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8:9-11 그리스도의 사람

여러분에게 있어서 신자된 기준은 무엇입니까? 신자인가 신자가 아닌가를 무엇을 기준으로 판단하시겠습니까? 물론 우리들의 시각으로 신자 여부를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되지만, 적어도 성경에서 말하는 신자란 어떤 자인가를 아는 것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신자란 어떤 사람인가를 제대로 알아야 쓸데없는 세상 기준으로 가지고 남을 판단하거나 자신을 살피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9절에 보면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보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닌 자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이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를 말합니다. 그가 바로 '신자'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신자가 누구인가를 말하는 것을 보면 여러 가지 복잡한 수식어가 붙어 있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일을 지켜야 한다느니, 웨스트민스터 신조를 믿어야 한다느니, 기도를 열심히 해야 한다느니, 흔히 요즘 교회들이 말하고 있는 신자된 자격에 대해서는 전혀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9절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사람은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있으면 그가 바로 그리스도의 사람인 것입니다. 여기에 다른 것을 삽입하지 말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있다는 증거도 여러분 멋대로 상상하지 말기 바랍니다.

여러분 자신이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살아가는지 아닌지를 점검하려면 다른 것을 기준으로 내세우지 마시고 '나에게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가 없는가'를 기준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그리스도의 영이 있으면 육신이 아닌 영에 있는 사람이고 그가 바로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씀 드릴 때 곤란한 것은 '과연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것을 무엇으로 아느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란 성령을 말합니다. 즉 성령이 있는 자가 그리스도의 사람, 신자인데 성령이 있다는 것을 무엇을 아느냐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성령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엄청난 오해를 함으로서 신자에 대해서도 많은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소위 신오순절 파라고 하는 순복음 교단은 성령이 있는 가장 큰 증거를 방언이라고 말합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자 제자들이 방언을 했다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있어서 신자된 증거는 '방언'입니다. 방언만 하면 그는 신자이며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인정받습니다. 때문에 신자된 증거를 갖기 위해서 인위적으로 방언의 훈련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방언을 한다고 해서 신자된 것이고, 또 인위적인 훈련을 통해서도 할 수 있는 방언이라면 성령이 무엇 때문에 와야 하는 것입니까? 그냥 인간의 노력과 훈련에 맡기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성령이 임한 증거를 소위 뜨거운 기도나 열정 있는 찬송, 교회에 대한 희생과 봉사 등등으로 말하기도 하지만 성경에서는 성령의 증거를 전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령이 있는 증거는 감정적인 체험이나 느낌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면서 마음의 뜨거움을 느끼고, 무아지경에 빠져서 '주여'라고 목이 터져라고 외치면서 눈물을 흘리고 발광을 대는 것을 성령이 임한 증거라고도 하지만 그런 것들은 분위기만 적당히 만들어 주면 누구나 그 분위기에 취해서 그런 행동을 하게 됩니다. 일종의 최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뜨거움도 아니고 열정도 아닙니다. 흔히 자신의 마음 상태가 뜨겁지도 않고 열정도 없으면 신앙이 식었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스스로 속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반대로 분위기에 도취해서 잠깐 마음의 뜨거움을 느끼고서는 성령을 받았다느니 은혜를 받았다느니 하면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된 것으로 착각할 때, 그것도 역시 스스로 속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름만 되면 교회마다 성행하는 것이 수련회입니다. 무슨 청년 수련회니 학생 수련회니 하면서 청년들과 학생들을 모아놓고 소위 신앙수련이라는 것을 합니다. 교회들은 이 수련회를 통해서 청년들과 학생의 신앙을 높여 놓겠다고 말하지만, 오히려 청년들과 학생들에게 큰 해악을 끼치는 결과만 낳고 있습니다. 교회가 생각하는 수련회의 성공 기준은 참석한 학생과 청년들이 재미있어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빼놓지 말아야 할 것은 눈에서 눈물이 흐르게 하는 것입니다. 캠프파이어 등을 하면서 자신의 죄를 쓴 종이를 태우고 예수님의 용서하심을 기도하면서 눈물을 흘리게 하고, 여러 가지 행사와 강의를 하면서 예수님을 위해서 살겠다고 결단을 하게 함으로서 수련회가 성공적으로 마쳤다고 자부합니다. 그러나 끝나고 나면 남은 것이 뭐가 있습니까? 차라리 실컷 놀게 해버리면 낫겠는데, 신앙을 향상시킨답시고 하는 짓들이 결국은 청년이나 학생들로 하여금 신앙에 대해 큰 오해를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인간을 변화시켜 보겠다고 하지만, 인간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 존재임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눈물 흘리고 결단을 하면 그것으로 변화되었다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단에게 교회가 단체로 속고 살아가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10-11절을 보면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그대로 해석하면 그리스도가 안에 있는 신자는 그 몸은 죽었지만 영은 그리스도의 의로 인해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영이 거한 사람은 자신을 죽어야 할 자로 여기게 되고, 죽어야 할 내가 그리스도의 의로 인해서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이 함께 한 증거입니다. 성령이 임했다는 것은 인간에게 어떤 초월적인 능력과 색다른 마음과 감정을 가져다주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성령이 임함으로서 알 수 없었던 것을 알게 되는데, 그것은 '나는 죽어야 할 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어야 할 내가 그리스도의 의 때문에 산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성령이 임한 증거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증거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되었다는 것을 행동에 대한 변화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의 사람 된 것은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그리스도만을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을 죽어야 할 자로 인식했을 때 가능합니다. 자신에 대해서 그 어떤 가치도 영광도 두지 않고 오직 죽어 마땅한 자로 인식하게 될 때, 죽어야 할 나를 살린 그리스도의 의가 새로운 생명으로 가슴속에 파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수련회의 최고 성공은 학생들로 하여금 '인간은 해도 안된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죽어 마땅한 인간이 착한 일을 한들, 눈물을 흘리고 기도를 한들, 성경을 하루에 수십 장을 본들,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을 알게 하는 것이 수련회의 성공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신앙 행위에 기대를 두지 않고 십자가에 피흘리며 달려있는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 최고의 성공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하면 '그것은 학생들을 너무 나약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반대합니다. 힘을 북돋워주고 하고자 하는 열심을 심어주어야지 해도 안된다는 것이 무슨 말이냐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단의 말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그리스도의 영이 아니면 그리스도를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를 안다고 해도 그것은 모두가 거짓일 수 있으면 가짜 예수 일 수도 있습니다. 오직 성령을 통해서 아는 그리스도만이 참된 그리스도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있다는 것은 새로운 인간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거듭난 인간이 된 것입니다. 죽고 다시 산 인간입니다. 성령이 거하시면 내가 바로 죽어야 할 몸이라는 것을 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단지 안다고 해서 된 것이 아니라 죽을 몸이기 때문에 육신을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듭난 인간은 육신을 의지하지 않는 인간으로 새롭게 태어난 인간을 말합니다. 새로운 피조물로 재창조된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인간이 육신이 되었다는 의미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자기 육신을 의지하는 인간 되었다는 뜻입니다. 육신을 의지하는 인간이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은 언제나 육신을 위한 생각 밖에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원수된 것입니다. 그래서 8절의 말씀대로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육신에서 나온 행위를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신자다운 신자가 되보겠다는 발상이 과연 신앙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수련회에서 눈물 흘리면서 회개하고 열정적으로 소위 뜨겁게 찬양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자기 육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온 것은 오히려 하나님과 원수된 것인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육신을 추구하도록 조장하는 것을 어떻게 신앙수련회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 된 것이고, 육신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합니다. 그래서 육신은 죽어야 할 몸에 지나지 않습니다. 물론 가만히 있어도 때가 되면 죽을 몸이지만, 미리 죽은 자로 살아가는 것이 신자입니다. 육신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의미입니다. 몸은 죽고 영은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그리스도의 사람은 오로지 예수님의 은혜만 자랑할 뿐입니다. 마음에 뜨거움이 없고, 눈물을 흘리는 회개가 없고, 열정적인 찬양이 없다고 해도, 죽어야 할 내가 그리스도의 의로 인해서 다시 산자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그 은혜만 자랑할 때 그는 분명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신앙을 주관적인 기쁨과 자기 능력과 열심히 점검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수요일에 라오디게아 교회에 쓴 편지를 설교하면서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다는 말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것은 열심히 없다는 책망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차지도 않고 더웁지도 않는다는 것은, 그리스도만을 의지하지 않는 것을 책망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내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믿음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아니면 나는 가망 없고 희망 없는 존재임을 알고 그리스도만 바라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자기 육신을 의지하지 않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우리에게 오심으로서 우리 육신을 죽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힘으로도 얼마든지 기도하고 성경보고 봉사하고 회개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가 과연 그리스도를 의지하겠습니까? 기도하고 성경보고 착한 일 많이 하는 자신을 의지할 뿐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성령이 임한 그리스도의 사람은 '나는 죽어야 할 자이지만 그리스도의 의가 나를 살렸다'는 것을 인정하고 삽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곧 나의 죽음을 대신 한 것이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앞에서는 자신의 의를 내세우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님의 은혜만 말할 뿐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 한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