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8:1-2 해방

죄를 말하면 인간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달갑지 않은 말로 밀쳐 내려고 합니다. 어떻게든 죄가 나와 상관이 없음을 증명하려고 합니다. 창 3:11절에서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라고 아담에게 말씀하실 때 아담의 대답은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3:12)였습니다. '예 제가 먹었습니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가 실과를 줘서 먹었다는 것입니다. 이 대답에서 보면 아담은 죄의 책임을 여자와 하나님에게로 돌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여자를 주지 않았으면 내가 실과를 먹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인간은 자기의 죄를 인정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설사 자신에게 죄된 행동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행동을 하게 한 원인을 찾아내서 그쪽으로 죄를 전가시킴으로 자신은 죄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웃과 싸웠을 때도 '네가 먼저 이렇게 했잖아'라는 말을 하게 됩니다. 상대방이 먼저 하니까 나도 했다는 것으로서 죄의 책임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웃과의 싸움에서 시비를 가려보려고 하면 도대체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알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말을 들으면 이 사람이 옳고 저 말을 들으면 저 사람이 옳다고 하면서 '둘 다 잘못했다'는 판결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어서 인간에게 죽음이 오게 되었다고 하니까 하는 말이 '나는 선악과를 안먹었는데요'라고 합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고 반발하고 싶어하는 것은, 왜 아담이 먹은 선악과에 대한 책임을 우리에게 전가시키느냐는 것입니다. 회개하라고 할 때도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것에 대한 회개는 하지 않게 됩니다. 왜냐하면 나와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말하는 것이 뭡니까? 기독교의 교리라고 하면서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의 원죄는 해결됐기 때문에 원죄에 대해서 회개할 필요가 없고 자범죄만 회개하면 된다고 말합니다. 그래야 인간의 사고방식에 맞아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결국 선악과 문제는 현재의 인간과는 상관이 없는 얘기고, 따라서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의 십자가도 현재의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 되버리는 것입니다.

인간은 인간 스스로 정죄함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감히 나더러 '너는 죄있는 자다'는 선언을 하지 못할 정도로 스스로 의를 갖추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죄라고 생각되는 행위를 미리 차단함으로서 죄 안짓는 자로 남고자 하는 것입니다. 주일에 교회에 안나오는 것이 죄라고 하니까 교회를 나옴으로써 죄인이 안되려고 합니다. 십일조를 안하면 죄라고 하니까 십일조를 함으로써 죄인이 안되려고 합니다. 이것이 스스로 의를 갖춤으로서 정죄함을 피해보고자 하는 인간의 의도입니다.

그러나 본문 1절에서는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말합니다. 정죄함이 없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한 일이지 절대로 인간의 선함이 정죄에 대한 방패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롬 4:4-8절에 보면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인간 편에서 한 것이 없이 의로 여김 받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믿음이 없고 성경을 무시하고 있다고 단정지을 수밖에 없는 것은, 일한 것 없이 경건치도 아니한 자를 의롭다고 하신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한 것 없이 의로 여김 받은 행복에 대해서 무지한 것을 보니까 믿음이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의를 자신의 경건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침마다 기도하고 큐티하고, 직장에 가서도 큐티로 하루를 시작하고, 일을 하기 전에 먼저 성경을 읽는 행위들이 자신을 의롭게 만든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믿음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2절을 보면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생명의 성령의 법이 해방하였다고 말합니다. 죄의 법을 섬기고 죄의 법 아래 있던 자가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인해서 해방 받았다는 것은, 이제는 내가 나를 책임지는 삶이 아니라 성령이 나를 책임지는 삶을 사는 자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의지와 내 노력으로 믿음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나를 책임지고 나를 붙들고 있기 때문에 믿음이 가능한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구원입니다.

믿음은 자기 행위를 벗어나서 예수님의 행위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행위가 나를 구원했다. 예수님이 잘하신 그 행동 때문에 나는 정죄함이 없다'는 이 믿음에 왜 자신을 맡기지 못합니까? 우리가 경건하게 살 때 의롭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경건하지 못할 때, 즉 죄인이고 더러운 자고 엉망으로 살아갈 때 의롭다고 하셨다는데, 왜 그것을 믿지 못합니까?

구원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면서도, 그 선물을 팽개치는 행위는 자기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롬 7:24절에서 사도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는 탄식을 합니다. 바울은 이 탄식을 하면서 '나는 구원 못받겠다 내가 이런 꼴인데 어떻게 구원받나'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사망의 몸으로 인식함으로서 사망에서 건지신 그리스도의 의를 바라보고 감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의 안에서 '나는 곤고하다 나는 구원받지 못할것이다'는 걱정을 하고 있을 수있습니까? 결국 바울의 탄식은 자기 구원을 염려하는 탄식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로서 그리스도의 의안에서 인간의 절망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볼 것 없으니까 예수님의 의에만 소망을 두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끝까지 의라고 여기는 자기 행위를 통해서 구원에 확신을 가지고 안심을 하려고 하는 것은 예수 안에서 정죄함이 없다고 말씀하는 것을 정면으로 대적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흔히 교회에서 구원의 확신을 말하는데, 구원의 확신이라는 것을 보면 모두가 내가 얻은 구원이 분명한가를 확인하는 작업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소위 구원의 확신이라는 것이 자기 주관적이고 자기 감정적으로 흘러갑니다. 그러나 구원의 확신이란 주님이 하신 일 때문에 확신을 가질 수가 있는 것이지 인간이 한 행위를 통해서 확신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얻은 구원이 분명한가를 확인하려고 하지 마시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분명한 구원에 대해서 확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의 행위에 확신을 두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행위를 근거로 해서 확신을 가지려고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밖에 있는 불신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정죄함이 없다는 것은 분명히 확실한 구원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 어떤 것도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을 흔들지 못합니다. 성령이 책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해방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선택했으며 내가 예수께 나를 맡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집어넣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신의 행위로 인해서 지금의 내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예수 안에 넣으셨고, 또 내가 예수 안에 있게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신 모든 것이 나의 것이 되었다는 것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더 이상 율법으로 판단되지 않습니다. 법적인 차원에서 잘잘못을 묻지 않습니다. 이것을 하면 의고 안하며 죄다는 것이 없습니다. 때문에 교회가 교인들을 율법적인 차원에서 판단하고 법적인 것으로 옳고 그름의 기준을 제시하는 것은, '그리스도안'이라는 은총과 사랑을 짓밟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안이라는 것은 법적인 판단에 의해서 끊어지지 않습니다. 혹 자녀이기 때문에 책망과 징계는 있을 수 있습니다. 아니 분명히 있습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라는 말씀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히12:8). 그러나 끊어짐은 없습니다. 그래서 8:35절에서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고 말씀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확고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믿고 살아가는 것이 구원의 확신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내 구원이 분명한가를 보는 것이 아니라 확고한 그리스도의 사랑만 의지하는 것이 곧 구원의 확신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안을 핑계 삼아서 내 멋대로 행동해도 되는 것입니까? 정죄함이 없다면 마음대로 죄 가운데 나가도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까? 여기에 대해서 답한 것이 6:1-2절이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성령의 법이 해방했다고 해서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사망의 법에 의해서 지배받던 자가 이제는 성령의 법에 의해서 사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사방에서 해방된 것이지 성령에서조차 해방되었음을 말하지 않습니다. 성령의 법으로 산다면 그 속에 뭐가 있겠습니까? 성령으로 깨닫게 된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만 존재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은혜와 사랑으로 사는 자가 되지 않겠습니까?

자기 행함을 보는 것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의의 행동을 통해서 신자되어 보겠다는 것도 역시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무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행위와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로 신자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무엇을 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리스도만 보여줘야 할 존재입니다. 그리스도의 증인되어 살아가는 것이 신자의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의 미래까지 책임지고 있음을 기억하시고 스스로 자기 미래를 책임지려고 하지 마십시오. 자기 미래를 자기가 책임지려고 하는 것 때문에 불의와 부정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산다는 것은, 이미 완성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미래까지 죽음후의 세계까지 완전히 보장되어진 인생을 삽니다. 이것이 해방입니다. 자유자이기 때문에 세상 것에 매이지 않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마음을 누르고 있는 것이 있습니까? 그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그것이 무엇이든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모든 것을 이미 얻은 자로 다시금 바라보십시오. 쓸데없는 것에 집착하고 헤어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자신에 대해서 다시금 탄식하시고 사랑과 은혜로 우리를 붙드신 예수님을 기뻐하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