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목사들이 구원의 확신을 가져라는 말을 많이 강조합니다. 아마 교인들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방지하고 확고한 믿음을 심어주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는 것 같은데, 사실 구원의 확신이라는 것이 우리가 갖고 싶다고 해서 가져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구원의 확신을 가지자'라고 할 때 생각하는 것은 자기 행위입니다. 자기 행위가 기준 되어서 구원의 여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비록 말로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고 우리는 그 피로 용서함을 받았으니까 구원에 흔들림이 없다라고 말을 한다고 해도 결국은 용서받은 자의 모습을 자신의 행위에서 찾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어떤 신자가 기도하고 성경 볼 때는 '그리스도의 피로 용서 받았음을 감사합니다'라고 하면서 구원의 확신을 가졌는데, 그날 저녁에 친구들과 어울려서 술먹고 담배를 피웠다면 구원의 확신이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뭔가 머리에서 '용서받은 자라면 이런 일을 하지 않아야 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떠나지를 않는 것입니다. 결국 기도하고 성경 볼 때는 강했던 확신이 그만 술 담배 때문에 흔들려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믿음보다는 술 담배가 더 강하다는 것이 되버리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자신의 행위를 포기하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구원을 생각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구원의 확신이란 내가 갖고 싶다고 해서 가져지는 것이 아닙니다. 또 구원의 확신을 가지려고 애를 쓸 필요도 없습니다. 신자가 말씀 안에서 그리스도의 의에 대한 이해가 되어진다면 그는 이미 확신 속에 있는 것이 됩니다. 말씀이 그 속에서 확신으로 자리하는 것이지 말씀을 이해했기 때문에 내 스스로 확신을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확신이란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구원의 능력이 그리스도에게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이 바로 능력 안에 있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능력을 믿는다면 그것이 바로 확신이 아니겠습니까? 즉 구원의 확신을 '내가 구원을 받았는가 받지 않았는가'에 대한 확인으로 생각하지 마시고 그리스도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라는 말씀은 하나님 쪽에서 한번 사랑하신 사랑은 포기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바로 구원의 확신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또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럼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인가 받지 않은 자인가'를 확인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끊어지지 않는다고 하니까 관심이 내가 사랑을 받았는가를 확인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확인은 자신의 믿음 생활 여부를 기준으로 하게 될 것이 뻔합니다. 이것이 바로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모든 것을 자신을 중심으로 해서 판단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가령 부모가 자식에게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나의 사랑은 네가 공부를 못하고 말썽을 피우고 세상에서 실패한다고 해도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자식으로서 어떤 반응을 보여야 옳겠습니까? 부모가 사랑한다고 말했는데, 자신 스스로 그 사랑을 확인하려고 하면서 '나를 사랑한다는데 왜 나에게 용돈을 적게 주지? 말썽을 피운다고 해도 사랑하겠다고 하면서 왜 전에 말썽을 피웠을 때 야단을 치고 매를 때렸지? 혹시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것은 부모의 사랑을 모독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부모의 사랑은 자식에게 용돈을 많이 주는 것이 아니라 무엇으로도 끊어지지 아니한 관계로서 자식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식이 말썽을 피웠을 때 야단을 치고 매를 때리는 것은 이제는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자식다운 자식으로 만들기 위해서라고 한다면 신자가 자신에게 주어진 것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판단하려고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을 보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이 말씀을 자기 구원에 대해서 안심하는 쪽으로 이용해서는 안됩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구원의 확신을 주거나 안심을 시키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아 이제 나는 안심해도 되겠구나. 어떤 일이 있어도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으니까 때로 죄를 지어도 괜찮겠구나'라는 생각을 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사랑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관심이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관심이 있는 자는 '무엇으로도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말씀을 대할 때 하나님의 사랑의 위대함과 능력에 대해서 감사를 해야 합니다. 앞서 말한 대로 부모가 자식에게 '네가 어떤 말썽을 부린다고 해도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끊어지지 않는다'라고 할 때 진짜 부모님의 사랑을 아는 자식이라면 어떤 반응이 있겠습니까? '그러면 공부좀 못해도 괜찮겠네 말썽 부려도 야단 안맞겠네'라고 생각하는 것은 부모님의 사랑보다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 이게 부모님의 사랑이구나'라고 하면서 사랑에 감사한다면 그가 바로 진짜 부모님의 사랑을 아는 자식이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과 신자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신자의 관계는 하나님께서 아낌없이 내어주신 그리스도께서 화목제물되신 관계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피로 약속된 관계이기 때문에 그 무엇으로도 끊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피는 모든 죄를 이기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것이 그리스도의 피고, 그 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을 입었는데 술먹고 담배 핀다고 해서 그 관계가 끊어지겠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술먹고 담배 핀다고 해서 끊어지는 관계라면 그리스도의 피는 인간의 술 담배도 극복하지 못하는 무능한 피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틀림없이 '목사님, 그러면 그리스도의 피를 믿고 마음놓고 술 먹고 담배 피워도 괜찮은 것입니까?'라고 묻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말씀드린 것은 술먹고 담배 피워도 끊어지지 않는 관계라고 했지 마음놓고 술먹고 담배 피워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질문을 한다는 것은 앞서 말한 대로 하나님의 사랑보다는 자기에게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란 술먹고 담배를 피우고 수십년 교회를 안나와도 끊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에 감사하는 자이지, 그 사랑을 믿고 개판 치는 자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을 믿고 사는 자라면 자기 쪽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붙들고 놓지 않으려고 애쓰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으려고 교회 봉사를 열심히 한다거나 기도를 열심히 한다거나 십일조를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한 것은 자기 힘으로 사랑을 자기 쪽에 붙들어 놀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열심을 의지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람이 바로 신자가 아닌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교회의 잘못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오늘날 교회는 교인들에게 하나님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신앙생활을 하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사랑을 빙자해서 목사 개인의 욕심을 채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식은 부모에게서 난 존재입니다. 그것 하나 때문에 부모와 자식이란 관계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낳아서 하는 것을 봐서 마음에 들면 자식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신자는 스스로 하나님을 선택해서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먼저 신자를 택하시고 사랑하셨습니다. 신자란 그리스도의 피로 새롭게 태어난 자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는 것을 봐서 사랑을 결정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그리스도안에서 사랑의 관계가 확정되었습니다. 무엇으로도 끊어지지 않는 사랑입니다. 우리 쪽에서 붙들어야 할 것도 없고, 해야 할 것도 없습니다. 우린 단지 사랑의 능력을 찬송하고 감사할 뿐입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내쪽에서 붙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쪽에서 나를 붙드는 것이기 때문에 무엇으로도 끊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능력을 아는 자가 이기는 자입니다.
37절에 보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말씀합니다. 36절에 보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보면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있는 자가 우리의 상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는 자로, 도살할 양같이 여김 받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시각으로 볼 때 이것이 과연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사랑 안에 있다면 죽임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힘있는 자로 우뚝 서는 것이 아닙니까? 이것이 세상이 기대하는 사랑 받는 자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예수님은 도살당하는 양처럼 여김을 받았습니다.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의심했습니까? 예수님은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셨을 뿐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어려운 일을 당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과연 나를 사랑하시는가?'하고 의심이 들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신다면 나를 이렇게 대우하실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생각을 지우기 위해서 하나님을 신자의 모습을 말씀하셨습니다.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고 도살할 양처럼 여김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처지에 있을 때 세상은 신자를 조롱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데 왜 그모양이냐?'고 비아냥거립니다. '네가 평소 믿음이 없어서 벌을 받는다'는 말도 들립니다. 그러나 무엇으로도 끊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있기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것이 이기는 것입니다. 내 힘이 아니라 사랑의 능력이 이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그 사랑으로 우리가 구원받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 사랑을 무엇이 끊겠습니까? 무엇으로 끊어지지 않는 사랑의 관계 속에 있음을 아는 것이 믿음이고 그 믿음으로 사는 신자는 어떤 처지에서도 항상 당당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