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8:26-27 성령의 탄식

신자라고 이름하는 자들이, 그리고 신자들의 모임이라고 하는 교회가 하나님을 무시합니다. 예수님을 무시합니다. 성령님을 무시합니다. 그러면서도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산다고 합니다. 현 교회가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을 무시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각기 제 멋대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자기 마음내키는 대로 내 마음에 드는 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현 기독교의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보내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괜히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셨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은 왜 좋은 하늘을 버리시고 세상에 오셨습니까?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셔야 했습니까? 또 성령님은 왜 이 세상에 오셔야 하는 것입니까? 이 모두가 하늘의 일이며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성취된 일들입니다. 결국 지금까지의 세상은 하나님의 약속이란 틀 안에서 진행된 역사였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땅에서는 인간들이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와중에 하나님의 뜻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하나하나 이루어진 역사였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가지고 성령님이 오셨습니다. 지금 하나님은 모든 일에 손을 떼고 할 일없이 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변함 없이 약속이라는 틀 안에서 세상을 움직이고 계십니다. 결국 우리는 세상을 내 멋대로 살아왔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살아온 인생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된 모든 것이 우리의 삶에 하나님이 개입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가져야 할 생각은 무엇입니까? '나의 삶은 모두가 하나님에 의해서 다스림 받고 있다. 하나님이 나의 왕이시다'는 생각만큼은 철저하게 가지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신자는 항상 하나님께 물으면서 무엇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인가를 찾아가는 삶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신자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교인들에게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은 전혀 관심 밖입니다. 내 뜻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은 무시해 버립니다. 예수님이 지금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성령님이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하시는지 전혀 관심 없습니다. 다만 우리를 돕기 위해서 일하신다고만 여길 뿐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면 예수님이 달려와서 도와주고 성령님이 힘과 능력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을 통째로 무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살아가는 것, 이것이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사기21:25절에 보면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고 말씀합니다. 사사기의 마지막이 이 말씀으로 끝나는 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평가를 그 말씀 하나로 내리는 것입니다. 각각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속에서 여러 가지의 문제가 발생했던 것입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게 되는 것은 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다스리고 지배하는 왕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자기 생각할 때 옳다고 여겨지는 대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인들이 사사기의 이스라엘처럼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옳다고 하신 것을 옳은 것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에 옳다고 여겨지는 것을 옳은 것으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각에서 옳은 것이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을 무시해 버리는 것입니다. 인간이 옳고 그름의 판단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가 기준이기 때문에 자기에게 유리한 것을 옳은 것으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기 소견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자기에게 유리한쪽으로만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앙생활을 해도 하나님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합니다. 아무리 성경에서 말씀을 한다고 해도 자기 소견에 옳지 않은 것으로 판단되면 잘못된 해석이라고 하면서 밀쳐 버립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분명히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소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하나님의 소원은 묵살한 채 자기 소원을 들고 하나님을 찾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단지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시기 위해서 준비하고 계시는 분입니다. 마치 설날에 세배하러 온 손자들에게 줄 빳빳한 세뱃돈을 준비해 놓고 손자들이 절하로 오기를 기다리는 할아버지로 연상을 하는 것입니다. 복을 준비해 놓고 기도하러 나오기를 기다리는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기 위해서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소원을 위해서 일하시는 분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교회가 부흥하는 것입니까? 선교사가 많이 나와 가지고 전 세계에 복음이 들어가는 것입니까? 교회가 사회에서 착한 일을 많이 하는 것입니까? 그 어느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소원은 여러분이 주일성수하는 것도 아니고 기도 많이 하는 것도 아니고 십일조를 많이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한 것은 교회를 자기 소유로 여기는 거짓 목사들이 소원하는 것들이지 절대로 하나님의 소원이 아닙니다. 성경 어디에 그러한 것들이 하나님의 소원으로 등장을 합니까?

19절을 보면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21절에서는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고 합니다. 피조물들이 고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 냣어짐에서 해방되어서 영광의 자유에 이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소원은 인간에 의해서 더렵혀진 세상을 깨끗한 나라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소원을 아예 무시해 버리고 살아갑니다. 하나님 같은 분에게 무슨 소원이 있겠는가라고 여겨버립니다. 그저 소원이라면 우리가 전도를 많이 해가지고 이 세상에 교회가 많이 세워지고 믿는 자가 많이 생기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인간의 생각과 전혀 다른 소원이 있습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 하나님은 이 소원을 두시고 이루시기 위해서 일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이 소원을 아시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셨던 것입니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교회를 다니는 신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소위 믿음 좋은 사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 자를 의미하는데, 과연 누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나타나겠습니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닐 모든 가능성이 사라진 존재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오신 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아들들의 나타남은 예수 안에서만 가능한 얘기입니다. 즉 나는 죽고 그리스도의 피로 다시 살았다는 것을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안에서 주와 한몸으로 여김 받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소원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나타나는 것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교회를 다니는 자들이 증가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앞서 말한 대로 나는 죽고 그리스도안에서 다시 산자 되었음을 아는 자들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신자란 하나님의 이 소원을 나의 소원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자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결국 신자는 소원이 뒤바뀐 자입니다. 나의 소원으로 사는 자가 하나님의 소원으로 살아가는 자가 된 것입니다.

이것을 염두에 둘 때 세상에 오신 성령님이 무엇을 하실 것인가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26,27절을 다시 보면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십니다. 연약한 우리 때문에 탄식하시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성령님이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신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성령님만 아니라 34절에 보면 예수님도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많이 들었던 말은 예수님의 중보기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신다는 것은 별로 어색하지 않습니다. 우리 구원을 위해서 지금도 기도하고 계신다고 생각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까지 우리를 위해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신다는 것은 좀 어색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님도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십니다. 말할 수 없는 탄식을 하면서 간구하십니다. 왜 탄식을 하면서 간구하십니까? 우리의 연약함 때문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이란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빌 바를 알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소원을 마음에 두지 않고 오직 자기 뜻을 내세우기 때문에 신자로서 빌어야 할 것을 빌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말하면서도 기도할 때는 내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소망이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연약함입니다. 이 연약함을 도우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하나님의 소원이 아닌 내 소원으로 살아갈 때 성령님이 탄식하신다는 것을 아십시오. 성령님의 탄식을 아는 자가 진심으로 자신을 탄식할 수 있습니다. 지난주에 세상을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탄식이 나와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그 탄식은 성령님의 탄식을 아는 자, 하나님의 소원이 무엇인가를 아는 자에게서만 보여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소원을 알기 때문에 내 뜻대로 살아가는 자신에 대해서 탄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도우심입니다.

27절에 보면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고 말합니다.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신다고 합니다. 왜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셔야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인간은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할 수 없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뜻으로 살기보다는 자기 뜻으로 사는 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기도를 듣지 않습니다. 죄인에게서는 자기를 위한 기도밖에 나올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대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시는 성령님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그리고 그 기도대로 응답하십니다. 그 응답이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영원히 예수님의 은혜이며 성령님의 도우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