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7:8-13 죄와 인간

사람들은 죄를 인간의 행위를 근거해서 구분 지으려고 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죄란 예수님의 구속의 은혜를 무너뜨리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사단의 인간을 향한 전략은 무엇이겠습니까? 당연히 인간으로 하여금 예수님의 구속의 은혜를 망가뜨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단은 언제나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을 지향하게 합니다. 따라서 사단을 배후로 두고 있는 인간에게서 필히 보여지는 것은 항상 인간을 지향하고 모든 일을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그 초점을 인간의 영광과 자랑에 두고서 하게 됩니다.

교회가 하고 있는 일이라고 해서 선한 일이 아닙니다. 온 교인이 100일 특별 새벽기도회를 하면서 매달리는 일이라고 해서 하나님이 도우시는 일로 인정해서는 안됩니다. 교회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지향한 일이냐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비록 구제를 하고 선교를 한다고 해도 교회의 영광과 인간의 자랑을 지향하고하는 일이라면 죄만 쌓는 결과가 되기 때문입니다.

죄는 인간의 행위가 아닙니다. 행위를 죄로 본다면 롬 3:23절에서 말하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는 말씀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합니까? 죄를 행위로 이해한다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고 말씀하니만큼 지구상의 모든 인간이 지은 동일한 행동을 말해야 합니다. 살인이 죄라면 모든 사람이 살인을 해야 하고, 도둑질이 죄라면 모든 사람이 도둑질을 해야 합니다.

죄는 우리 몸 밖에 있는 세력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들 안에 있습니다. 우리들 속에서 잠자고 놀고 있는 것이 아니라 8절의 말씀대로 기회를 타고 있습니다. 창4:7절에 보면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선을 행치 아니하는 인간의 상태는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로마서 3장에서 말씀하는 대로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는 것이 인간이니만큼 결국 인간의 상태는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는 것이 됩니다. 죄가 문에 엎으려 있다는 것은 문이 열리기만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즉 본문의 말씀대로 죄가 기회를 타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죄라고 할 수 있는 행위가 보이지 않거나 남들보다 적다고 해서 자신을 더 의롭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또 다른 사람의 잘못 된 행동에 대해서 나는 그런 행동이 없으니까 내가 더 낫다는 생각 역시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 생각 자체가 이미 죄가 기회를 타서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무너뜨릴 수 있는 기회다 싶으면 어느새 드러나는 것이 죄입니다.

예를 들어서 앞서 말한 대로 누군가가 잘못된 행동을 했습니다. 그럴 때 그 사람과 똑같은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도 같은 행위를 했기 때문에 큰소리 칠 수 없다는 것 때문입니다. 그런 경우 언제나 의기양양하게 나서며 큰소리치는 사람들은 동일한 행동을 하지 않은 자들입니다. 행동이 없기 때문에 스스로 '너 보다는 낫다'고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너 왜 그렇게 했느냐?'고 큰소리치게 됩니다. 이것이 죄가 기회를 타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 나무란 것이 잘못이 아니라, '나는 너보다는 착하다'는 생각이 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을 지향하고 있는 인간에게서 수시로 나타나는 죄된 모습입니다. 결국 우리 옆에 잘못된 행동을 한 사람을 보내심으로서 말미암아 인간을 지향하고 살아가는 죄가 드러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행동에 대해서 판단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죄에 대해서 전혀 눈감아 버리고 입도 다물어 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나도 죄인인데 뭐'라고 하면서 죄에 대해서 입을 다물어 버린다면, 그것 역시 자신을 기준으로 해서 죄를 생각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죄인이니까 죄에 대해서 입을 다문다면 결국 누가 중심입니까? 내가 중심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중심인 사람은 당당하게 죄를 나무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보기에 이것이 죄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보시기에 이것이 죄다'는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그 사람은 의인의 입장에서 죄인을 나무라는 것이 아니라 똑같은 죄인의 입장에서 죄를 나무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죄가 기회를 탄다고 해서 '그럼 기회를 제공하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을 가지는 것도 어리석은 것입니다. 죄가 틈탈 기회를 제공하지 않겠다는 것은, 자신의 의지로서 죄를 극복해보겠다는 것인데 모든 상황과 환경이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는데 어떻게 우리들 마음대로 죄가 틈탈 기회를 주지 않겠다는 것입니까? 그래서 인간은 죄에 대해서는 포기를 해야 합니다. 죄는 인간의 의지와 도덕심에 의해서 정복되어질만한 약한 세력이 아닙니다. 그 누구도 죄를 정복할 수 없을 만큼 죄는 강한 세력으로 인간에 존재합니다. 그 죄를 알게 하는 것이 7절에서 '율법'이라고 말씀합니다.

인간이 죄에 대해서 몰랐을 때는 자기의 잘남만 보이게 됩니다. 자신의 잘남이 보이게 되면 모든 면에서 하나님에 대해 불평과 불만을 하게 됩니다. '왜 나에게 이렇게 하십니까?'라는 식으로 반항하게 됩니다. 조금만 고생해도 불만이고 조금만 힘들어도 불공평하다느니 하면서 불평을 합니다. 죄는 보이지 않고 의만 보이기 때문에 의에 대한 대가를 기대하는 마음이 불평과 불만으로 맺히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의에 대해서 입을 다물게 하기 위해서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율법을 통해서 자신의 의없음을 발견하고 의에 대해서만큼은 입을 다물어라는 것입니다. 13절에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감추고 싶어하는 죄를 드러내고 죄를 심히 죄되게 하기 위해서 율법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께서 굳이 우리들의 죄를 드러내고자 하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세우시기 위해서입니다. 죄가 드러난 자리에 그리스도의 은혜가 세워지기 때문에 인간이 꼭꼭 감추고자 하는 죄를 드러내기 위해서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한국교회의 분위기는 죄를 말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인간은 의롭게 되었다'는 말은 좋아라 하면서, 인간은 선을 행할 수 없는 죄인이다는 말은 인정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죄에 대해서는 졸업을 했는데, 왜 자꾸 죄를 들먹이냐는 식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십자가의 피를 믿는다고 해서 죄를 졸업한 것이 아닙니다. 죄는 신자된 후에도 여전히 기회를 틈타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란 죄를 범하지 않게 된 자가 아니라 죄가 무엇인가를 알고 인간은 죄인임을 깨닫게 된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9-11절을 보면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서 날마다 우리들을 죽이십니다. 법에 의해서 죽은 자만이 자신의 행위를 주장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은혜만 의지할 수 있습니다.

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는 인간이 삽니다. 반대로 법을 깨닫게 되면 인간은 죽고 죄가 살아납니다. 다시 말해서 법을 깨닫지 못하면 법을 실천하는 인간의 의가 살아나서 그 의를 자랑하고 인간의 의가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죄가 살아났을 때는 죄가 힘을 발휘하기 때문에 모두가 죄 아래 죽은 자가 됩니다.

사도 바울도 법을 깨닫지 못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다메섹에서 부름을 받기 전 사도 바울은 율법 실천가였습니다. 율법을 실천함으로서 자신의 의를 차곡차곡 쌓아가고, 그것으로 타인을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도 죄를 알고 난 뒤에는 죄의 세력이 얼마나 강한가를 철저하게 인식을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은 모두가 인간의 행위에 대해서 철저하게 부정하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행위를 해본 자로서 행위의 무능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율법을 말하는 자들은 율법이 요구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모릅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모르면서 다만 율법의 흉내를 냄으로서 자신을 신자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들의 기도는 이렇습니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눅18:9-12) 이것이 육신이 살아있는 자의 기도입니다.

절망하지 않는 자는 십자가를 찾을 이유가 없습니다. 자신에 대해서 절망하셨습니까? 실망하셨습니까? 여러분을 절망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 율법입니다. 롬 5:20절에 보면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고 말합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은혜는 기도원에서 손뼉치고 찬송 부르고 두손들고 '주여'라고 외치고, 부흥회에서 무당처럼 장난질하는 그런 자리에 넘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는 죄 있는 것에 넘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절망하지 않으면 자신을 믿게 되고 자신을 믿는 자리에서 십자가의 은혜를 찾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자기에 대해 절망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한다는 것은 더 이상 내가 나를 책임지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레 18:5절에 보면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 나는 여호와니라"고 말씀합니다. 분명히 인간이 자신을 책임질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에게 그러한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자신에 대해서 절망하는 것입니다.

우린 끊임없이 죄에 속고 살아갑니다. 죄가 우리를 붙들어서 사망으로 끌고 갑니다. 그러나 신자에게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습니다. 아직도 죄의 세력을 벗어버리지 못했지만, 이젠 무엇이 죄라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죄가 드러날 때 다시금 자신에 대해서 절망하고 여전히 우리들 앞에 피흘리신 모습으로 서 계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은혜만이 나를 살립니다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에 대해서 절망한 신자에게서만 보여지는 믿음입니다.

자기에 대해서 마음껏 절망하십시오. 할 수 있다는 생각이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로 절망하십시오. 신자의 승리와 자랑은 자신에게 절망하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의지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