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7:7 율법의 역할

하나님이 인간에게 성경을 주신 것은, 인간의 죄에 대해서 말씀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란 존재는 언제나 하나님을 위해서 살려고 하지 않고 자기에게 영광이 되는 일을 골라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발견하라고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말씀은 목사가 자기 편리한 대로 자기의 욕심을 위해서 사용하라고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은 목사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목사만이 말씀을 제대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 받은 자는 누구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바르게 이해했을 때 나타나는 결과는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는 자기 이해입니다. 이것이 말씀의 역할입니다.

목사라고 해서 말씀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라고 해서 말씀을 손에 쥐고 그것을 무기 삼아서 신자들을 휘두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말씀을 그렇게 이용한다면 그는 틀림없이 거짓 목자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누구라 할지라도, 그가 비록 당회장이고 총회장이라고 할지라도 말씀을 자기 영광을 위해서 멋대로 해석하고 자기 탐욕의 도구로 사용한다면 '당신은 거짓 목사다'는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심으로 말씀만 사랑하는 신자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말씀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말씀을 이용해서 교회나 자기 자신의 영광을 구하려는 속셈이 있다면 그것은 말씀을 주신 의도에서 벗어난 것이 됩니다. 즉 말씀을 교회를 유지하고 발전에 도움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어떤 법칙으로 이용한다면 말씀을 주신 의도에서 벗어난 것이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말씀을 교회를 위한 법칙으로 이용합니다. 교인들로 하여금 말씀을 지켜야 할 법칙이라고 가르치고, 말씀을 지키는 가운데 얻어지는 부수적인 효과를 기대하게 됩니다. 즉 안식일을 지켜라 십일조를 해라는 법칙을 정해서, 주일이면 빠지지 않도록 하고 헌금을 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하는 모든 일은 그리스도와 연관이 있으니까 빠지지 않도록 합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의 의도를 생각하지 않은 채 말씀을 이용할 궁리만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말씀은 우리에게 어떤 규칙이나 법칙으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말씀은 우리의 죄를 알게 하시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7절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이 말씀만으로도 말씀의 역할이 무엇인가는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직 죄를 드러내고자 존재하는 말씀의 의도에 인간의 의도를 개입시키면 안됩니다. 목사가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것은, 말씀의 의도에 충실하게 인간은 죄인이다는 것을 확인하는 작업일 뿐이지 말씀을 통해서 인간을 어떻게 변화시켜 보겠다는 것이 결국 목사의 탐욕일 뿐입니다.

요 4:37-38절에 보면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추수하는 자는 자기가 심고 노력한 것을 거두는 것이 아닙니다. 심고 기르신 분은 따로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나 사도들이 수고한 것은 주님께서 노력하신 것에 참여한 것이지 자기들 스스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수고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도들에게는 사람들을 천국으로 보내라는 사명이 주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잘 가르쳐서 교회를 위한 일꾼이 되게 하라는 사명도 없습니다. 사도들이 할 일은 단지 주님이 일하신 수고의 결과가 어떤 것인가를 가르침으로서 무엇이 참된 생명이 주어진 모습인가를 밝히는데 있는 것입니다.

말씀은 착하게 살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말씀은 교회를 위해서 봉사할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말씀은 헌금할 것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다만 인간이 죄인이다는 것을 알게 하실 뿐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은 율법 자체를 선한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율법 자체가 선한 것이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면 자동적으로 선해질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이 인간이 선해질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일 수 있습니다. 보이지도 않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고, 실제 경험하지도 못한 십자가의 피를 믿음으로 의가 된다고 하는 알쏭달쏭한 말들보다는 이렇게 하면 선하다, 저렇게 하면 악하다는 말들이 더욱 더 확실한 말씀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행위에 선과 악이 담겨 있으니만큼 선악을 확인하기가 가장 쉽고 또 확실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율법을 지키라는 말을 포기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죄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은 스스로의 지식으로 선과 악을 구분합니다. 그러나 죄인된 인간의 지식이란 모두가 자기 중심으로 발전합니다. 즉 자기에게 유익된 것이 선이고 악한 것은 악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인간의 지식인만큼 선악도 육체적 필요와 조건에 따라서 변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가령 예전에는 많은 교회에서 주일에 차 타는 것을 악으로 규정을 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것을 악으로 규정하는 교회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육체적 필요와 조건과 상황이 차 타는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선과 악이 예수님을 기준으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기준으로 구분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의 육체적 요구와 필요에 의해서 선과 악이 구분되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든지 '인간이 약해서'라든지 '최선을 다하면 된다'는 등의 자기 합리화와 자기 변명을 늘어놓게 되는 것입니다. 죽어도 자기의 죄인 됨을 고백하기 싫다는 것입니다. 내가 죄인 됨을 고백하는 것은 곧 자신의 자존심을 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끝까지 의인으로 남아 있기 위해서 자기 합리화가 필요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을 선한 것으로 오해하고 율법을 통해서 선해지고자 하는 사망의 열매입니다.

5절에 보면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라고 말씀합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의 정욕이 역사하게 되었고 우리로 하여금 사망을 위한 열매를 맺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의 죄의 책임이 율법으로 전가되는 듯 보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율법을 주지 않았다면 죄의 정욕이 역사할리도 없고 사망을 위한 열매를 맺지도 않을 것이 아니냐는 핑계를 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7절이 말씀이 그러한 핑계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7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다시 말해서 율법이 우리를 죄짓게 한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율법에 우리를 죄짓게 하는 요소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에 주어진 것이고 죄를 깨닫게 하려는 것이 율법이 가지고 있는 의의이고 목적입니다. 결코 율법을 지키는 것이 목적이 아닌 것입니다.

죄인을 죄인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죄인이 죄에 대해서 모른다는 것 때문입니다. 죄를 지어서 죄인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모르기 때문에 죄인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경우는 도덕과 양심에 의한 죄책감이 있을 때입니다. 그렇다면 도덕과 양심으로 떳떳할 때 그는 자신을 죄인으로 인정을 하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죄인의 모습입니다. 자신을 죄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피가 필요 없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죄인은 단순히 죄를 아는 자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의지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셔서 죄를 알게 하시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죄를 모르고서는 인간 편에서 스스로 의를 생산하고자 할 것이고, 의라고 생각되는 것이 자신에게서 보여질 때 그는 자기 의를 의지하지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심으로 죄를 아는 죄인 되어야 인간에게 있는 것은 죄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추호도 자신의 의를 내세우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이 있어야만 죄를 알 수 있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율법이 있어야 인간의 죄가 드러납니다. 율법이 아니면 죄를 죄로 인정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말하기를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않았다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율법이 탐내지 말라고 하니까 '아 나에게 탐심이 있었구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탐심이라고 생각지도 않았던 것들이 탐심이었음이 드러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이 드러낸 탐심은 무엇입니까? 골 3:5절에 보면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고 말합니다. 탐심을 우상 숭배로 규정하는 것은 탐심 자체가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탐심이 없는 피조물된 인간의 본래의 모습은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해주시고 인도하신 것에 대해서 우리는 전혀 부족할 것이 없다는 자세로 사는 것입니다. 현재 나에게 주어진 그것이 나에게 최고의 만족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가 바로 탐심이 없는 본래의 인간입니다. 그러나 현재 자신의 상황에 대해서 만족할 인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자기에게 부족된 것을 채우기 위해서 하나님을 부릅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탐심이고 죄인줄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 죄를 율법이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에 의해서 인간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라는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평가 앞에서 저주의 날만 기다려야 하는 자신의 실체를 발견한 자라면 율법 외에 의를 이룰 수 있는 조건이 주어진 것에 대해서 기쁜 소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1-22)

예수님은 죄를 아는 죄인에 의해서 죽은 것이 아니라 죄를 알지 못한 자칭 의인에 의해서 죽으셨습니다. 세상에 통용되는 죄에 대한 지식은 사단이 심어 준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을 통해서 죄를 알게 되었고 의가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지식으로 선악을 구분하지 말고 예수님을 기준으로 선악을 판단해야 합니다. 그럴 때 인간에게서는 의는 나올 수 없고 온통 죄밖에 없을 인정하고 스스로의 무능함을 폭로한 채 그리스도의 피만 은혜로 삼고 살아가는 자녀 됨의 모습을 보일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