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선에 대한 욕구가 있습니다. 선이 인간의 가치를 향상시키기 때문에 선의 실천을 통해서 자신의 가치 향상을 꾀하는 것입니다. 분명 사람들의 눈에는 선을 행한 자와 행하지 않은 자에 대해서 차별 의식을 가집니다. 선을 행하면 행할수록 세상에 존재해야 할 가치가 향상되고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며 사랑을 받게 된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을 행하는 교인을 믿음이 좋은 자로 여기면서 그 가치를 높이 여겨줍니다. 그래서 많은 교인들이 선을 행함으로서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한 행위이든 믿음이든 그 무엇을 통해서라도 인간의 가치를 향상시키겠다는 발상이 과연 성경적으로 옳은가를 먼저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의 가치 향상에 대한 욕구는 오늘날 성화라는 개념으로 교회 안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인간이 변화되어서 과거보다 더욱 나아진 상태를 원하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과연 하나님은 인간이 더욱 나아지기를 바랄까요?
지금 우리의 몸은 육신의 상태입니다. 즉 하나님 보시기에는 어느 한구석도 곱게 봐줄 수 없는 악하고 더러운 상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을 개발하시고 변화시켜 가시지 않습니다. 악하고 더러운 존재가 변화되고 개발되어봐야 여전히 악하고 더러운 존재로 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재창조하시는 것입니다. 즉 재창조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지 고쳐서 재활용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성화란 한마디로 말해서 재활용하겠다는 것입니다. 버리는 것이 아니라 고쳐서 쓰시는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 '성화'입니다. 신자가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에는 신자에게 함께 하신 성령을 통해서 점차 거룩하게 완성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화의 단계에 있는 신자는 갈수록 죄를 이겨가게 되고 점차 영광된 상태로 변해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영접한 신자가 해야 할 일은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대해서 오해하기 때문에 발생한 결과입니다.
12,13절을 보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단편적으로 이해해 버리면 예수님께서 신자에게 육신에게 지지 말고 이겨서 몸의 행실을 죽이는 삶을 살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이 그런 뜻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몸은 죽어야 할 몸으로 말씀합니다. 영광, 변화, 성화, 거룩을 이루어야 할 몸이 아니라 6:6절에서는 '죄의 몸'으로 말하고, 7:24절에서는 '사망의 몸'이라고 하고, 8:11절에서는 '죽을 몸'으로 말합니다. 즉 죄로 인해서 더러워진 몸은 존재 가치가 없으며 소멸되고 사라져야 할 몸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몸의 행실을 죽인다고 해도 여전히 죄 아래 있는 몸입니다. 뭔가 변화된 흔적이 보인다고 해도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며 자신의 의지에 의한 절제의 모습이지 거룩과 영광의 흔적은 아닙니다. 즉 변화된 모습이 보인다고 해서 죽은 자에서 산 자 되는 것은 아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육신된 인간은 믿음으로 인해서 점차 가치 있고 거룩한 존재로 발전되어 가는 것이 아니라 죽어야 하고 사라져야 할 흙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한 인간이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이 있다면 그것은 성령의 사역으로 인해서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성화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11절에 보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는 이 말씀은 죽어야 할 육신에 성령이 오심으로서 죽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즉 죽었던 육신이 그대로 살아나는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 아래 있는 몸은 사라지지만 성령이 죽을 몸에 오심으로서 미래에 나타날 하늘 모습을 미리 나타내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성화 되어야 하는 부분은 없습니다. 다만 성령이 우리의 몸을 하늘 모습을 담아내는 그릇으로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만 있을 뿐입니다. 인간이 성화 됨으로 거룩하게 되어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이루신 거룩이 우리를 거룩 되게 하기 때문에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것으로 이미 거룩된 신분입니다.
따라서 13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산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몸의 행실을 죽이라는 책임을 부여한 의미의 말씀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몸의 행실을 죽일 수는 없습니다. 이것을 잘 아는 사람들은 말하기를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행실을 죽이는 주도적인 역할은 인간에게 있고 성령은 단지 인간에게 사용되어지는 도구로 전락되어 버린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간 편에서 성령을 받아 가지고 몸의 행실을 죽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는 말씀은 성령을 줄 테니까 그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라는 뜻이 아니라 성령이 함께 한 자는 성령으로 인해서 몸의 행실을 죽이는 모습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을 통해서 그가 바로 산 자이며 하나님의 아들임이 증명된다는 것입니다.
14절에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또 9절에서도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영으로 인도함 받는 자이며, 그리스도의 사람은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자로서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성령이 있는 자는 성령의 능력으로 인해서 자연히 육이 아닌 영에 있는 모습을 나타내게 되어 있으며 이것을 가리켜서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인다'고 말한 것입니다. 즉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은 성령의 능력이며 성령의 일이지 우리가 해야 할 일로 부여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그럼 우리는 몸의 행실을 죽이려고 할 필요도 없이 그냥 가만히 있으라는 말인가? 모든 것을 성령에게 맡기고 가만히 있으라는 말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겨야 할 문제이지만 성화는 전적으로 인간이 해야 할 부분이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은 성령의 일이지 우리의 일이 아니라는 것은, 성령의 일이니까 우리가 몸의 행실을 죽이지 못해도 우리 책임은 아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자는 그 능력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인간이 성령의 능력을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이 인간을 활용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성령이 임한 자에게서는 필히 몸의 행실, 즉 육신을 죽이는 모습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하나님의 자녀라면 성령의 생각으로 살아갈 것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성령의 생각에 지배당하고 살아간다면 그는 육신을 좇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영이 있는 신자는 얼마든지 몸의 행실을 죽인 모습을 나타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이 함께 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자연스런 현상입니다. 성령이 함께 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육신을 죽이는 쪽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앞세우며 스스로 몸의 행실을 죽이겠다고 나서는 자는 '죽여야지 죽여야지'하면서 행동에 대한 억제와 절제를 이끌어 내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이 하게 한 자는 '죽여야지'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와 희생을 생각하게 됩니다. 즉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기에 은혜를 모독하고 무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몸의 행실을 죽이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몸의 행실이라고 해서 나쁜 행동이나 비신앙적인 행동을 말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몸의 행실은 하나님이 없는 모든 것을 가리켜서 하는 말입니다. 생각 하나까지라도 하나님이 없이 육신을 의지하는 생각이라면 그것이 곧 몸의 행실입니다. 생각을 했다는 것도 이미 행동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세상에서 자신의 가치가 하락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실천을 억제할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음욕도 이미 간음한 것으로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이 없이 사는 자입니다. 육신을 의지하고 자신에게 유리하고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만 생각하고 움직입니다. 그러나 믿는 자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살아가게 됩니다. 모든 생각과 행동이 자기보다는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는 데 유익한 쪽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이미 몸의 행실이 영에 의해서 죽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 받고 사는 것이며, 그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인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죽이기 위해서 오십니다. 육신을 죽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게 하기 위해서 오십니다. 따라서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서 남을 무시하거나, 자신의 고집을 내세우거나, 자신을 자랑한다면 그것은 절대로 성령이 아닙니다. 성령은 오히려 그러한 것을 죽이기 위해서 오신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성령에 의해서 새로운 생각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에, 오직 예수님에게만 모든 가치와 의미를 두고 살게 되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몸의 행실을 죽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언제나 자신이 사는 길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