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8:15 양자의 영

성경은 '누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라는 물음에 대해서 분명하게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 받는 그들'이라는 답을 내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되는 조건에 더 이상 관심을 두거나 다른 것을 첨가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 받는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가에 관심을 기울이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 즉 성령으로 인도함 받는다고 할 때 많은 사람들은 신비한 경험쪽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성령은 보이지 않는 영이고, 그 영이 우리를 인도한다면 분명 뭔가 신비한 방법으로 인도할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 음성을 들었다느니 환상을 봤다느니 꿈에 뭘 봤다느니 하면서 그것을 성령이 인도하는 것으로 생각해 버립니다. 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성령의 인도를 자기 주관적으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가령 성경을 보면 뭔가 마음에 끌리는 구절이 있으면 그 구절이 바로 그 순간 성령이 나를 인도하는 구절이라고 여깁니다. 또는 '오늘 내가 외출하기 싫어서 집에 있었더니 목사님이 심방을 왔다. 성령님이 인도하셨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내가 기도해 보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라는 것들이 바로 성령의 인도를 자기 주관으로 판단하는 모습들입니다.

기도해 보니까 아니더라고 할 때 과연 무슨 음성을 들은 것입니까? 기도하는 그 사람에게 따로 하나님이 무슨 계시를 주신 것입니까? 그런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성령의 인도를 자기 주관적으로 멋대로 해석을 해버립니다. 자기 욕망에 의해서 마음이 움직인다는 것은 까맣게 모른 채 내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성령의 인도라고 생각하는 무지한 모습들이 난무하는 것이 오늘날 교회입니다.

성령의 인도란 육신을 죽이는 쪽으로 가지 않으면 가짜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육신을 부인하게 하고 그리스도로 인도하기 위해서 오신 보혜사이기 때문입니다.

자식의 진로를 위해서 기도할 때 성공적인 진로를 예시해주는 것이 성령의 인도하심이 아니라 자식의 진로에 매어 있는 부모의 욕망을 책망하고 자식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고 그리스도에게 모든 기대를 걸게 하는 것이 성령의 인도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령의 인도를 강제적인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죄짓는 쪽으로 가고 싶어서 안달인데 성령이 강제적으로 내 몸을 죄에서 벗어나는 쪽으로 끌고 간다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일부 사람들은 '성령이 하신다'라고 하니까 '그렇다면 나는 아무렇게나 해도 성령이 책임지겠네'라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은 우리를 강제적으로 끌고 가신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과 사고자체를 바꾸신다는 것입니다. 즉 성령이 오심으로서 무엇이 죄악된 것이고 죄의 결과가 무엇인가를 바로 깨닫게 하셔서 죄를 해결하러 오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변화된 인간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봄으로서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만이 인생에 최고로 가치 있는 것임을 알게 하시고, 그럼으로써 자연히 육신을 죽이고 세상에 미련 두지 아니하고 최고의 가치 있는 분을 스스로 좇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좇아가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따라가게 되고 자연히 그 속에서 사랑과 봉사와 섬김과 헌신을 추구하는 모습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비록 자신에게서 사랑과 헌신과 섬김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자신에게 있어야 할 당연한 모습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래서 자랑을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이 성령의 인도하심이며, 이러한 인도로 살아가는 신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일컬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가 조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자기 구원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구원을 확인하고자 하는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기 구원을 확인함으로써 의심 없이 흔들림이 없이 신앙생활을 하고 싶다는 의도라는 것은 알지만, 인간이 자기 구원을 확인하는 쪽으로 눈을 돌리면 필히 자기 행위를 들여다 볼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의 인도는 자기 육신을 부인하는 쪽으로 나아간다고 할 때, '그러면 나에게 내 육신을 부인하는 모습이 있는가?'를 확인하려고 할 것이고, 그런 흔적이 보여질 때 '나는 성령의 인도를 받는 하나님의 자녀이구나'라는 안도감을 가집니다. 그런데 정작 자기 구원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 육신을 벗어나지 못한 모습이라는 것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하나님의 일에 대한 결과이지 우리 행위의 결과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하신 일을 바라보고 그것으로 감사하고 기뻐하고 살아가면 그것이 곧 구원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이것이 구원받은 자의 모습이다'는 말을 여러번 했지만, 사실 그 말을 할 때마다 한가지 염려가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말한 것을 토대로 해서 또 다시 자기 구원을 확인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신자는 하나님이 하신 일로 기뻐하는 사람이지 자기 구원의 확신으로 기뻐하는 자가 아닙니다. 이것도 역시 성령의 인도함이 아니라 자기 욕망으로 사는 자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15절에 보면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부를 때 아버지에게 허락을 받고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또 자신이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아버지를 부르지도 않습니다. 이미 아들과 아버지는 부자지간의 관계 속에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신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신자가 자신에게서 하나님의 아들다운 모습을 찾아내어 그것을 근거로 해서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인하고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것은, 관계가 이미 이루어졌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신자 역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이미 이루진 상태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관계가 완성되었습니다. 따라서 신자는 그 어떤 두려움도 없이 자신에게서 아들의 자격을 찾을 필요가 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이 관계를 증거하고 보증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이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알게 되고 두려움 없이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15절에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라는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할 수 없는 것이 신자라는 것입니다. '내가 이런 죄를 지었는데 혹시 지옥 가는 것은 아닌가?' 이런 두려움은 아버지의 사랑을 보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이 함께 한 모습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그 어떤 죄와 허물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핑계삼아서 아들의 관계를 끊지 않습니다. 신자는 그리스도로 인해서 낳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허물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안심하고 마음대로 죄짓고 살아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자녀다운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이 간섭하시고 인도하시고 지키십니다. 때로는 징계하시고 책망하시면서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자녀가 아니라면 이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히 12:8절에 보면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 양자의 영을 받은 신자는 징계까지도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들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묵인하시고 허허 웃으면서 넘어가신다는 것으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아들이기 때문에 이제는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모두 다 들어주신다는 것으로도 생각하지 마십시오. 현대인의 특징은 갈수록 자기를 주장하는데 있습니다. 남자나 여자들이 배우자를 고를 때 가장 많이 말하는 것이 '이해심이 많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뭘 해도 이해하고 넘어가 주는 배우자를 원하는 것입니다. 내가 잘했고 잘못했고를 따지지 말고 무조건 이해하고 넘어가 달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으로 하나님을 생각하기 때문에 아들이라는 것도 '아들이니까 너를 도와주시겠지'라는 차원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닮은 자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세상에 선포하는 것이 아들이지, 아들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면서 일 처리를 해주는 아버지는 아닙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마음을 벗어날 때는 언제든지 책망하시고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부르며 사십시오. 그러나 아버지의 마음을 닮고 아버지의 뜻을 드러내는 아들답게 살게 해달라고 부르십시오. 아버지를 사랑하신다면 아버지의 마음을 거스르는 자신을 치면서 아버지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그가 바로 양자의 영으로 인도 받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