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7:21-25 마음과 육신

십자가는 인간은 죄인임을 고발하는 현장입니다. 따라서 십자가를 제대로 인식하고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는 자는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기본이라고도 할 수 있고, 모든 신자들이 다 알고 있다고 할 정도로 가장 기초적인 내용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 앞에 죄인이라는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내용에 대해서 충실한 자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현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충실한 사람은 인간에 대해서 알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간에 대해서 알게 된 자는 절대로 인간의 능력이나 선함이나 가능성을 믿지 않습니다. 또한 그것을 추구하지도 않고 삶의 목표로 삼지도 않게 됩니다. 착해지자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말인지를 알게 되고 '하면 된다'는 말이 얼마나 사단적인 말인가를 알게 됩니다.

신자의 구원의 토대는 오직 십자가이지 인간의 행위가 아닙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바라보고 믿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이지 우리의 의지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구원의 토대를 십자가라고 하면서도 십자가로 나아가기 위해서, 그리고 십자가를 믿고 사는 신자로서 합당한 모습을 갖추기 위해서 스스로의 의지와 노력을 나타내는 실수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믿음의 행위와 착함이 인간을 십자가의 구원에 굳게 붙잡아 두는 근거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그리스도로 인해서 주어지다고 하면서도 그 구원에 굳게 눌러 앉기 위해서 율법과 행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이 오해하는 것은, 인간에게서 구원에 보조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선한 행위가 나올 수가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고 기뻐하실 만한 행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십자가에 충실하지 못한 인간의 실수입니다.

24절에 보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의 탄식입니다. 사람들은 사도 바울의 업적을 높이 평가합니다. 사도 바울만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인물도 없다고 할 정도로 사도 바울의 행위를 높이고 있습니다. 바울이 온 세계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한 그 행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행위임을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토록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만한 행위를 한 바울에게서 왜 이런 탄식이 나오는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자신을 사망의 몸으로 평가합니다. 죽음에서 헤어날 수 없는 존재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들이 사도 바울과 같은 업적을 남겼다면 과연 바울과 같은 탄식이 나오겠습니까? 아마도 '주를 위해서 나보다 더 많은 일을 한 사람이 있으면 나와봐'라고 하면서 자기 믿음을 과시하고, 자기 사랑을 과시하고, 자기 업적을 찬양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는 고백은 생각조차 못할 것입니다. 자기를 곤고한 사람으로 사망의 몸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위대한 종으로만 평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자신을 곤고한 사람으로, 사망의 몸으로 평가했다면 그것은 분명히 사도 바울이 뭔가를 알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깨달은 그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18,19절을 보면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라고 탄식합니다. 사도 바울은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 마음은 있지만 선은 행하지 않고 악을 행하는 자기를 발견합니다. 이것이 곧 현재 인간의 존재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 앞에서 '우리는 선을 행할 수 있다'는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조차도 선을 원함은 있지만 행해지는 것은 선이 아니라 악이었다고 탄식하는 이 말씀 앞에서 '아니다 나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선을 행할 수 있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선이란 인간의 도덕과 윤리적 착함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선이 그러한 것이라면 굳이 기독교에서만 선을 찾을 것이 아니라 불교나 유교 등 다른 종교나 단체에서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 것이 선입니다.

선이란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나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의 삶은 온통 우리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사는 것이지 하나님이 뜻에는 관심도 안두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들에게서 선이 나올 수가 있는 것입니까? 이미 자기 뜻을 고집하는 악에 빠져 살아가는 우리들에게서 어떻게 선이 나올 수가 있습니까? 물론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십자가를 바라보게 된 사람은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선이 무엇이고 악이 무엇인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이 거하는 그 마음에는 그리스도가 가신 그 길을 가야한다는 원함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런 원함을 가졌다고 해서 그리스도가 가신 그 길을 걸어가는 삶이 보여지는 것입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현재 주어진 삶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고 주어진 것에 감사해야 한다는 마음은 있으면서도 결국 맺어지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에 불평하고 거부하는 것 아닙니까? 이것이 인간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이런 존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는 깊은 탄식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인간은 선을 원함은 있으나 선을 행하지는 못하고 악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까? 지난 시간에 인간이 죄인일 수밖에 없는 증거는 '선을 행할 능력이 없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인간은 왜 선을 행할 능력이 없는 것입니까?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었다는 말씀에 대해서 하나님의 속성이니 성품이니 하면서 의견들이 많지만, 저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이끌어 가시고자 하는 창조의지를 나타낸 말'로 생각합니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숨을 불어넣어서 숨을 쉬고 살아가게 하신 그 의도는 단지 인간이란 존재를 세상에 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하나님의 뜻대로 존재하게 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이 곧 선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습니다. 이것은 그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살아가는 존재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악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조그만 일을 해도 자기 보람과 자기 자랑을 생각하게 되고 자기가 높임 받는 것을 기뻐하는 존재로 남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인간은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자기를 고집하는 악을 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것이 바로 자기의 의를 고집하는 인간의 악에 의해서가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십자가 앞에서 자기의 의를 말하면서 '나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있노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십자가를 하나의 관람 대상으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신자가 선을 알면서도 선을 행하지 못하는 것은 선을 행하기 원하는 것보다 더 큰 힘이 우리를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20절에 보면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고 말합니다. 죄가 선을 행하지 못하게 하는 능력이며 힘입니다. 이 거대한 힘이 우리 속에 있기 때문에 보여지는 것은 악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22-23절에서도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고 말합니다. 분명히 그리스도를 알게 된 우리의 속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합니다.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속사람조차 없다면 그는 이미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신자라면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분명히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속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속사람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속 사람과 싸우는 악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 악이 우리를 죄의 법 아래로 끌고 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실체를 자신 안에서 발견하게 된 사도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라'는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선을 행하겠다고 나서는 것 자체가 이미 죄의 법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25절에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고 합니다. 마음은 하나님의 법을 육신은 죄의 법을 섬기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 아닙니까? 여러분이 신자라면 분명히 그 마음은 그리스도를 원할 것입니다. 그러나 육신이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마음으로는 세상 것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생명을 얻게 된 것으로 감사하며 그것으로 기뻐하고 살아가는 행복한 삶을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원하게 되는 것은 세상 것이지 않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사라진 그것이 곧 육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육신을 위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며 그것이 죄의 법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을 바울은 곤고한 자로 사망의 몸으로 말합니다. 그럴 때 소망은 그리스도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을 곤고한 자로 사망의 몸으로 봤을 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한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자신을 살렸음을 자신을 곤고한 자로 사망의 몸으로 보게 되었을 때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선을 행할 능력이 없지만, 선을 행할 능력이 있으신 주님의 선한 행동 때문에 우리가 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신의 선을 의지하고 믿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선한 행동을 의지하고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현장이 아닙니까?

어떤 사람들은 우리에게 성령이 있으면 왜 죄를 이기지 못하는가? 내가 죄의 범을 섬긴다면 그것은 성령이 죄에게 지는 것이 아닌가? 라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우리에게 오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이기게 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죄를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내가 죄를 이겼다고 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은 오직 그리스도가 길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인간의 죄인 됨을 알게 하시고 인간은 사망의 몸이라는 것을 발견케 하시고 우리를 살리신 그리스도를 의지하도록 하는 것이 성령입니다.

그래서 성령 받은 자는 죄를 이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인 됨을 알고 사도 바울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는 탄식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망에서 건지신 주님의 의를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십자가가 우리의 생명 되어서 우리를 용서하시는 힘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 것을 힘으로 여기지 않게 됩니다. 세상 것을 힘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에 세상 것으로 다투고 비교하고 시기하는 모든 것을 부질없는 것으로 여겨지게 됩니다. 우리 모두 세상 것이 아닌 그리스도의 용서의 힘으로 살고 있음을 항상 자각합시다. 그럴 때 속썩이는 자식도 달리 보일 것이고 상종하기도 싫고 보기만 해도 욕이 나오는 이웃도 달리 보일 것입니다. 남은 인생도 그리스도의 용서의 힘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