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7:5-8 새로운 것

사람들은 인간이 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에 대해서 대단한 불만을 내뱉습니다. 불만 정도가 아니라 얼굴에 쌍심지를 돋구고 달려듭니다. 하긴 인간이 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면 인간이 하고 있는 일을 예수님이 대신 다 해줘야 되는데 그렇지도 않다 보니까 반발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말에 대해서 반발을 하는 사람들은 '그러면 내가 날마다 놀고 있어도 하나님이 하늘에서 돈을 두고 밥먹여 주는가?'라는 말을 합니다. 사람들이 도덕과 양심적으로 살려고 힘을 쓰지 않아도 세상이 살기 좋은 땅이 되는가? 라는 말을 함으로서 인간이 노력을 해서 세상을 아름답게 유지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양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힘을 빌어서 세상을 아름답게 유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는 세상을 아름답고 살기 좋은 땅으로 유지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있다면 마지막 때 악한 세상을 흔적도 없이 없애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마음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인간들이 자기들 멋대로 하나님의 뜻을 조작해 버린 것입니다.

'인간이 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은 일 안하고 가만히 있어도 돈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내가 살고 내가 영원한 생명에 참여되는데 있어서 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일해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양식을 사서 먹기 때문에 생명이 유지되는 줄로 알지만 그것은 착각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이 손에 있는 것이지 내가 내 생명을 책임진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왜 우리에게 일을 하게 하시고 돈을 벌게 하십니까? 그것은 내가 일하고 돈을 벌어서 그 돈으로 먹고 살아간다고 해도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이지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는 것을 증거 하라고 일하게도 하시고 돈을 벌게도 하시는 것이지 단지 내 한 몸 살게 하시려고 돈을 벌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위해서 신자가 할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어보면 많은 사람들이 봉사를 해야한다느니, 기도를 해야 한다느니, 헌금을 해야 한다느니, 여러 가지의 답을 내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답에는 결국 교회는 우리의 힘과 수고로 유지된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안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시 교회를 위해서 신자가 해야 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기도도 하지 말고 봉사도 하지 말라는 것인가? 할게 아무 것도 없다면 새벽기도는 왜 하고, 성경은 왜 보고, 예배는 왜 드리고, 설교는 왜 하는가?' 여러분도 이러한 반문을 하고 싶습니까?

앞서 말한 대로 신자가 뭔가 하고 있다면, 그것은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이지 이루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즉 기도한다면 기도를 통해서 뭔가 이루려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즉 기도함으로서 모든 일을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우리가 기도한다고 해서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주님이 다 알아서 하신다는 그 믿음이 기도를 통해서 보여지는 것입니다.

설교를 왜 합니까? 설교를 통해서 많은 사람을 감동시켜서 목사 스스로 보람을 찾고 또 교회를 부흥시키기 위해서 하는 설교라면 그것은 설교가 아닙니다. 이렇게 말하면 '아니다 나는 교회 부흥 같은 것은 신경 안쓰고 단지 내게 보내신 양떼들을 잘 가르치고 양육해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 되게 하기 위해서다'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어찌 들으면 거룩한 목적이라고 생각 할 수 있겠지만, 이것도 역시 자기가 뭔가 해보려는 의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즉 내가 설교해서 사람들을 변화시켜 보겠다는 좋지 못한 의도인 것입니다. 설교는 인간은 아무리 해도 안된다는 것을 증거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것을 합시다'가 아니라 '해도 안된다는 것을 알고 주님만 바라봅시다'라는 말을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의 백성은 그 말씀을 통해서 주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설교자가 말을 잘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만 주님께서 설교를 이용해서 주님의 말씀만 전하게 했기 때문에 목자의 음성을 아는 양들이 목자를 찾게 된 것입니다. 결국 목회도 주님이 하시고 양떼를 찾는 것도 주님이 하십니다. 설교자는 다만 그 일에 선택돼서 쓰여지고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모든 일을 주님이 하고 계시기 때문에 '인간이 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말씀을 과감히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 말한 대로 자기 육체를 신뢰하는 자들에게는 이 말이 터무니없는 말로 들려질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인간에게 일을 맡겼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목사 일을 맡겼고, 장로 일을 맡겼고, 권사 집사를 맡겼으니까 그 일에 충성하는 것이 큰상을 받는 자라고 가르치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에게 맡긴 적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를 그릇으로 사용할 뿐입니다.

육체를 신뢰하는 자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이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도 분명히 말하기를 구원은 전적으로 은혜라고 합니다. 여기서 모순이 발생합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은혜인데 뭔가 해야 한다는 말을 하기가 그들의 입장에서도 난처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이미와 아직'이라는 것입니다. 구원은 이미 이루어졌지만 아직은 아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도 안되는 말로서 자신들의 난처함을 감추어 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피로 인해서 이미 구원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믿지만 그러나 구원받은 그리스도의 세계 안에서 우리들이 새롭게 시작하고 이루어야 할 일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말하는 그 '아직'이라는 한마디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마지막으로 말씀하신 '다이루었다'는 말씀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도전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이 육체를 신뢰하는 것은 인간의 육체에 아직 가능성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생각이 세상에서 활개치는 인간으로 살게 해버리는 것입니다. 인간의 가치를 포기하지 못하고 자꾸 가치 있는 자로 존재하려는 욕구가 바로 죄의 정욕이 역사 하는 열매인 것입니다.

5절에 보면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 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라고 말씀합니다. 지난주에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통해서 신자는 남편이 죽어서 자유를 얻은 여자와 같이 율법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에 율법으로부터 자유하고 대신 새로운 남편, 즉 그리스도의 신부된 자로서 산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4절에 보면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신 대로, 그리스도 덕분에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한 신자들은 율법에 대하여 자유하고 제 멋대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율법 대신 이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이에게로 가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한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함이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율법으로부터 자유 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말해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유케 하신 것은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을 위한 열매를 맺게 하시기 위함이다는 것입니다. 그 열매가 곧 '하나님이 다 하셨습니다'라는 것 아닙니까? 즉 예수님이 하신 일을 증거 하는 것이 열매인 것입니다.

우리가 전에는 육체를 신뢰하고 율법에 매어 살았기 때문에 보여지는 열매는 죄의 정욕의 열매였습니다. 탐욕에서 맺히는 열매, 즉 예수님이 하신 일을 증거하기 보다는 내가 한 일을 증거 함으로서 세상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높이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나 그리스도의 구원도 모두가 자신의 존재 가치를 높이는데 도구로 사용해 버리는 것이 바로 사망을 위한 열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40일 금식기도를 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부자 되게 하셨다'는 식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자비하심을 몽땅 자신의 존재 가치를 향상시키는데 동원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육체를 신뢰하는 자에게서 맺어지는 사망을 위한 열매인 것입니다.

결국 '이미와 아직'이라는 논리에서의 율법은 그리스도의 세계 안에서 아직까지 인간의 입장에서 이루어야 하고 완성해야 할 것을 제공해 주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을 얻었지만 율법에 순종해야 한다는 모순과 허구성을 내뱉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구원을 얻은 자라면 그리스도가 못박힌 십자가가 내 속에서 인식되어질 때마다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 부정해 나가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즉 율법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 의로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붙들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완전성을 부정하는 허구임을 깨닫고 자신의 의를 몽땅 부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의인줄 알았던 것이 몽땅 죄였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 진심으로 십자가를 인식하는 신자에게서 맺어지는 생활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삶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구원을 이루어 가는 것으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즉 아직까지 구원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 일이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정하는 삶은 구원이 완성되었음을 알기 때문에 보여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은 완성되었는데 인간의 육신은 자꾸 완성된 구원을 가리는 쪽으로만 나아갑니다. 그것을 공격하는 것이 곧 자기 부정인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부정은 그리스도의 피로 인한 구원의 완성을 알고 율법에서 해방되고 그리스도의 신부로 살아가는 신자들에게서 보여지는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6절에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 되어야 합니다. 신자는 우리를 얽매고 있던 율법에 대해서 죽은 자입니다. 그리고 율법에서 벗어난 자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신부로 살아가는 자입니다. 이것을 6절에서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긴다'는 말로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의문의 묵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의문은 문서라는 뜻입니다. 즉 오래된 문서, 다른 말로 옛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옛 것이라고 말씀함으로서 버려져야 하고 교체되어져야 할 것으로 말씀합니다. 옛 것을 말씀하는 것은 새 것이 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새 것이 바로 영의 새로운 것입니다.

히 10:9-10절에 보면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고 말씀합니다. 또 히 10:7절을 보면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들을 종합해 보면 성경의 모든 말씀들은 예수님이 온전하신 대제사장되신 분임을 증거하기 위해서 기록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에 율법이 제외될 수 없습니다. 율법까지도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분명히 예수님이 오신 것이 첫 것을 폐하고 둘째 것을 세우기 위함이라면, 반드시 첫 것이 폐지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둘째 것이 세워져야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첫 것을 고집한다면 그것은 신앙도 아니고 거짓된 것이며 그리스도와 전혀 상관이 없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버리신 것을 인간이 다시금 주워 가지고 보관하고 아까워하고 소중히 간직하려는 심보가 무엇입니까? 결국 둘째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기뻐하지 못하고 믿지 못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아직까지 율법에 복의 의미를 두는 것은 '옛 것'에 매인 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영의 새로운 것이 우리에게 주어졌음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정죄하고 있습니다. '옛 것'에 매이지 말고 영의 새로운 것, 즉 예수님이 하신 일만 근거로 해서 살아가는 거룩한 주의 백성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음을 잊지 마십시오. 영의 새로운 것을 섬기는 백성은 자기의 행동에 의해서 복과 저주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행동이 이미 우리를 복으로 옮겨 놓았음을 믿고 의지하고 신뢰하며 사는 자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인간이 육체를 신뢰하는 것 자체를 악으로 보게 됩니다. 스스로 의를 이루겠다는 발상 자체를 은혜를 부정하는 것으로 판단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숨어 있는 그러한 악의 모습이 발견되어질 때마다 회개하게 됩니다. 이것이 영의 새로운 것을 섬기는 신자에게서 나타나는 모습임을 다시 말씀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