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지켜 내는 것이 아닙니다. 흔히 교회에서 말하기를 '힘있는 신앙을 가져라' '신앙을 지키라'고 하지만 인간에게는 신앙을 지킬 힘이 없습니다. 이것은 인간에게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랑도 없음을 포함한 말입니다. 따라서 교인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 역시 무리한 요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입니까?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나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는 인간이다. 나는 나밖에 모르고 나만 사랑하려고 하는 죄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라는 것입니다. 결국 나의 신앙을 지키는 것은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힘이며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도 역시 내가 사랑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내 속에 들어옴이 되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함을 알아라'는 말을 하게 될 것입니다.
35절에 보면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고 말합니다. 또 37절에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말하고 39절 하반절에서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과 신자 사이가 사랑에 의해서 단단히 연결되어 있는 것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을 보면서 '그래 어떤 힘든 일이 있다고 해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포기하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을 갖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순간의 각오이고 결단이고 자기 도취일 뿐이지 연약한 인간이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은 '성경에는 어려움을 이겨낸 위대한 신앙인들이 있지 않는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할 것입니다. 한 예로 다니엘과 그 세 친구들도 사자굴도 두려워하지 않고 풀무불도 두려워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분명히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사랑은 어떻게 된 것인가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자기들의 신앙의 힘으로 이겼다는 생각은 잘못입니다. 다니엘이나 그 세친구 역시 우리와 같은 연약한 인간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습니다. 자신들에게 어려움이 있다고 해도 그것을 하나님의 사랑이 자신들을 떠난 증거로 보지를 않았기 때문에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이 함께 함을 알았고 믿었던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풀무불에 들어가게 되는 어려움에 처했을 때에도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의심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왜 우리를 이렇게 죽게 하십니까? 우리가 뭘 잘못했습니까?'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불만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너희가 우리를 풀무불에 던진다고 해도 하나님이 우리를 건져내실 것이다. 설사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우리는 신상에 절할 수 없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 전혀 의심하지도 않고 반문하지도 않는 모습인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전혀 의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니엘이나 그 세친구가 사자굴과 풀무불에서 무사히 빠져 나온 것만 생각합니다. '봐라 이렇게 굳게 하나님만 믿으면 죽음 속에서도 하나님은 살게 하신다'라고 생각합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을 고통 속에서 건져 주시고, 어려움을 해결해주시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과 세친구는 죽음에서 벗어나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하나님을 믿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사자굴에 들어가고 풀무불도 마다하지 아니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기 때문이고 자신들을 책임지시는 분은 하나님이신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책임진다는 것은 꼭 살려내신다는 것이 아니라 죽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이 책임지시는 것입니다. 다니엘과 세친구의 관심은 단지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무리들 속에서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보여주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입니다. 결국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칼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습니다.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책임지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어려운 상황에서도 변함 없이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어려움이 있을 때 누구나 반문을 합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있어야 하는가?' 이러한 생각이 자신을 괴롭힙니다. 어려움이 있음으로 해서 하나님을 의심하게 됩니다. 자신의 믿음을 의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이런 일이 없어야 하고, 있다고 해도 해결되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증거는 성경의 인물들 속에서 찾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다니엘과 그 세 친구도 극한 위기 속에서 살아났고, 사도들도 옥에 갇혔다가 다시 풀려났고, 아브라함도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거짓말까지 했는데도 하나님은 오히려 아브라함을 보호하지 않았는가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신앙의 인물들을 보호하신 것은 하나님의 일은 인간에 의해서 방해받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아브라함도 거짓말한 아브라함을 보호하신 것이 아니라 사라를 보호하신 것입니다. 사라에게는 약속의 자손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사라가 남의 아내가 된다면 하나님의 약속이 파기되어 버립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에 의해서 위태로워진 약속을 보호하기 위해서 사라를 보호하신 것이지 아브라함이 예뻐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어떤 어려움에 처해도 건져주시고 해결해 주신다는 것으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남녀가 서로 사랑을 해서 부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병이 들었습니다. 그럴 때 아내가 남편이 병등 자신을 싫어해서 버리지나 않을까 염려한다면 그것은 곧 남편의 사랑을 의심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내가 건강할 때는 버림받을까 염려하지 않다가 병들 때 그런 염려를 한다는 것은 결국 남편의 사랑을 자신이 건강할 때만 국한된 사랑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만약 남편이 병든 아내로부터 '당신 내가 병들었다고 나 버리지 마'라는 말을 들었다면 얼마나 섭섭해하겠습니까? 자신의 사랑이 의심을 받는데 섭섭한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남편의 사랑은 비록 아내가 병들었다고 해도 변함이 없는 사랑이었는데 아내 쪽에서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면서 사랑을 의심한다는 것은 결국 남편을 믿지 않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가 하나님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조건을 보고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택하셨기 때문에 사랑하신 것입니다. 만약 신자가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하나님, 제가 기도를 안해서 이런 벌을 주신 것은 아닙니까?'라고 한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자신이 기도를 많이 하고 적게 하는 것에 따라서 변한다고 생각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즉 아내가 건강하니까 사랑하고 병드니까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택했을 뿐이고, 자신이 택한 아내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지 건강하고 예쁘다고 해서 사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아내 쪽에서는 내가 건강하고 예쁘니까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남편의 사랑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된다면 아내는 남편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날마다 예뻐지고 건강하려고 애를 쓸 것입니다. 즉 남편의 사랑을 붙들어 놓기 위해서 자기 쪽에서 쓸데없는 신경을 쓰는 셈이 됩니다.
따라서 신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고 자신에게 붙들어 놓기 위해서 교회를 열심히 나오고 기도하고 성경보고 헌금한다면 그것은 남편의 사랑을 알지 못한 어리석은 아내와 같은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무지한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사랑하라고 우리를 신자로 택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는 도구로 택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어려움이 없는 것, 어려움 속에서 건짐 받는 것을 사랑으로 이해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증거 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위대함은 환난, 곤고, 핍박, 기근, 적신, 위험, 칼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 나타납니다. 36절에 보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고 말합니다. 주를 믿는 자가 죽임을 당하고 도살할 양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그것이 무슨 사랑이냐?' 하겠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에 있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위대하고 끊어지지 않는 사랑을 세상에 증거 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택하셨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신자를 극한 상황으로 밀어 넣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 주님의 신부는 극한 상황에서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는 것을 통해서 가려질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런 신자는 대적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것을 이깁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끊어짐이 없습니다. 그 사랑만 믿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