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8:28 합력하여 이룸

인간은 언제나 하나님에 대해서 가능성을 두고 만나려고 합니다. 즉 하나님과 인간 관계에 있어서 분명 접촉되어지는, 접촉되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만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에게도 역시 가능성을 둡니다. 하나님이 요구하는 접촉점에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을 대립된 관계로 보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서로 거래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관계로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가능성을 포기하지 못한 인간에 의해서 철저하게 왜곡되어진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현대 교회가 믿는다고 외치고 있는 하나님은 모두가 가능성으로 인간과 연결되어 있는 하나님일 뿐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인간과 대립되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심판주로 말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죄인으로 말합니다. 심판주와 죄인이라는 이 관계 속에 과연 가능성이라는 것이 존재하겠습니까? 거래라는 것이 존재하겠습니까?

하나님과 인간은 심판주와 죄인이라는 관계에서 만나질 뿐입니다. 인간을 심판한다는 것은 인간에 대한 전적인 부정을 의미합니다. 만약 인간에게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하나님은 심판을 말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에게 남아있는 가능성을 더욱 키우고 발전시켜서 점차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인간으로 계발하고자 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그 어떤 가능성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을 심판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교회에서는 얼마든지 인간에게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해줄 가능성이 있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복을 줄 수밖에 없도록 잘할 힘도 있고 믿음도 있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들의 행위에 모든 가능성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곧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심판은 교회에 다니지 않는 자들에 대한 얘기가 아닙니다. 모든 인간에 대한 얘기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인간은 결코 자신에게 가능성을 두어서는 안됩니다. 인간이 자신에게 가능성을 두고 하나님께 나오는 것 자체가 심판의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은 인간의 가능성이 전적으로 포기되어진 현장에서 부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대 교인들은 심판주와 죄인과의 만남을 거부하려고 합니다. 심판주와 죄인의 만남에는 오직 '죽어야 할 인간'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심판주와 죄인이 아닌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만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서 심판주와 죄인이라는 관계가 벗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계속 자신의 죄인 됨을 말하고 심판을 말하는 것은 십자가 안에 있지 못하는 모습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을 너무 나약하게 만드는 것이고 활동을 제약하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이성에 의해서 왜곡되어진 하나님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오직 심판주와 죄인이라는 관계 안에서만 발견되어질 뿐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로 인해서 죄인에서 벗어났다고 한다면, 그리고 이제는 죄인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니까 자신에게 가능성을 두고 하나님께 나온다면 그것은 결국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렸던 성령이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고 탄식하시며 기도하신다는 것도 바로 이런 관계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만약 가능성으로 연결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이 말씀을 대하면 이해되어지는 것은 '인간에게 가능성이 있는데 그것이 너무 약하기 때문에 성령이 탄식하시고 기도하시면서 도우신다.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인해서 인간은 더욱 큰 가능성을 지닌 채 하나님을 위해서 일할 수 있다'는 것으로 되어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심판주와 죄인이라는 관계에서 대한다면 성령의 탄식과 기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어지는 것입니다. 즉 의에 대한 가능성이 전혀 없는 인간이기에 하나님의 뜻은 성령의 기도하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나의 가능성으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죄인이란 죽어 가는 존재를 의미합니다. 썩어져 가는 몸이 곧 죄인임을 보여주는 증거물인 것입니다. 그런데 죽어 가는 자에게 무슨 가능성이 있습니까? 인간에게 가능성이 있어야 믿음도 말하고 전도도 말하고 기도도 말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전혀 가능성이 없는 인간이, 썩어져 가는 몸을 회피할 수 없는 그런 인간이 뭘 해보겠다는 것입니까?

죄인임을 아는 신자는 '뭘 할까요?'라고 묻는 것조차 죄스러워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할 수 없음'을 아는 자가 '뭘 할까요?'라고 물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죄인임을 아는 신자는 단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바라보면서 감사할 뿐입니다. 성령이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탄식하며 기도하신다는 것을 알았을 때 우리는 성령님의 마음에 대해서 감사할 뿐이지 '성령님이 나를 도우시니까 도우시는 그 힘으로 한번 해보겠습니다'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심판주로 자신을 죄인으로 보는 입장에 서 있는 신자는 28절의 말씀도 하나님 중심으로 이해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28절을 보면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앞에서 말한 대로 심판주와 죄인이 아니라 가능성으로 연결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로 보면서 대한다면 결국 '하나님의 모든 일은 결국 우리에게 선을 주기 위해서 되어진다'라고 생각해 버릴 것입니다.

많은 목사들이 이 말씀을 이렇게 왜곡합니다. '지금 당장 여러분에게 좋지 않은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낙심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에게 고통을 주지 않는 분인데 지금 고통이 있는 것은 더 큰복을 주시려고 예비하시는 것입니다'라고 가르칩니다. 즉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에게 주어진 고통이나 어려움 힘든 일들, 이 모든 것이 다 합력해서 우리에게 선, 즉 복을 가져다 준다는 것입니다. 결국 다른 복을 주기 위해서 지금 당장 고통이 있는 것이니까 참아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비록 듣기에는 좋은 말 같고 당장 힘이 생기는 것 같은 말일지는 몰라도 하나님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인간의 말입니다. 성경을 보면서 이런 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은 앞서 말한 대로 심판주와 죄인의 관계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은 하나님과 예수님 성령님의 일을 말합니다. 하나님에게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그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신다고 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을 중심으로 해서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선을 이룬다는 것은 우리 몸의 구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우리 몸의 구속은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합력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인간의 의와 가능성이 개입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합력이라는 것도 서로서로 힘을 합해서 일하시는 합력으로 이해하지 말고 정해진 하나님의 뜻을 중심으로 일하시는 합력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렇게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은 인간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 말씀이기 때문에 이 말씀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이나 체험이나 행위들을 주장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복음을 말하면 나도 복음을 안다고 합니다. 십자가를 말하면 나도 십자가를 안다고 말합니다. '너만 십자가를 알고 예수를 아느냐'라고 반발을 합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를 알고 복음을 안다면 나타나야 할 것은 십자가의 열매이고 복음의 열매일 것입니다. 십자가의 열매는 자기 부인입니다. 자기 부인만이 복음을 아는 자의 열매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안다고 하는 자들에게 나타나는 것은 모두가 자기 부인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에게 가능성을 두는 열매만 나타냅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 따로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것처럼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로마서에는 자기를 죽은 자로 여기는 것을 믿음으로 봅니다. 모든 가능성을 포기한 상태가 믿음인 것입니다. 내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믿음이 선을 이룬다는 것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즉 내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 이루시는 분이 따로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마 17:20절에 보면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 역시 자기에게 가능성을 두고 생각하게 되면 '믿음만 있으면 산을 옮길 수가 있다'는 뜻으로 이해할 것입니다. 이것이 전통적인 한국교회의 해석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겨자씨 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긴다는 것은 내가 믿음을 가지면 그렇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분이 산을 옮길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믿음이 없다는 것은 다른 주체를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능성만 바라보고 있는 것을 책망하는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지금의 한국교회의 모습이 모두 이런 것이 아닙니까? 믿음의 주체가 자신이 되려고 하지 않습니까? 믿음으로 힘을 받아서 그 힘으로 멋있는 일을 해보고 싶어하지 않습니까? 결국 내가 이뤄보고 싶은 욕망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내가 죽어도 다시 산다는 것도 자기 확신이 아니라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사셨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사신 것을 믿기 때문에 나도 다시 살 것을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 26:33-35절을 보면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고 말합니다. 이 대화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은 베드로의 가능성을 부인하고 계시고 베드로는 자신의 가능성을 고집하고 있는 점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그 고집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고집이기도 합니다. 너는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예수님 앞에서 우리는 '아닙니다 할 수 있습니다'라고 반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말한 믿음은 자기 생각이고 자기 계획이었을 뿐입니다. 베드로는 믿음을 이루시는 분은 따로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믿음이란 모든 일은 주님이 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즉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은 따로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선을 이루시는 분은 따로 있으니까 그 앞에서 '내가 선을 이루어보겠습니다'라고 나서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린 단지 성령님이 기도하시고 주님이 기도하심으로 이루어진 일을 바라보고 감사하며 살뿐입니다.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입니다. 우린 단지 이것을 믿으며 살면 됩니다. 선은 하늘에서 이루십니다.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이루시는 일이기에 우리의 구속이 확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하나님이 다 하셨습니다'라는 고백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말에 대해서 '그렇다면 우리는 착한 일도 하지말고 아무 것도 하지말고 살아가도 된다는 것입니까?'라고 반발을 한다면 그것은 아직까지 인간에게 가능성을 두고 있는 생각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에 대한 불안감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비밀을 알지 못한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신자란 이루어야 할 사람이 아니라 이루어짐을 믿는 자입니다. 합력하여 뜻을 이루시는 분은 따로 있습니다. 신자는 단지 나는 죽어야 할 죄인임을 알고 자신의 가능성을 포기하고 주님을 바라보며 살면 됩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이루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믿음으로 사는 것도 하나님이 이루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