의 종이기 때문에 의를 생각하거나 자신을 의에게 종으로 드려야 한다는 생각은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종으로 살던 우리들의 실체인데, 그런 우리에게 의에게 종으로 드려라고 말씀하는 것은, 결국 죄의 종에서 벗어나게 해서 의의 종으로 살게 하시겠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14절에서 말한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는 말씀의 뜻입니다.

5:20절에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고 말씀하는데, 이 말씀도 인간의 연약함을 깨닫고 죄의 종으로서 자신을 불법에 드리는 삶에 열심이었던 인간의 실체를 발견한 그곳에 우리의 연약을 짊어지시고 우리를 의의 종되게 하신 은혜가 더욱 넘친다는 뜻입니다.

인간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죄에 대해서는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더군다나 믿음의 근본이 사랑이고 그 사랑의 본질은 자기 부정과 희생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믿음 좋다고 큰소리치고 그리스도를 안다고 까불었던 자신에 대해서 한없이 부끄러울 것입니다. 사랑한다고 해봐야 고작 내 마음에 들고 뜻이 맞는 인간을 사랑했을 뿐이지 자기를 부정하고 희생한 그리스도의 사랑에는 발끝도 못미치는 자신에 대해서 발견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믿음도 이만하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알고 나니 이만하면 되었다는 것이 있을 수 없음을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깨달음이 있을 때 자기 사랑이나 자기 의나 자기 믿음을 포기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에만 매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는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