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8:33-34 누가 정죄하리요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이며 우리의 의와 행위를 조건 삼아서 베푸신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것이고 우린 그 사랑 안에 초청되어진 것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행위를 기준으로 해서 신앙의 여부를 판단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행위를 보지 않으시는데 누가 인간의 행위를 기준으로 해서 믿음을 판단할 수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우리 행위를 보지 않으신다고 해서 마음놓고 우리 멋대로 살자는 것이 아닙니다. 행위를 보지 않으신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신앙의 기준으로 삼을 만한 의로운 행동이 나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의지하는 신앙이란 자기 행동을 보지 않는 것으로 드러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행동은 아무리 들여다봐도 의의 기준이 될만한 것이 없습니다. 의의 기준은 오직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행동만이 의의 행동이고, 신앙이란 바로 예수님의 행동을 믿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행동을 기준으로 해서 믿음이 좋은 사람 믿음이 좋지 않은 사람으로 판단을 하는 것은 결국 예수님의 의의 행동으로 살았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말하기를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말합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 하리요'라는 말씀이나 '누가 정죄하리요'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셔서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자를 누가 송사할 수 있고 정죄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택한 자는 그리스도의 의안에 삽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실 때는 오직 그리스도의 의를 기준으로 해서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의가 곧 생명이기 때문에 신자는 그리스도의 의안에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자에게 물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의안에 사십니까?'가 되어야지 '의를 행하는가?'가를 물어서는 안됩니다. 의를 행하는가를 묻는다는 것은 인간에게서도 의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한 물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물음만으로도 그는 그리스도의 의안에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의안에 산다는 것은 자기의 의를 보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의가 있는데 보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아예 자신에게서는 의가 될만한 것이 나올 '선'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기준인 의를 나에게서 찾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신 예수님에게서 찾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는 그리스도의 의안에서 안심하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기 행동을 보면서 낙심하기도 하고 불안해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곧 그리스도의 의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의를 들고나오면 되는데 자꾸 자기 스스로 의를 만들어서 그 의를 들고 나오려고 하기 때문에 낙심이 있고 불안하기도 하고 교만도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누가 송사 하리요' '누가 정죄하리요'라는 말씀은 믿음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확실하게 말씀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송사 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선택이 실패했다는 것을 고발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송사란 고발을 뜻합니다. 즉 인간의 실수와 허물을 들고 나와서 '이런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는가?'를 판단하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에서 그런 일이 많이 있습니다. 누군가에게서 실수와 허물이 보여지면 가차없이 그 믿음을 의심합니다. 믿음이 있다면 그런 행동을 안 할 것인데 믿음이 없어서 그랬다는 식으로 판단합니다. 주일 예배에 빠지는 것도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십일조를 안하는 것도 믿음이 없어서라고 말합니다. 이와 같이 인간의 행동을 선과 악으로 구분을 해서 선한 행동을 하는 신자는 믿음이 있는 신자이고, 악한 행동을 하는 신자는 믿음이 없는 신자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택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누가 송사 하느냐?'라고 하십니다. 가령 하나님이 A란 사람을 택하시고 의롭다 하셨습니다. 성경대로 하면 하나님은 A란 사람에게서 신자가 될 만한 자질이 있거나 선한 성품이 있어서 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B란 사람이 A에게서 허물을 발견합니다. 기도도 잘 안하고 성경도 보지 않고 십일조도 하지 않습니다. B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그것을 신앙이 있는 자의 행동으로 인정이 안됩니다. B가 생각하는 신앙이 있는 행동은 교회에 봉사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도 보면서 헌금도 형편에 지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런 기준에서 A를 볼 때 그는 분명히 믿음이 없는 자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하나님, A 성도가 믿음이 없습니다. 그를 징계하셔서 믿음으로 살게 하소서'라고 기도했다고 할 때, 바로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이 택하시고 의롭다 하신 일을 누가 송사 하리요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A란 사람을 택하시고 의롭다 하실 때는 전혀 선이 될만한 것을 보지도 않으셨고, 선한 행동을 할 것을 기대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A라는 사람의 행위를 가지고 그를 송사 한다면 결국 하나님이 A란 사람을 택하신 것을 실패로 여기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분명히 허물이 있습니다. 악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허물과 악함을 누가 담당하셨습니까? 34절에서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말씀한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의 허물과 죄를 담당하시고 죽으셨고 다시 사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모두 담당하시고 용서하신 죄에 대해서 누가 감히 정죄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이런 이유로 신자는 사람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눈치를 보는 사람이 있습니까? 왜 눈치를 보십니까? 사람의 눈치를 본다는 것은 사람들의 이목과 판단을 무서워한다는 증거입니다. 사람들의 이목과 판단을 무서워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생각하기보다는 사람을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밖에 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입니다. 누가 누구를 판단할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아무리 40일 금식기도를 하고 평생을 목회를 하며 살았다고 하는 목사라 할지라도 죄인입니다. 그도 역시 그리스도의 의로 사는 자라면 40일 금식기도가 의가 되지 못하는 것이 분명하고, 평생토록 목회를 했다는 것도 역시 자랑거리가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평생을 목회 하면서 복음을 이용해서 밥벌이를 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모든 이가 죄인인데 누가 누구를 판단하고 송사하고 정죄한다는 것입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셨는데, 과연 그리스도의 의보다 더 강한 의를 소유한 자가 누구입니까? 세상에서 착한 사람을 다 모아놓았다고 해도 예수님의 피 앞에서는 부끄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의입니다. 그런데 감히 누가 누구를 정죄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그래서 신자된 자는 사람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의안에 있는 자는 자연히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게 됩니다. 사람에게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경외하는 마음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시고 죽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의 피에만 굴복할 것입니다.

신자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염려로 하나님께 나가는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으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의안에 있게 되었음을 아는 감사함과 겸손으로 나가는 자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우리 모든 사람에게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에만 감사하면서 나가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누구도 송사할 수 없고 정죄할 수 없습니다.

이런 말을 하면 '그러면 교인들이 교회에 열심도 안내고 자기 멋대로 사는 것을 그냥 두고만 보라는 것인가?'라고 반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반발은 곧 주님이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을 뜻할 뿐입니다. 목사들의 착각은 목회를 자신이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목사가 교회를 다스리고, 심방하고, 가르치고, 권면함으로서 교회가 되어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목사의 자질과 능력의 여부에 따라서 부흥이 결정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불신앙임을 모릅니다. 주님이 목회를 하고 계신다는 것을 모릅니다. 목사는 단지 설교할 뿐이지 목회를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만약 목사가 목회를 한다고 생각하게 되면 결국 자기 방법과 기술을 끄집어내게 되고 예수님이 관심이기보다는 교회가 관심거리로 남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택하심과 의롭게 하심을 철저히 무시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예수님이 하셨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의만 내세우면 됩니다. 그가 바로 신자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예수님을 내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사실 예수님만으로는 교회에 득이 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만 내놓지 말고 여러분들에게 있는 것을 함께 내놔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내게 있는 것을 내어놓음으로서 증명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만으로는 안되고 시간도 함께 바치라고 합니다. 예수님만으로는 안되고 돈도 함께 바쳐라고 합니다. 예수님만으로는 안되고 교회에 충성 봉사를 해야 한다고 합니다. 예수님만으로는 안되고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도에게 그것을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피를 믿느냐를 물으실 뿐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예수님의 용서하심과 의 안에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비록 누군가가 신자를 송사하고 정죄한다고 할지라도 그 송사와 정죄를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셔서 의롭게 하신 자를 아무도 송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이것을 안다면 하나님이 의롭게 하셨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 은혜만을 감사하며 사는 자가 누가 뭐래도 신자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