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7:14-20 내속의 죄

우리가 하루하루를 살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역시 인간은 죄인이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하루의 시간 속에서 자신의 죄인 됨을 확인하지 못했다면 그 하루는 잘못된 하루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죄인이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하루하루의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틀림이 없고 진실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는 말씀이 있으면, 역시 그 말씀대로 선을 행하는 자가 세상에는 하나도 없다는 것을 하루의 삶을 통해서 확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살아보니, 또 스스로 큐티를 하면서 착한 일을 하고 보니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는 말에 대해서 뭔가 불만이 싹트게 되고, 결국 선을 행하는 자가 없다는 말씀은 인간이 예수를 믿기 전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라고 자구적인 해석을 내리게 된다면 그것은 요한 일서 1:10절의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는 말씀에 부딪히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의 모든 인간을 죄인으로 선언하고 있고, 선을 행할 능력이 없는 자로 결론 짓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 편에서는 인간도 얼마든지 선을 행할 수 있다고 고집을 부립니다. 이렇게 끝까지 인간에게도 선의 능력이 있다고 고집하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사랑을 예수님의 사랑과 비교하지 않고 인간들끼리의 사랑과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사랑에 비교하면 할 말이 없는 것이 인간의 사랑인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사랑은 인간으로서는 따라갈 수 없는 모범적인 것으로 따로 모셔 놓고, 너의 사랑과 나의 사랑을 비교하자면서 오직 인간의 사랑을 제시하기 때문에 사랑이 있는 자와 없는 자의 구분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 사람보다는 선하지 않느냐?'는 고집을 부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군가 자신의 약점을 건들면 참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평소에 꽁꽁 감추고 싶어하고 드러내기 싫어했던 것이 자신의 약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가 잘한 것은 널리 퍼뜨리고, 약점이 되는 실수나 잘못에 대해서는 온갖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약점을 희석시키려고 하지 않습니까? 이런 인간이기에 성경에서 죄인이라고 하는 말에 대해서 달가워하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롬 1:28절에 보면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마음에 두어야 할 이유는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나, 훌륭한 일을 하기 위한 힘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 마음에 하나님을 두라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이 계실 때, 십자가 지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계실 때, 우리는 자기 자신의 악함과 더러움이 확인되어 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약점이 발각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고, 자기 스스로 선을 이루고자 하는 교만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교만은 율법이 주어짐으로서 드러납니다. 율법이 주어지자 인간은 율법을 지킴으로 자기의 선을 이루고자 합니다. 이것이 곧 인간에게는 선을 행할 능력이 없음을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18절에 보면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현재 상태입니다. 선을 행하고 싶은 원함은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선을 행할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14절에 보면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죄 아래 팔려 있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이 죄를 사모하고 죄를 좋아해서 우리 스스로 죄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죄에 팔린 자로서 죄라는 세력이 우리를 주관하고 있기 때문에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이상태, 죄에 팔린 자로서 선을 행하고자 하는 원함은 있으나 행할 능력이 전혀 없는 인간의 상태를 알게 하는 것이 바로 율법인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은, 인간이 선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행동의 의를 부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배를 드림으로 영광을 돌리겠다는 것이나, 기도를 함으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이미 말씀을 무시하고 있는 죄악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고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인간 편에서 우리들의 예배와 기도와 찬양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기쁨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생각은 철저히 무시하고 오직 자기들 좋은 것을 골라서 내게 좋으면 하나님도 좋을 것이라고 여겨버리기 때문입니다.

시 51:17절에 보면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애당초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의 예배를 구하시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오직 상한 심령을 원하십니다. 자신을 죄에 팔린 자로, 선을 행할 능력이 전혀 없는 죄인으로 알고 우리를 죄에서 건져줄 그리스도만을 구하는 심령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인간이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다면 그대로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나옵시다.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은, 우리가 행동하는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은 못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행동을 보지 말고 말씀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는 것이 정당합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십니까? 하나님은 오직 사랑하는 아들을 기뻐하실 뿐입니다.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분은 오직 아들이십니다. 그리고 그 아들만 높이고 영화롭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고, 영광을 드리는 것이 됩니다.

신자가 아들만 높일 수 있는 것은 '나는 선을 행할 능력이 없는 죄인이다'는 것을 알 때입니다. 자신이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선으로 오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자신에게 선에 대한 능력이 있다고 자신을 한다면, 결국 예수님이 없이도 얼마든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진노케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20절에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원하는 선을 행하지 못하고 원치 아니하는 것을 행하고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상태입니다.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 죄인의 상태인 것입니다.

죄란 우리가 거부한다고 해서 거부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 시간에 말한 대로 죄가 기회를 탄다고 했습니다. 우리 속에서 기회를 타는 것이 죄이기 때문에 죄에서 해방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예배를 드려도 죄인이고, 기도를 해도 죄인이고, 성경을 보고 구제를 하고 착한 일을 산더미처럼 한다고 해도 역시 죄인일 뿐입니다. 예배를 드렸다고 해서 죄인이 의인으로 변해가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자가 자기 행위에 매이지 않게 됩니다.

내 속에 거하는 죄가 우리가 원치 않는 것을 하게 한다는 것을 다윗의 경우를 들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시는 대로 다윗은 어린 나이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골리앗과 싸워서 이겼고, 사울 왕에게 쫓길 때는 붸겨 다니면서도 그에게 대적을 하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이러한 다윗을 생각한다면 그가 밧세바를 범하는 죄를 지었다는 것이 이해가 안될 것입니다. 그렇게 믿음이 좋은 사람이 어떻게 밧세바를 범할 수가 있는가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더군다나 다윗은 자기의 죄를 감추기 위해서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죽게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이 원해서 한 것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죄가 기회를 탄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에 대해서 나단 선지를 통해서 지적을 받았을 때 회개를 합니다. 그러나 다윗의 회개는 통상적으로 우리들이 하는 '용서해주세요'가 아니었습니다. 시 51:5절에 보면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이것이 다윗의 회개입니다. 죄중에 있는 자기 상태에 대한 발견, 자신의 죄의 상태가 얼마나 뿌리깊고 넓게 퍼져있는가를 인식하고 그 죄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다윗의 회개였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원해서 지은 죄가 아니라 내 속에 죄가 그렇게 하도록 했다면, 나는 죄를 짓지 않은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스스로 원해서 죄를 지었다면 죄에 대한 대가를 받는 것이 마땅하지만 내 속에 죄가 그렇게 하도록 했다면 나는 죄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인이라는 것은, 죄의 행동이 있기 때문에 그 행동을 보고 판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앞서 말한 대로 죄인은 선을 행할 능력이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 자체가 이미 죄인이라는 증거입니다.

율법은 인간은 선을 행할 능력이 없는 존재임을 드러냅니다. 그 이유는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만 의지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이 착한 행동을 해서 하나님께로 나갈 수 있다는 헛된 꿈을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의 피만 의지하고 하나님께 나오라고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 앞에서 선을 행할 능력이 없는 인간임을 자각하시고 세상 죄를 지고 가신 어린양의 피의 용서함으로 살아가는 신자의 기쁨을 맛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