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지난 주일에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바다 출판사 김경일 지음)라는 제목의 책을 읽었습니다. 일단 제목부터 호기심을 끌었기 때문에 쉽게 그 책을 손에 집어 들 수가 있었는데 그 내용은 한마디로 말해서 아직도 유교 문화의 영향권에 있는 우리 나라에 대해서는 충격을 줄 수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 나라는 공자라는 인물에 대해서 무한한 존경심을 내보였습니다. 비록 공자라는 인물을 신봉하지는 않는다고 할지라도 '공자'라는 인간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각으로 볼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겠습니까? 그런데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를 쓴 저자인 김경일 씨는 공자를 거짓말쟁이로 말하고 있고, 유교의 도덕 문화에 젖어 사는 현실을 '공자 바이러스'에 걸려 있는 것으로 빗대어서 말하고 있습니다.
김경일 씨는 머리말에서 공자의 도덕을 사람을 위한 도덕이 아니라 정치를 위한 도덕이고, 남성을 위한 도덕이고, 어른을 위한 도덕이고, 기득권자를 위한 도덕이고, 주검을 위한 도덕으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공자의 도덕을 기반으로 일어선 유교 문화는 정치적 기만과 위선, 남성적 우월, 젊음과 창의성 말살, 주검 숭배가 낳은 우울함으로 가득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이방인의 문화가 조선 왕실의 통치 이데올로기가 되어서 우리의 삶속에 들어 왔다는 것입니다.
그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는 문제점은, 신분사회, 가부장 의식, 위선을 부추기는 군자의 도리, 끼리끼리의 협잡을 부르는 혈연적 폐쇄성, 남성 우월 의식, 스승 권위 강조로 인한 창의성 교육 말살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책을 보면서 도덕을 제일의 덕목으로 알고 살아온 우리 나라에 대해서는 가히 충격적인 글이 아닐 수 없음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김경일 씨는 도덕 자체를 없애자는 것이 아니라 공자의 도덕을 버리자는 말을 합니다. 한 예로써 '효도가 사람을 죽인다'는 말을 하면서, 공자의 효는 자식들이 부모를 위해서 일방적으로 희생하는 것이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효는 노인과 자녀들 모두의 사랑이 상처 입지 않을 균형 있는 제도라고 말합니다.
물론 저는 지금 김경일 씨가 말한 모든 것이 옳기 때문에 그 책에 대해서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김경일 씨는 인간적인 입장에서 하고 있는 말이지 하나님 편에 서서 하는 말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김경일 씨가 비록 공자의 도덕에 대해서 비판을 했지만, 그것은 결국 공자의 도덕을 무너뜨리고 좀 더 인간을 위한 개선된 도덕을 추구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제가 박수를 치고 싶은 것은 현대 사회에 뿌리 깊이 박혀 있는 도덕에 대해서 칼을 댔다는 것입니다.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도덕론에 대해서 '공자 바이러스'라는 용어를 쓰면서 현 사회가 무엇에 매여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해 말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환영을 하고 싶습니다. 감염되어 있으면서 자신이 감염이 되어 있다는 것을 모른 채 살아가고 있고, 이상 징후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그 사실에 대해서 눈치를 못 채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 비판을 한 것은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그 책을 보면서 현 사회 속에서 '공자 바이러스'에 함께 감염되어 있는 교회의 모습을 생각했습니다. 공자의 도덕이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정치, 남성, 어른, 기득권자, 주검을 위한 도덕이었다면, 현 교회가 말하고 있는 법 역시 사람을 위한 법이 아니라 교회 정치와 목사라고 하는 기득권자와 교회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한 법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고 하신 말씀처럼, 사람이 율법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현 교회는 율법을 위해서 존재하는 듯한 모습을 많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율법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말을 하고 있는 것은 결국 현 사회가 도덕이라 이름하는 위선에 감염되어 있는 것처럼, 교회 역시 율법이라 이름하는 위선에 감염되어 있는 결과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율법은 인간으로 하여금 위선을 자아낼 뿐인데도 불구하고 율법을 강조하고 주장하는 것은 율법에 매어서 율법의 종으로 살아가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떤 분은 저의 이런 주장에 대해서 '율법 폐기론자'라는 말까지 했지만, 저는 율법을 폐하자는 것이 아니라 율법에 매이지 말고 그리스에게 매인 자로 살자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이미 우리를 율법으로부터 해방시켰습니다. 즉 율법의 종의 신분에서 자유함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유함은 나 홀로 살아가는 자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율법에서 놓여난 자유입니다.
율법에서 놓여난 신자는 새로운 분에게 매인 자로 살아갑니다.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본문이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1절을 보면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율법이 그를 주장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의 다스림을 받고 산다면 그는 '산 자'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산 자라는 것은 생명을 얻었다는 의미로서 산자가 아닙니다. 죽음이라는 경험이 없는 자로서의 산 자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죽음을 경험한 자에게 주어진 은총입니다. 그런데 죽음의 경험이 없다면 그는 결코 십자가를 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의 경험이 없는 증거는 율법에 매인 자로 살아가느냐 자유한 자로 살아가느냐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율법은 우리를 죽음으로 몰고 갑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고 율법은 우리의 죄를 드러내기 때문에 율법 아래서 인간은 죽어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래서신자는 율법 앞에서 우리가 죽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죽어야 할 자리에 대신 죽으신 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본질을 아는 신자는 대신 죽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로 인해서 나는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의 영향력 아래 있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신 그리스도 아래 있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죽기 전에는 법의 영향력 아래서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인생을 살아가지만, 그리스도를 알고 주와 함께 죽는 자로 살아갈 때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죽음과는 상관없이 이제는 그리스도안에서 주와 함께 생명 안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은혜 아래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예로 들어서 설명합니다. 2-3절을 보면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고 말합니다.
아내는 남편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남편에게 매인 자로 살아갑니다. 남편이 살아있을 때 다른 남자에게 가면 그것은 간통이 됩니다. 그러나 남편이 죽은 뒤에는 자유롭게 다른 남자에게 갈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과 율법의 관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옛남편인 율법이 죽고 사라졌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을 4절에서는 '율법에 대하여 죽고'라는 말로 설명합니다. 즉 남편이 죽으면 남편에게서 해방된 것처럼,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면 그는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란 율법에 대하여 죽은 자라는 뜻입니다.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율법에 의해서 죽은 자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이 옴으로 해서 드러나지 않았던 인간의 죄가 확실하게 드러나고 그 죄의 값이 사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인간은 율법에 의해서 내가 죽어야 할 죄인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살 가치도 없는 인간이고 천국 갈 자격도 없는 인간이며 선을 행할 자질도 없는 무능한 자임을 자각하는 것, 이것이 바로 죽은 자의 상태입니다. 죽은 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외부에서 기적이 임해서 살려주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것이 죽음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생명은 죽음의 경험이 없는 자는 알 수 없는 것이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4절에 보면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합니다.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했다고 하지만 사실 우리는 죽임을 당한 경험이 없습니다.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한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신자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할 때 그리스도안에서 주와 더불어 죽고 주와 더불어 산자가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그리스도 앞에서 내가 죽어야 죄인임을 필히 자각할 수밖에 없고 자신의 무능을 고백하면서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하게 됩니다. 이것이 주안에서 주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새로운 남편, 즉 그리스도에게 매인바 되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우리 앞에 왜 있습니까? 우리가 죽은 자임을 끊임없이 고발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큼만 나면 그리스도에게서 벗어나서 스스로의 의로 독립하려고 합니다. 나도 할 수 있다는 본성 때문에 그리스도의 의보다는 내 의를 더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에게 율법은 인간은 역시 죄인임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한 체험이 없는 자이고 그리스도를 새남편으로 모시지 않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신자에게는 그리스도가 남편입니다. 그리스도가 법이지 율법이 법으로 지배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법은 사랑이지 예배가 아니며 주일이 아니며 십일조가 아니고 전도가 아닙니다. 따라서 신자로 하여금 주일이나 십일조나 전도 봉사 등 법에 매이도록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외면하고 살아라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를 죽음에서 다시 살리셨고 율법에서 해방시키셨는데 아직도 법에 매어서 법의 눈치를 보고 산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섭섭하게 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남편으로 모시고 사는 신자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사랑만 노래할 뿐입니다. 사랑만 자랑하고 사랑만 높이면서 그리스도로 인해서 얻은 새생명만 마음껏 기뻐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사랑에 매어서 살아가기 때문에 사랑으로 율법의 모습을 충족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에 사랑에 매어 사는 자에게서는 완성된 율법의 흔적이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스스로 한 것이 없습니다. 있다면 다만 날 대신해 죽은 그리스도의 피에 감사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할 뿐입니다. 그 감사함까지 내 믿음이 아니라 주님의 은총이라는 것을 고백하면서 주만 드러내고 자랑하기에 힘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다 되었다고 당당하게 말을 하지 못하고 은혜에다가 율법을 덧붙이면서 율법에 매인 자로 만들려는 현실 속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산 여러분들만큼은 마음껏 새남편이신 그리스도의 은혜만 자랑하며 살아가는 자유자이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