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8:29-30 부르신 이유

지난 시간에는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에 대해서 설교했습니다. 이 말씀은 신자라는 것은 우리가 되고 싶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입은 자들만 신자 될 수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내가 교회에 나왔다'거나 '내가 기도해서 이렇게 되었다'는 말이나 '내가 열심히 성경을 보니까 믿음이 성장하더라'는 식의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이란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일이지 우리에게 달린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믿음이 우리 쪽의 열심과 노력에 달려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가 믿음의 문제를 자기의 행위와 연결 지어 생각한다면 그는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에 대해서 전혀 무시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28절의 말씀은 불러내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이루시는 분도 하나님이심을 의미합니다. 즉 구원이라는 것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뜻에 달려있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잘하며 구원이 확고하고 못하면 불안하다는 것도 잘못된 생각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불러내시고 하나님이 이루시니까 우리는 안심하고 내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는가?'라는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물론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불러내신 분이 이루신다는 것은 인간을 전혀 보지도 말고 의지하지도 말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결국 '나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되는가?'라는 질문도 역시 자기에게 집착하고 있는 증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인간에게 성령이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시는데 그 방법은 말씀을 깨닫게 하심으로서 하나님이 불러내신 자를 향한 그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성령의 깨달음이 있는 자는 '내 마음대로 해도 되는가?'가 아니라 '나를 불러내신 하나님의 뜻대로 나를 사용하실 것을 믿습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 집착에서부터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도를 항상 오해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29절을 보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미리 아셨다는 것이나 미리 정하셨다는 말은 '예정'이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엡 1:4,5절에 보면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들이 되게 하신 것은 미리 정하신 그 뜻대로 되어진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창세 전에 택하셨다고 말씀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예정이라는 말이나 창세전이라는 말에 의문을 많이 가지고 의견들도 분분합니다. '창세전에 택하고 택한 자만 구원한다면 우리가 지금 노력해야 할 필요가 어디 있느냐? 죄지어도 구원받을 것인데 그냥 살아가면 되지 않느냐?'라는 말을 하기도 하고, '창세전에 택했다면 아무리 인간이 잘해도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불합리한 하나님이 어디 있는가?'라는 의문을 가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질문에 대해서 답이 무엇이냐를 생각하기 전에 이미 질문 자체가 잘못되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미리 정하시고 택하시고 부르신 일들을 인간을 중심으로 해서 이해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예정을 생각하려면 미리 정하시고 부르신 하나님의 의도 안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의도는 이미 무시해 버리고 자기 구원을 중심으로 예정을 생각해 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질문 자체가 이미 잘못된 것이고, 그러한 질문에 대해서는 답을 내릴 필요조차도 없는 것입니다. 필요하다면 잘못된 질문 자체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미리 정하시고 부르신 하나님의 의도와 인간의 의도에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그것은 말씀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미리 정하셨다는 예정을 인간의 구원에 초점을 맞추지만 성경은 인간의 구원이 관심이 아닙니다. 29절에 보면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즉 미리 아시고 부르신 것은 부르심을 입은 자들로 하여금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는 것이 곧 구원시키겠다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말씀을 보면 결국 미리 아시고 부르신 자들로 하여금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는 이유는 그들로 인해서 그리스도가 맏아들이 되게 하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아들 가운데 맏아들이 되게 하셔서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아들이 영광을 받는 것이 하나님에게 영화가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30절에서 말씀하시는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는 말씀도 인간에게 관심을 두시고 인간을 위해서 부르시고 의로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맏아들 되게 하기 위한 것이 하나님의 의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관심을 두시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일하신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인간을 미리 정하시고 부리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모든 일들이 인간이 그만큼 쓸모 있고 가치가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악한 인간을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모든 것이 의로우시고 영화로우신 그리스도를 맏아들 되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엡 1:6절에서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을 봐도 하나님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즉 우리에게 복을 거저 주시는 이유도 우리의 가치 향상이나 편안한 삶을 보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모든 관심이 그리스도를 향해있다면 우리의 관심 역시 그리스도에게만 향해있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거저 주셨다는 것을 안다면 공짜라고 해서 좋아하면서 또 다른 공짜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나같은 인간에게 왜 이러한 복을 공짜로 주셨는지 생각하면서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로 인해서 주어진 복에 대해서 감사하고 찬양하라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의도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를 향한 관심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나의 잘함과 못함에 의해서 복과 저주가 결정되어지는 듯한 착각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안에서 풍성한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행동을 바라보고 산다는 것은 결코 그리스도의 피를 아는 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교회란 오직 그리스도의 피를 전하기 위해서 모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만 관심을 두고 모이는 것이 교회라는 것을 언제나 잊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인간의 행위는 드러나서는 안되고, 인간의 공로 역시 드러나서는 안됩니다. 오직 주님이 하셨다는 고백과 찬미만이 가득 차야 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미리 정하시고 부르셨다는 예정은 분명 그리스도안에서의 확실한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우리더러 마음놓고 살아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구원이란 그리스도안에 있는 것이니만큼 오직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리스도께 모든 공로를 돌리며 살 것을 요구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신자의 예정은 신자의 기능적인 문제로 생각해야지 구원의 문제로 생각을 하게 되면 미리 정하시고 부르신 하나님의 의도를 착각할 위험이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하나님이 왜 우리를 미리 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셨는지 그 의도를 바로 알고 돌아가셔야 합니다. 결코 여러분을 위해서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를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그리스도를 맏아들 되게 하시려고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맏아들 되게 하신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 되게 하시는 것은 부르신 자들로 하여금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는 것으로 되어집니다.

아버지의 아들은 닮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아버지를 둔 형제라면 분명히 서로 닮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형제 중에서 맏아들 되게 하시기 위해서는 형제들을 필히 그리스도를 닮은 자가 되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닮지도 않은 형제들 가운데서 그리스도가 맏아들 될 수는 없습니다. 이미 형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서 도우시고 간구하시는 것이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 또한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되어지는 것입니다.

아들의 형상이란 아들의 영광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변화산에서 아들이 받을 영광에 대해서 보여주셨습니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영광 안에서 영화롭게 될 사람입니다. 그래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 되게 하신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맏아들이란 그냥 혈통적으로 장남이란 의미가 아닙니다. 맏아들은 곧 맏물을 의미합니다. 구약에서의 맏물은 하나님께 바쳐져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맏물을 바침으로서 그 뒤에 나오는 모든 것이 곧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의미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맏아들이 하나님께 드려짐으로 인해서 아들을 따라난 모든 형제들 역시 하나님께 드려진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난 성도들은 자신을 하나님께 바쳐진 자로 여기는 것이 정상입니다. '나는 주님의 피로서 의롭게 되었습니다'라는 고백이 예수님을 맏아들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언제나 우리로 하여금 자기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보고 살아가도록 우리를 도우시는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게 해서 아들을 맏아들 되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이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이 곧 우리의 구원입니다. 따라서 결코 포기되어지지 않고 실패되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계획이기 때문에 구원 역시 실패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기 구원을 바라보고 살아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이 곧 우리의 구원이라는 것을 알고 더 이상 자기 구원에 신경 쓰지 말고 우리를 미리 정하시고 부르신 하나님의 의도에 마음을 두고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우리를 미리 정하시고 부르셔서 예수님을 알게 하시고 믿게 하신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고 살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단지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믿고 살아가면 됩니다. 우리가 뭘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왜 우리를 성도로 부르셨는지 왜 의롭게 하시고 영화롭게 하셨는지 그 이유를 분명히 알고 살아가면 됩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자연스럽게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