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은 기다림입니다. 몸을 담고 살아가는 세상에서 어떤 열매를 얻는 것이 아니라 장차 주어질 열매를 바라보고 기다리는 것이 세상에서의 삶입니다. 그래서 인내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기다림도 수시로 눈에 보이는 것으로 확신을 심어 주면서 기다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의심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조용하고 밋밋한 가운데서 오직 '인내하라'는 그 말씀만이 우리를 붙들 뿐입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우리를 참지 못하게 만듭니다. 여러분도 기다린다는 것은 싫어하실 것입니다. 약속 시간을 정해 놓고 기다린다면 몰라도 '갈 테니까 기다려라'는 말 한마디로 무작정 기다린다는 것은 진짜 참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다리는 동안 지루한 시간을 무엇으로 메울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다방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릴 때 지루함을 이기기 위해서 하다 못해 성냥 쌓기라도 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냥 기다리지 못하고 기다리는 동안 뭘 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사람들이 하고 있는 종교 생활입니다.
예수님이 오실 날을 기다려라고 하니까 '기다리는 동안 뭘 할까요?'를 묻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으면 예수님이 오셔서 칭찬하시겠는가?'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간다 기다려라'고만 하셨을 뿐이지 '내가 가는 동안 이것을 하고 있어라'는 말씀을 하지 않았습니다. 있다면 '증인되리라'는 것뿐입니다. 즉 네가 할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는 다만 내 올 날을 기다리고 살아가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참으로 힘들게 하는 것입니다. 기다리는 동안 뭘 하라고 했으면 차라리 덜 힘들텐데 하라는 것 없이 무작정 기다리라고만 하니까 기다리는 시간을 무엇으로 때울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다리는 동안 무엇을 해야 예수님에게 칭찬을 받고 많은 상을 받을까라는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신앙은 기다리는 것입니다. 장차 올 영광을 기다리고 사는 것이 신앙입니다. 장차 올 영광을 기다린다는 것은 세상을 나그네로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갈 곳을 바라보고 가게 될 그 날을 기다리며 사는 사람이라면 현재 내가 발붙이고 있는 그 땅을 자신이 거할 땅으로는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신자는 기다리는 자와 기다리지 않는 자로 구분됩니다. 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재림을 말하면서도 재림과 상관이 없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은, 세상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누군가와 약속을 해놓고 그 사람을 기다리면서 하고 있는 일에 푹빠져 버린 채 그 즐거움에 파묻혀서 내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오늘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18절에 보면 장차 나타날 영광을 말합니다. 신자는 장차 나타날 영광을 기다리는 자입니다. 또 21절에 보면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고 말씀하면서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을 기다리는 것을 말씀합니다. 23절에서도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고 말씀하면서 신자를 기다리고 있는 존재로 표현합니다.
기다림은 신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도 해당되는 일입니다. 피조물들이 어떤 감각을 가지고 생각하면서 기다린다는 것이 아니라, 온 우주 만물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새하늘과 새 땅을 이루실 하나님의 계획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과연 기다리며 사십니까? '어떻게 한평생을 영광의 날만 기다리며 살 수 있느냐?'고 하지 마십시오. 노아를 보면 그는 500세가 된 후에 홍수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그 기간이 일 이년이 아닙니다.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에 홍수가 났으니까 자그마치 100년 가까이 방주를 만들면서 살았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사는 것보다 더 많은 세월을 심판의 날을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기다림의 삶입니까? 그것은 앞서 말한 대로 기다리는 동안 하고 있는 일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하지말고 기다리라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면서 기다려도 좋지만 그 일에 빠져서 내가 누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다면 그것이 바로 심판 받을 자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역시 무엇을 하고 살아도 좋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기다리는 동안 세상에서 하고 있는 일에 빠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누구를 기다리고 있고 무엇을 바라고 살고 있는 자인가를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세상일에 빠졌다는 증거는 하나님 앞에 나와서 세상 것을 위해서 간구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영광의 날을 기다리는 자로서 그 날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 기다리는 장소에 지나지 않는 세상의 일을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이 바로 세상을 사랑하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21절에 보면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온 세상은 하나님은 저주 아래 있습니다. 이것은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인간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온 우주까지도 그 저주에서 벗어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세상은 하나님이 이미 포기한 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저주 아래 있는 세상에 희망 두지 말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세상은 탄식할 수밖에 없는 땅입니다. 신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세상은 탄식과 괴로움과 고통이 기다리고 있는 현장입니다. 그러면서도 세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탄식과 괴로움의 현장으로 뛰어들어가야 하는 것은 세상말고는 달리 피난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상 속에서 피난처를 찾습니다. 남자들이 찌들린 직장 생활에서 가정을 피난처로 여기기도 하지만, 가정이 그 역할을 제대로 못할 때 다른 것을 통해서 피난처로 삼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술집을 전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피난처를 찾고자 하나 피난처가 없는 것이 세상의 현실이며 이것이 세상 사람들에게 탄식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어디를 가도 탄식이 기다리고 괴로움이 기다립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온전한 피난처가 무엇이겠습니까? 아무데도 없습니다. 세상은 저주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마 11:28절에 보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세상 속에서 쉼터가 되어주시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즉 세상에 의한 탄식과 괴로움을 없애주겠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떠나서 예수께로 나오는 것이 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다린다는 것에는 '세상을 떠난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육신이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의 탄식과 괴로움을 통해서 더욱 더 몸의 구속을 기다리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희망을 세상에 두고 사는 것이 아니라 본문에서처럼 장차 나타날 영광에 두고, 몸의 구속에 두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신자들이 세상에서의 탄식과 한숨을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다림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단지 잠시 기다리고 있는 장소인 세상에 모든 삶의 목적을 둬버리는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삶이 전부고 천국은 보너스로 여깁니다. 그러나 신자에게 있어서는 천국이 전부이고 세상의 삶은 잠시 머무르는 장소에 지나지 않습니다.
24,25절을 보면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고 합니다. 기다림이란 나의 소망이 기다리고 있는 대상을 향해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신자의 소망이라는 것이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눈에 보이는 세상 것이 유혹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그래서 인내하고 참으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기다리는 분은 아직 오시지 않습니다. 내 앞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다리는 동안 성냥 쌓기를 합니다. 그런데 성냥 쌓기가 즐거움을 줍니다. 즉 기다리는 동안 나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은 기다리고 있는 대상이 아니라 내가 직접 보고 있고 체험하고 있는 성냥 쌓기가 되버립니다. 그래서 성냥 쌓기라는 놀이에 빠지게 됩니다.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도 잊어버립니다. 좀 더 높이 쌓고 멋있게 쌓는 것에만 관심을 두게 됩니다. 기다리는 분은 올 때가 되면 오겠지라는 생각을 가집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현실이 아니겠습니까?
세상이 우리의 전부가 아닙니다. 세상은 저주 아래 있을 뿐입니다. 우리에게 소망은 장차 주어질 영광, 몸의 구속입니다. 이 날을 기다리며 사는 신자는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