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8:16-17 성령의 증거

'성령이 일하신다'는 말은 인간으로 하여금 무사 안일함을 조장하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성령께 맡기자'는 말이나 '하나님께 맡기자'는 말을 의도적으로 회피하려는 경향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맡기는 것도 우리가 하다가 할 수 없는 것을 맡겨야지 우리가 충분히 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께 맡깁니다'고 하고 손놓고 있으면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회피한게 된다는 것입니다. 뭔가 그럴듯한 논리로 들려질 수 있지만, 사실 이런 사고방식은 하나님을 전혀 믿지 않고 인간의 힘으로 해보겠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령이 오셨다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안된다는 것을 전제하는 말입니다. 고후 1:21-22절을 보면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후사로 하나님이 자녀로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보증으로 성령을 주셨습니다. 보증으로 성령을 주셨다는 것은 '너희는 믿지 못하겠다'는 뜻입니다. 마치 은행에서 돈을 대출 받을 때 돈 있는 자를 보증인으로 내세우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은행에서 돈 있는 자를 보증인으로 내세우라는 것은 '당신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안될 때 당신의 돈을 갚을 능력이 있는 자를 보증인으로 세우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에게 시켜보고 우리가 안될 때 성령으로 하게 하시겠다는 의미로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인간은 시켜보고 자시고 할 것이 없습니다. 이미 창세기부터 드러나는 인간의 모습은 한마디로 말해서 '인간은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드러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역사 앞에서 '우리는 안된다'는 것을 배워야지 '할 수 있다. 시켜만 주십시오 해보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성경을 무시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나 이스라엘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곧 저와 여러분의 실패입니다. 그 실패를 보여주심으로서 결국 성령을 보내실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보내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약속된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서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구원이 우리의 힘씀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굳게 붙드심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아직 구원을 받지 못했는데 차츰 차츰 구원이 완성되어 간다는 뜻이 아니라 성령이 오심으로 이미 구원받은 자이지만, 구원받은 자 즉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녀답게 살아가도록 하시는 것이 성령이 하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을 보내신 것은 우리를 그리스도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실패하지 않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보증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성령이 오셨다는 것으로 두려움이 없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의 실패가 하나님의 약속을 실패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성령님으로 더불어 우리를 지키시고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음놓고 성령을 믿고 실패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인간은 실패하려고 해서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구원에 대해서는 실패한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을 핑계 삼아서 자신의 실패를 즐긴다든지 실패에 대해서 안심을 한다면 그것은 성령님이 함께 한 모습이 결코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인간의 실패 속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우리를 성공의 자리로 인도하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함께 한 하나님의 자녀에게서는 필히 그 증거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16절에 보면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성령이 친히 증거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신자된 자에게서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성령의 증거가 보여져야 한다는 뜻이 됩니다.

9절과 14절을 말씀드릴 때 신자는 성령이 있는 자이고, 성령이 있다는 증거는 자기 육신을 부인하는 쪽으로 인도함 받는 것임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16절에서 성령이 친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한다는 말씀은 좀 더 구체적으로 성령께서 신자를 어떤 모습으로 세상에 세우시는가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지난번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성령의 증거라는 것을 체험적으로 경험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그 무엇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방언을 한다든지, 병을 고친다든지, 이상한 꿈을 꾼다든지, 몰랐던 성경이 깨달아진다든지, 이렇게 자기 체험을 통해서 성령의 증거가 나타난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령을 체험이라는 울타리 안에 가두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체험이 없다고 해서 성령의 증거가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또 어떤 체험을 했다고 해서 그것을 성령의 증거로 생각해서도 안됩니다. 무슨 체험을 하든 하지 않든 결국 모든 것은 하나를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17절에 나옵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는 이 말씀이 성령의 증거가 무엇으로 나타나는가에 대한 답을 명확하게 내리고 있습니다.

17절을 보면 자녀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설명을 합니다. 자녀란 곧 후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후사이고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자녀입니다. 자녀라고 해서 하늘의 것을 누리는 영광만을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이 땅에서의 진정한 자녀의 의미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고난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라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을 함께 걸어가는 후사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후사입니다. 그분과 함께 한 후사라면 그분이 가신 길은 곧 오늘날 우리들이 가는 길이 되어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 길은 '고난'입니다.

따라서 성령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하실 때 그 증거물은 고난으로 드러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체험을 증거로 생각해 버리면 결국 모든 신자에게서 성령의 증거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증거를 받지 못한 신자도 있을 수 있습니다. 엡 4:4절에서는 성령이 하나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모든 신자에게 함께 하는 성령님은 한분이시고 같은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때문에 성령님의 증거가 각각 다르게 나타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신자에게서 공통적으로 보여져야하는 증거이기에 자기 체험을 성령의 증거로 내세울 수 없는 것입니다.

마 3장에 보면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나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예수님의 위에 임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힘이 부족해서 성령님을 보내심으로 힘을 보태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성령 받았다는 것은 연약한 신자에게 힘을 부여해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에게 성령이 임하신 것은, 이제 앞으로 예수님의 모든 것은 성령님의 인도를 따르는 것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모든 사역은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임을 말해주는 것이 예수님에게 성령이 임한 사건입니다. 그래서 마 4장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것도 '성령에게 이끌리어'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셨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성령에 이끌렸다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계획된 삶에 들어간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고난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라면 결국 그리스도의 고난이 자녀된 신자의 삶을 채운 채 나타나게 되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이끄신 성령님이 오늘 하나님의 자녀를 이끄신다면 결국 그리스도가 가신 고난으로 이끌어 가실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성령이 증거 하실 때 그 증거는 신자의 삶을 그리스도의 삶으로 채움으로서 드러납니다. 결국 내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 성령의 증거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삶이 예수님의 삶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한 후사를 통해서 계속 이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으로 채우라고 하니까, 예수님이 병고치고, 귀신 쫓아내고, 매맞고, 창에 찔리고 죽은 외형적인 것을 채우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삶의 원리가 우리 속에 채워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 원리가 곧 고난입니다. 예수님의 삶과 신자의 삶의 차이는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오는 차이가 아니라 원리가 다르기 때문에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즉 세상의 삶의 원리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삶의 원리로 채워진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이 성령의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고생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고생으로 생각하게 되면 '우리도 고난받자'라고 하게 됩니다. 고난을 착한 일을 하는 고생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 고생을 내보이면서 사랑했다고 하고 희생했다고 하면서 설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삶을 그리스도의 삶의 원리로 채우시기 위해서 일하십니다.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의 원리를 따라가는 삶이기에 그 자체가 고난입니다. 그리스도의 원리를 따라가기에 육신의 이익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