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8:17-18 현재의 고난

신앙생활은 어떤 감동이나 극적인 체험이나 열정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그냥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내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인내란 고생을 참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미래에 대한 약속 하나 바라보고 눈에 보이는 뚜렷한 흔적도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야 하기 때문에 인내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이 힘들어하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마라톤을 하는데 길가에 사람들이 늘어서서 태극기를 흔들며 환호를 하고 TV로 달리는 모습을 중계해주는 사람하고, 아무도 지켜봐 주고 환호하고 잘한다고 칭찬해주는 사람도 없이 오직 홀로 달리는 사람하고 과연 누가 더 달리기에 쉽겠습니까? 당연히 많은 사람이 환호해주는 가운데 달리는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이 환호하는 가운데 비록 고생은 하지만 내가 달린다는 것에 대해서 힘이 나고 자부심이 생기고 보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환호하는 사람이 없다면 홀로 외로움과 싸우면서 달려야 하는 의미와 보람과 자부심을 주위 사람들을 통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얻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이 바로 그와 같습니다. 신앙생활은 많은 사람이 환호하는 가운데 달리는 것이 아닙니다. 칭찬이 있고 자신이 신앙생활하는 보람을 환경 속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박수를 받으면서 환호성을 들으면서 가는 길이 아니라 박수도 없고 환호도 없이 외롭게 하루하루를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내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견디지 못한 사람들이 환호가 있고 박수가 있고 칭찬이 있고 보람이 있는 신앙의 길을 찾아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인은 다만 마지막의 결승점을 바라보고 달릴 뿐입니다. 주위의 환호와 박수와 칭찬을 힘입어 달리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결승점이 나를 끌어당기기 때문에 그저 묵묵히 달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히 12:1-2절에 보면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누구입니까? 세상을 믿음으로 이겨낸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이사야 다니엘 등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약속 하나 바라보고 얼마든지 세상에서 죽을 수가 있었습니다. 이들이 바로 우리의 증인으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우리 앞서서 이미 약속만을 바라보고 홀로 외롭게 세상을 승리한 자들이 우리의 증인으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인에게 힘은 현재 내 주위를 둘러싼 환호성과 박수소리가 아니라 이미 내 앞서서 약속을 바라보고 세상을 살았던 신앙인들입니다.

18절에 보면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말씀합니다. 현재가 극복되어질 수 있는 것은 장차 나타날 영광을 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말씀드린 대로 우리에게는 사람들의 환호성과 박수 소리를 들으면서 달리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아무리 하늘 나라에서 영광이 크고 칭찬을 듣는다고 해도, 역시 매력이 있는 것은 현재 달리면서 환호성과 박수를 받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의 환호와 박수가 없는 길은 가지 않으려고 하게 됩니다.

그러나 과연 예수님은 어떠한 삶을 사셨습니까? 메시야로서 사람들의 환호와 박수를 받으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물론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는 많은 사람들의 환호와 박수 속에 들어오셨습니다. 그러나 그 박수와 환호는 십자가를 지는 예수님에 대한 환호가 아니라 자기들의 삶을 풍족하게 해 줄 메시야에 대한 환호였습니다. 힘있는 자, 능력이 있는 자, 기적을 일으키는 자에 대한 환호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게 되자 환호는 오히려 비난과 욕설로 바뀌어져서 예수님에게 쏟아졌습니다.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환호와 박수의 길을 마다하셨습니까? 그것은 환호와 박수를 바라보고 사신 것이 아니라 하늘의 즐거움을 바라보고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난과 욕설 속에서도 십자가를 참으신 것입니다(히 12:1-2). 이것이 주님의 삶이었다면 신자의 삶도 역시 이 원칙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지난 시간에 신자의 삶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진 삶이기 때문에 삶의 내용물은 우리가 채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채우십니다. 즉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의 모습을 우리 멋대로 끄집어 낼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의 삶의 기준과 원칙이 우리에게 적용이 되어야 하고 영향을 주어야 하고 실천이 되어질 때 예수님을 따라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삶이 기준이 되어서 우리에게 적용될 때 그것을 가지고 '고난'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현재의 고난'이라고 말씀합니다. 과거에 있었던 고난도 아니고 미래에 있을 고난도 아니고 지금 내가 숨쉬고 있는 지금 현재의 고난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분명히 짚고 넘어갈 것은 지금 나의 현재의 고난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지금 나에게 있는 현재의 고난을 모르고서는 18절의 말씀은 여러분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씀이 되고 맙니다. 다만 장차 우리에게 고난이 올 때 나중에 있을 영광을 생각하고 이기자는 권면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하지만 본문은 나중의 고난을 미리 대비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현재의 고난입니다. 오늘의 고난입니다. 그런데 지금 내가 어떤 고난을 받고 있는지 아리송해 한다면 본문은 아무런 의미 없는 말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또 과거에 고난을 당할 때 천국을 생각하면서 이겼던 옛 시절을 생각하면서 추억에 잠기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옛날에는 믿음이 좋았는데 지금은 옛날 믿음이 없다고 하면서 회상에 잠기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과거와 미래를 전혀 떠나버린 오직 현재의 고난을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현재의 고난은 오늘 나의 삶에 예수님의 삶의 원칙과 기준이 적용되어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삶의 원칙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공생애에 가장 먼저 있었던 사건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이 예수님을 이끌었던 가장 첫 번째의 일은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세 가지의 유혹을 받습니다. 그 유혹들은 하나 같이 세상의 기존 세력에 대해서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것입니다. 즉 세상의 세력과 단절이 아니라 함께 질서를 이루어 갈 것을 요구하는 유혹이었습니다. 마귀가 예수님에게 한 요구는 '우리의 질서에 맞게 처신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마귀가 요구한 질서는 세 가지로 나타납니다. 첫 번째는 돌을 떡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떡이었습니다. 즉 경제적인 문제입니다. 마귀의 지배 아래 있는 세상의 질서와 체제는 떡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내 배부름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배불러야 살 수 있고 배부르기 위해서는 떡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경제체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유혹에 대해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4)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의 삶의 원리는 떡이 아니라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떡이 있어야 살 수 있다는 질서로 살아가는 세상에 떡이 아니라 말씀으로 산다는 전혀 다른 질서를 말씀하셨기 때문에 고난을 받게 된 것입니다.

두 번째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도 천사들이 지켜줘서 다치지 않는다는 유혹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유혹에 대해서 "주 너희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마 4:7)고 말씀합니다. 두 번째 유혹은 하나님을 세상에서의 기적과 환경을 통해서 확인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가지고 있는 신에 대한 상식은 신은 우리를 지키시고 돌보신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어떤 일이 있다고 해도 신이 그 일을 해결해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확인하고자 할 때 모든 기준을 자기에게 두는 것입니다. 자신의 일을 해결해주고, 높은 데서 떨어졌는데도 다치지 않는 기적과 같은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확인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냥 믿어지는 것이지 나에게 발생한 여러 가지 일들을 통해서 확인하고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설사 사업이 망하고 사고가 나서 죽는다고 해도 그냥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죽으시면서도 '내가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 맞습니까?'라는 의문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뜻이기에 순종할 뿐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천하만국과 영광을 보여주면서 나에게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겠다는 유혹입니다. 이 유혹에 대해서 예수님은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은 오직 자기 영광을 위해서 삽니다. 자기 이름을 높이고 세상으로부터 환호와 박수 받기를 원하며 살아갑니다. 신을 찾는 것도 결국 자기 이름을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예수님은 내 이름이나 영광은 관심 없고 오직 하나님만 경배할 뿐이라고 말씀합니다. 즉 자기 이름을 높이고 자기 영광에 관심 두지 말고 하나님께 굴복하고 하나님만 섬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의 원칙은 이름이 유명하느냐 유명하지 않느냐 세상 것을 얼마나 가졌느냐 못가졌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현재의 자리에서 오직 하나님만 섬기고 있는가를 중요하게 여기셨던 것입니다.

마귀의 유혹은 지금 세상의 질서와 체제에 합류하라는 것입니다. 돈을 위해 존재하는 메시야, 눈에 보이는 확실한 증거를 제시해 주는 메시야, 자기 영광과 이름을 위해서 존재하는 메시야, 이런 메시야로 세상 속에 존재하기를 유혹했습니다. 분명 이러한 메시야는 세상으로부터 환호와 박수를 받는 메시야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철저하게 기존의 세상의 질서와 체제에 대하여 단절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래서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17절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를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의 증거는 고난인데, 그 고난이란 몸이 고생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가신 삶의 원칙을 따라가게 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유혹 속에 있는 것을 고난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삶의 원칙을 따라가지 않는 신자는 그리스도와 같은 유혹이 없습니다. 이미 세상의 질서와 원칙에 순응한 삶이기 때문에 배부름을 위해 사는 것, 말씀을 눈으로 확인하고자 하는 것, 자기 이름과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됩니다. 때문에 유혹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배부름을 위해서 사는데 배부름이 유혹으로 다가오겠습니까? 그러나 그리스도의 삶의 원칙을 따라가게 된 하나님의 자녀는 배부름을 살고자 하고, 말씀이 실제 자기 삶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증거물로 나타나기를 원하는 유혹을 받게 되고, 모든 사람들의 환호와 박수 속에서 자기 이름이 높여지고 영광을 받고자하는 유혹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한 고난입니다. 이 유혹을 우리가 이길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말씀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혹을 이겼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유혹이 있을 때 예수님을 생각하고, 우리를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의 삶을 생각함으로서 유혹을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배부른 것이 장차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내가 내 배부름을 위해서 살수 있는가?'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고난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현재의 고난이 있는지를 살펴보십시오. 이런 고난이 없다면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라고 하기에 곤란하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이 고난으로 채워가실 것이고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라면 필히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고난의 삶의 원칙을 따라갈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