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8:3-4 율법의 요구

그리스도안에서 산다고 할 때 '그러면 오늘날에도 율법은 필요한가 필요치 않은가?'라는 논쟁이 끊이지 않습니다. 이 말은 율법을 지켜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를 두고 논쟁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이 필요한가 필요치 않은가, 율법을 지켜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를 따지기 전에 먼저 율법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율법이 무엇이며 왜 주어졌는가를 알기 전에 율법의 필요성에 대해서 논쟁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본문 4절에 보면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에 대해서 오해를 하면, 결국 하나님은 우리가 율법의 요구를 이루기를 원하신다고 이해하게 됩니다. 예수를 믿기 전에는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없는 사람이었으나 성령을 받고 예수님을 믿게 된 신자로서는 자발적으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율법의 요구라는 것을 율법을 실천하는 것으로 이해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리기를 율법이 무엇이며 왜 주어졌는가를 먼저 알자고 했습니다. 이것을 모르고서 율법을 이야기하면 결국 우리의 생각과 상식이 앞설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롬 3:19-20절을 보면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으로 율법이 왜 주어졌는가에 대한 답을 분명히 내릴 수 있습니다. 율법이 주어진 이유는 실천이 목적이 아니라 죄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인간은 자기 행함을 통해서 의를 생산할 수 없음을 분명히 알 때 율법 외에 한 의를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애당초 율법은 율법 외에 한 의를 바라보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성령을 받으면 의를 행할 수 있는 인간으로 달라질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아무리 성령을 받고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해도 인간에게서 의가 나올 가능성은 없습니다. 만약 신자가 그리스도를 알고 나서 의를 행할 자질이 발생한다면 사도 바울이 무엇 때문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는 탄식을 했겠습니까? 그리스도를 믿고 안믿고와 상관없이 인간은 변함없는 죄인이고, 그 죄에 매어 사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에 탄식이 나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성령을 받은 자에게서 달라짐이 아예 없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예수를 믿은 자와 믿지 않은 자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차이점은 의를 행하는 능력의 차이가 아니라 거듭난 것과 거듭나지 않은 것의 차이입니다. 거듭났다는 것은 새로운 마음이 창조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새로운 마음이란 성령의 마음이고, 그 마음으로 사는 것이 영을 좇아 사는 것입니다.

이처럼 영을 좇아 사는 자의 달라짐은 자신의 의를 포기함으로서 나타납니다. 따라서 인간이 변했다는 것은 행동의 변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의의 자질을 포기하지 못한 상태에서 완전히 포기한 상태로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의의 자질을 포기했기 때문에 하늘에서 주어진 한 의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율법이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를 다니는 사람에게 있어서 스스로 행동하는 것 말고 가만히 다른 의만 의지한다는 것이 맹숭맹숭하고 미심쩍을 수밖에 없습니다. 분명히 은혜로 구원받음을 인정하면서도 은혜 받은 표를 인간의 행동에서 찾고 있는 것입니다. 은혜 받기 전에는 억지로 법을 지켰지만, 은혜를 받은 후에는 자발적으로 기쁨으로 법을 지키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법이 요구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흠없는 완벽한 의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난처하게 합니다. 그래서 이 난처함에서 빠져 나오고자 하는 사람들은 인간은 연약해서 완벽하게 할 수 없다고 하면서 다만 최선을 다할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최선을 다하는 그 마음을 하나님이 높이 보신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스스로 뭔가 해보겠다는 의도를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것은 어설프게 의를 흉내내는 정도가 아니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닌 완벽입니다. 율법의 완성이 어떤 모습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사랑에서 헤어나지 못한 인간이 어떻게 사랑이라는 의를 나타낼 수 있겠습니까? 자기 사랑에 빠져 있는 인간은 무엇을 해도 자기 사랑을 드러낼 뿐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연약함입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것은 주일을 성수하라는 것도 아니고, 바르게 살아라는 것도 아니고, 기도하는 신자가 되라는 것도 아닙니다. 율법은 완벽한 의를 요구할 뿐입니다. 하늘의 의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어설프게 그 의를 흉내 내려고 하지 마십시오. 의는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세상에 의란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멸망을 당해야 합니다. 이것은 이미 확정되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확정된 하나님의 계획을 믿지 못하는 자들이 자발적인 의를 통해서 그리스도안에 안주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의를 만들어 낼 수 없기에 하나님은 하늘에서 의가 되시는 분을 보낸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을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서 죄있는 자가 져야 할 짐을 지게 하심으로서 인간들이 죄를 지적하시고, 이제는 육신으로 살지 말고 영으로 살아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영으로 산다고 해서 또 다시 바르게 사는 것으로 이해하지 마십시오. 영으로 사는 것은 성령의 마음으로 사는 것이고, 성령이 있는 마음은 자기 죄를 알고 자기 의를 포기하고 하늘의 의를 의지하고 사는 마음입니다.

여기서 다시 주의해야 할 것은 율법의 요구를 누가 이루느냐는 것입니다. 율법의 요구가 실천이 아니라 하늘의 의를 요구하는 것이라면 어쨌든 하나님이 보내신 그 의를 믿어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어쨋든 믿는 것은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4절을 다시 보면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이 말씀은 이룸의 주체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임을 말해줍니다. 즉 믿는 것이 아니라 믿게 하는 것이고 이루는 것이 아니라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언제나 주체로서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증거물을 토해놓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엡 5:8절에 보면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말씀을 대할 때에도 행함의 주체를 인간에게 둔다면 '이젠 내가 빛의 자녀가 되었으니까 빛을 행하고 살아가자'라는 답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의를 행할 자질이 없다고 했는데도 결국 또 다시 육신으로 사는 원위치로 돌아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체를 하나님에게 둔다면 하나님이 하게 하신다는 것을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빛을 나타내야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여전히 자신은 죄인임을 알게 되고 하늘의 의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자임을 인식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빛의 자녀로 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것이 인간의 행함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행함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세움으로서 인간은 죽어야 할 죄인임을 증명했습니다. 완벽한 의를 요구하는 율법의 요구를 예수님이 충족하심으로서 의는 율법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밝혀준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안에 있는 신자에게서 보여지는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진 모습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서 자신의 죄를 알고 죄의 세력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신을 탄식하며 하늘의 의로 오신 예수님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진 신자의 모습입니다.

이것을 해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라고 묻는 것은 아직까지 육신에 매어있는 것입니다. 자기 행함을 통해서 의를 이루고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켜 보려는 발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신자에게 행함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요구합니다. 믿음이 있으니까 행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은 육으로 그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믿음은 행함을 동반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포기를 동반합니다. 인간의 의에 대해서 포기하고 자신의 행함을 의지하지 않고 살아갈 때 그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진 신자의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