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생이 교회에 있어서, 그리고 신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실 오늘날 현대 교회는 영생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이 교회에서 보여진 것은 사람들이 도대체 무엇이 의미가 있는 것인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세상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의미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자꾸 의미 없는 것에 의미를 두게 되고 소중하지 않은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가령 예를 들어서, 아담과 하와가 가인을 낳고 나서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창 4:1)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아담과 하와는 가인이라는 자식을 낳은 것에 의미를 두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만물들이 종족을 유지하기 위한 번식을 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자식을 낳았다는 것이 별 의미 없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아담과 하와는 자식을 낳았다는 것에 의미를 부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들은 나중에 동생을 죽이는 자식으로 등장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의미를 부여했던 아들 낳음이 결국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었음이 드러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기가 낳은 자식이 하나님의 약속이 되는 것처럼 여겼습니다. 그러나 자식을 낳았다는 것이 하나님 앞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낳은 자식을 어떻게 기르고 어떻게 양육하고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몫이 아니라 하나님의 몫입니다.
성경을 보면 아벨은 하나님 앞에서 의미 있는 자로 등장합니다. 그러나 아벨 자체가 의미 있는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아벨이 의미 있는 자로 등장을 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가인을 버리시고 아벨을 선택하신 때부터입니다. 하나님이 아벨을 선택하셨다는 것은, 이제부터 아벨이 어떻게 사용될 것인가라는 것은 하나님의 몫이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벨을 선택하셨고, 선택하셨기 때문에 아벨이 어떻게 사용되어지느냐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있고, 그때부터 아벨은 의미가 있는 자로 존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개입한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사용되어지는 인생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벨 자체가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벨을 도구로 해서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일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가인에 의해서 희생된 아벨 자체를 훌륭한 위인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항상 우리에게 개입하셔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아벨을 아벨 되게 하시고, 아브라함을 아브라함 되게 하시고, 이삭을 이삭 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지 결코 아벨의 자질도 아니고 아브라함의 자질도 아니라는 것을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와가 아벨을 낳은 것에 의미를 두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은 것에 의미를 두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낳은 마리아에게도 의미를 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아벨을 사용하시고 이삭을 사용하시고 마리아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몫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내세우는 의미 없는 의미에 파묻혀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인간의 실수입니다.
이스라엘을 보면, 이스라엘 자체가 자기들에게 의미가 있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왜 이스라엘을 있게 하는지 하나님의 일은 생각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스라엘이란 나라를 의미 있는 것으로 생각했고 결국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이다' '우리는 선택된 민족이다'라고 하면서 큰소리쳤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교회에 의미를 두고 있지만 교회는 전혀 의미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교회에 개입하셔서 사용하실 때 비로소 의미 있는 모습으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의미 있는 것인가를 제대로 아는 자라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교회다운 모습을 보일 것인가?'를 생각하기보다는 '우린 지금 하나님이 사용하실 수 있도록 하나님의 몫을 남겨 놓고 있는가?'를 생각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무엇이 의미 있는 삶입니까? 이렇게 물으면 많은 사람들은 세상에 영향력을 줄 수 있고, 많은 사람들에게 칭송을 들을 수 있는 특별한 행위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사람들은 의미 있는 삶을 세상에 이름을 남기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좋은 일을 하려고 애쓰는 이유도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의미 있는 일을 해야 하겠다'는 이 생각이 하나님의 몫을 침범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생각에서 그냥 평범하게 교회 다니고 신앙생활 하는 것보다는 좋은 일도 하고 열심히 전도도 하면서 살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일이 의미 있는 일로 세상에 남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의미 있는 일로서 남게 된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부름 받았다면 그것은 내가 의미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의 일을 세상에 보이고자 도구로서 선택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자기 자신이 뭔가를 세상에 보이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앞서 말한 대로 스스로 의미를 창출하려는 것이 되고 그것은 곧 하나님의 몫을 침범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언제나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하나님이 일하시고 계신다는 의식에서 떠나서는 안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열매라는 말을 하는데, 이 말도 역시 같은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항상 열매 자체에 의미를 둡니다. 그래서 스스로 열매를 맺으려고 애를 씁니다. 세상에 열매를 남기려고, '나도 의미 있는 일을 했다'는 흔적을 남기고 싶어서 애를 씁니다.
그런 인간은 날 때부터 죄의 종입니다. 그리고 의에 대해서는 자유한 존재입니다. 의에 대해서 자유했다는 것은 인간에게서는 의가 나올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의가 나올 수 없고 의를 행할 수 없는 인간이 무슨 의미 있는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신다는 말씀에 대해서 전혀 고마운 줄을 모릅니다. 이 말씀이 얼마나 우리에게 복된 말씀인가를 전혀 모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지 않아도 내 스스로 얼마든지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고 신자로서의 신앙을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영생이 얼마나 큰 축복이며 귀한 선물인가를 모르는 것입니다.
열매는 맺어지는 것이지 맺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좋은 열매를 맺자'라고 말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말도 없습니다. 인간의 본질을 전혀 모르는 말입니다. 죄의 종으로 태어난 인간이 어떻게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까?
요 15장에 보면 포도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은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기 때문이지 가지 스스로 열매를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합니다. 이것이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인간의 연약함입니다. 열매는 우리가 수고해서 맺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몸이 예수 안에 있음으로서 해서 저절로 맺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 열매가 무엇입니까? 영생에 대한 감사와 찬송, 영생으로 인한 죽음이 두렵지 않은 삶, 이런 것들이 열매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열매가 있는 신자는 이미 세상에서 더 할 수 없는 의미 있는 것을 발견하고 마음에 품고 살아가기 때문에 영생 외에 다른 것에는 의미를 두지 않게 됩니다. 내가 뭔가 한다는 것에도 의미를 두지 않고 했다는 것에도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이미 자신은 죄로 인해서 사망에 처해지는 것이 마땅한데 하나님이 자비와 사랑에 의해서 영생을 선물로 받게 되었다는 것을 안 이상, 자신에게 의미 있는 것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의미 있다면 오직 영생이며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21절에 보면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죄의 종으로 사는 자는 항상 맺어지는 열매가 부끄러운 것이고 사망으로 맺어지는 일입니다. 그러나 인생이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22절에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는 말씀대로 영생으로 끝나는 인생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생으로 뒤바뀌게 된 것이 우리의 수고가 아니라 한 사람의 수고와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인정하신다면 과연 여러분의 인생에 무엇이 가장 소중하며 의미 있는 것이겠습니까?
신자에게 의미 있고 소중한 것은 우리의 행동이 아니라 예수님의 행동입니다. 예수님 한 분의 행동이 우리를 영생으로 이르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한분 예수님의 행동으로 영생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사람들이 반감을 가집니다. 그것은 한 분의 행동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되면 내 행동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되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행동에 의미 두기를 포기하지 못한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의를 행해야 한다고 하면서 스스로 의의 열매를 맺으려고 애를 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두려고 하기보다는 자신이 생각하는 의미 있는 것으로 대체하려고 합니다. 즉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행동하고 만들어 냄으로서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종으로 태어나는 인간에게서는 의미 있는 행동이 전혀 나올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이 하시는 일만이 의미 있는 것으로 우리에게 존재하고 있을 뿐이라는 현실에 대해서 무지한 결과입니다.
23절에 보면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것이 우리들의 본질입니다. 이러한 우리들에게 영생이 은사로서 주어집니다. 은사란 선물을 말합니다. 그리고 신자는 그 선물에 감사하고 살면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여러분의 머리 속에서 자신의 행동에 의미를 두는 것은 지워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은혜만 남아서 여러분이 있는 자리에서는 오직 은혜만 드러나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신자에게는 행동에 대한 부족함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기도가 부족하다느니 성경을 보는 것이 부족하다느니라는 것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기도에 성경을 읽는 것에 부족함이 있다면 과연 완전은 무엇입니까? 얼마나 기도해야 완전한 것이고 어느 정도 성경을 읽어야 완전한 것입니까? 신자는 모든 일을 이루신 그리스도 안에서 삽니다. 그리스도의 행동 덕분에 영생을 얻은 자로 살아가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이미 완전한 자로 살아갑니다. 내가 완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행위가 완전하고 그 완전으로 인해서 우리가 의로 여김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생인데, 이 영생을 안다면 과연 자기 자신에게 의미를 두겠느냐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부족함이 있다면 살면서 그리스도만 바라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만 드러내는 일에 부지런하지 못하고 자꾸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 우리의 부족함입니다. 죄의 종으로 태어난 인간의 본질을 깨닫고, 이 죄에서 해방되어서 의의 종으로 살게 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뻐할 수 있고 은사로 주어진 영생만 마음껏 자랑하고 드러내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