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8:23-25 소망

지난 시간에 신앙은 기다림이란 말을 했습니다. 이런 말을 하면 '뭔가 확실한 것을 알아야 기다릴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확실한 실체를 알려달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천국을 기다린다면 천국이 있다는 확실한 증거를 봐야 기다릴 수 있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천국이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생겼는지 확실한 실체를 안다면 능히 기다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천국을 기다리는 삶을 살게 하시는 것은, 세상에 대해서 '세상은 떠나야 할 곳'임을 보여주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신자를 천국 보내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라 천국을 기다리는 신자를 통해서 세상은 심판을 받아야 하고 망해야 할 곳임을 증거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항상 자신을 기준으로 해서 생각을 하고 판단을 합니다. 하나님을 기준으로 해서 생각하고 판단하려고 하는 의도가 전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국의 실체에 대해서 확실히 알려달라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를 천국 보내시겠다는 것인지 그 이유를 모릅니다. 단지 '내가 예수님을 믿으니까 그 믿음의 대가로 천국 보내신다'는 것으로만 여겨버립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생각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한 하나님'을 생각하기 때문에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왜 천국을 기다려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습니다.

신자는 천국의 실체에 대해서 알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의 실체와 모양을 전하는 것이 신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반대는 세상입니다. 천국 간다는 것은 곧 세상을 떠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천국이 있다는 것은 곧 세상은 아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천국을 기다리라는 것은 세상에 소망을 두지 말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신자는 천국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나는 세상을 떠나서 천국갈 자다'는 것을 확실히 하며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천국을 확실하게 믿기 위해서 천국의 실체를 알고 싶다는 것은 결국 자기 이해력과 지식을 가지고 스스로 천국에 대해서 확신하고 그 확신을 가지고 믿어보겠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내가 이해하고 내가 확신해서 믿는 것은 자기 지식으로 천국을 선택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실 인간에게 천국의 실체를 말해줬다고 해서 인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천국에 대한 모든 것은 나중에 가게 되면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인데 지금부터 서두를 필요가 있겠습니까? 물론 볼 수 없는 천국에 대해서 확실하게 알고 싶어하는 그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러나 우리가 숨을 쉬며 살아가고 있는 이유는 다른 것에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신자는 성경이 나타내는 대로만 천국을 알고 있으면 됩니다. 우리의 호기심을 가지고 성경을 대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맹목적이라고 하기도 하고 어리석다고 하기도 합니다. 도대체 보이지도 않고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천국 때문에 평생을 예수에 매어서 살아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말이 세상적으로는 타당할지 몰라도 이미 성령에 사로 잡혀서 그리스도를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처럼 어리석은 말도 없을 것입니다. 들어도 들을 수 없는 자들에게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그저 신자는 하나님이 나를 세상에 보내신 계획과 목적에 따라서 살아갈 뿐입니다. 그러다가 할 일이 다 끝나면 죽으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최고의 삶입니다.

신자란 천국이 어떻게 생겼는가를 묻는 자가 아니라 '내가 과연 천국사람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는가?'를 점검하며 살아가는 자입니다.

예를 들어서 용인에 있는 삼성 에버랜드에서 이러이러한 사람은 공짜로 들어보내준다고 했을 때, 무엇을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까? '내가 삼성에버랜드가 말한 그런 자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옳지 '에버랜드 들어가서 뭘 타고 놀지? 뭐가 재미있지?'를 생각한다면 그것은 순서가 잘못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먼저 '내가 에버랜드가 공짜로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한 그런 자인가?'를 점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공짜로 들어갈 수 있는 자인가를 묻는 것이 중요하지 들어가서 놀 생각만 하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은혜로 들어가는 곳입니다. 공짜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공짜라고 해서 아무나 들여 보내는 곳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은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준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린양의 피입니다. 천국에 합당한 자만 들여보내시는데 그 합당한 자란 어린양의 피의 흔적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천국이 어떤 곳인가가 아니라 '나는 과연 어린양의 피의 흔적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천국의 실체에 대해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천국에 들어갈 자인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3절에 보면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고 말합니다. 성령을 받은 신자는 기다리는 자입니다. 무엇을 기다리는가 하면 몸의 구속입니다. 그냥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탄식을 하면서 양자될 것, 즉 몸의 구속을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탄식을 하면서 기다린다는 것은 아주 강한 기다림을 의미합니다. 탄식이란 현재에 대한 부정을 의미합니다.

17절에 보면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에 대해서 말합니다. 이것은 영광을 받기 위한 조건이 고난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성령이 함께한 자인데, 성령이 함께한 자라면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고, 그리스도를 죽인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삶을 산다는 것 자체가 이미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삶의 원칙을 따라가게 됨으로서 세상이 왜 악한가를 알게 되고, 그로 인해서 탄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세상에 대해 탄식하며 사느냐는 것입니다. 나 자신에 대해서 탄식하며 사느냐는 것입니다. 천국이 어떻게 생겼는가를 묻기 전에 먼저 이것을 물어야 할 것입니다.

탄식을 한다는 것은 '세상은 아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소망둘 곳이 없기 때문에 탄식하게 되고, 때문에 자연히 세상을 벗어나서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갈 몸의 구속을 기다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갈망이 우리에게 있느냐는 것입니다. 돈이 없어서 탄식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남들처럼 편하게 잘살지 못해서 탄식이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자식이 공부를 못해서 나오는 탄식도 아닙니다. 그러한 탄식은 세상에 집착하고 있는 자신을 드러내는 것일 뿐입니다. 세상이 나에게 맞지 않기 때문에 나오는 탄식입니다.

신자는 하나님 나라 백성입니다. 하늘 나라에서 살아야 할 자들이 세상에 와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내 나라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세상은 나하고는 안맞는다는 느낌이 있어야 합니다. 나하고 맞지 않기 때문에 나오는 탄식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늘나라 사고방식을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신자가 세상을 살면서 세상이 나에게 잘맞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자는 세상이 체질이 아니라 하늘나라가 체질인 사람들입니다. 하늘나라에서 살아야 마음이 편할 사람들이 세상에 와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고난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탄식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탄식하면서 하루속히 내 체질인 하늘나라로 가고 싶다는 갈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세상을 사는데 전혀 불편이 없고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늘나라 체질을 벗고 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체질에 적응된 삶을 살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전혀 걸림돌이 안되고 탄식도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몸의 구속을 기다리는 갈망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천국이 어떻게 생겼느냐는 호기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을 돈이라고 생각합니다. 먹기 위해서 공부시키기 위해서 편하게 살기 위해서 돈은 필수적입니다. 돈이 없으면 자신이 가졌던 모든 꿈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는 천국에 대한 문제보다는 돈 문제가 더 급한 것입니다. 이런 삶에 탄식이 없는 것은 당연하고 기다림도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 공중의 새도 하나님이 기르시고 들의 백합화도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이 살리신다는 믿음이 아니라 내가 노력하고 땀흘리는 것만큼 내 손에 쥐어지는 것이 있다는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자에게 기다림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마음속에 기다리고 있는 것이 따로 존재하고 소망하는 것이 모두 세상에 있는 것들인데 보이지 않는 천국을 기다리겠습니까?

주위를 보면 온통 사람들이 기다리는 것은 돈입니다. 돈돈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세상입니다. 돈을 따라서 사람들이 움직입니다. 대학을 가도 장차 돈이 될 수 있는가를 생각합니다. 목사들이 교회를 선택해도 돈이 되는 교회인가를 보게 됩니다. TV에 '좋은 세상 만들기'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시골 농민들을 찾아가는 프로그램인데 온통 보이는 사람들은 노인들뿐입니다. 젊은 사람은 보이지 않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모두 돈을 따라서 도시로 가버렸기 때문입니다. 철의 장막이라고 불렸던 동독이 공산주의를 포기한 것도 돈 때문입니다. 소련도 역시 돈이 되는 자본주의를 받아들입니다. 단단하게 닫혀서 열리지도 않을 것 같은 북한이 금강산 관광사업을 허락을 하고 남한 사람을 들어오게 하는 것도 역시 돈 때문입니다. 세상이 돈에 의해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도 신자도 돈을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천국이, 영원한 생명이 돈 앞에서 별 것 아닌 것으로 취급받고 있습니다. 교회도 천국보다는 돈을 최고로 여깁니다. 돈이 있어야 선교를 하고 구제를 할 수 있다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도 교회에 돈 대주는 것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돈 되는 교인이 교인 취급받습니다. 이렇게 돈을 따라가는 세상에서 신자 역시 돈을 따라 산다면 탄식을 하며 몸의 구속을 기다리는 삶이 있겠습니까? 있다면 돈이 없는 것에 대한 탄식뿐일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 자신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세상에 대해서 탄식하면서 몸의 구속을 기다린 삶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어둠의 세상을 싫어하면서 하루속히 세상을 벗어나서 죄없는 나라에서 살고 싶은 갈망으로 살아가는지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양자 곧 몸의 구속을 기다린다고 말합니다. 양자란 아들 삼는 것입니다. 이것을 몸의 구속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아들 삼기 위해서 자기 아들을 희생했습니다. 우리를 구출하는 값으로 하나님 자신을 희생한 것입니다. 세상이 소망이 없는 곳이며 망할 것이라는 것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세상이 죽인 것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은 소망이 없는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 대해 탄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해 탄식하며 몸의 구속을 기다리는 그 기다림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다시 한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