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9:1-3 고통 당하는 자

신자는 세상의 끝이 어떠함을 아는 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 대한 평가도 '끝'을 기준으로 해서 평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끝을 기준으로 하고 세상을 평가 한 것과 기준으로 하지 않고 평가한 것의 결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세상의 끝은 멸망입니다. 이것은 신자라면 누구도 부인하지 못합니다. 세상이 멸망을 당한다는 것이 싫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들 욕심일 뿐이지 하나님이 세우신 원칙은 절대 불변입니다.

사람들은 절대로 변할 수 없는 원칙을 표현할 때 '천재지변'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즉 '천재지변이 있지 않는 한 바꿀 수 없다'는 식으로 변할 수 없는 원칙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멸망하신다는 하나님의 원칙은 천재지변이 있다고 해도 계속됩니다. 천재지변조차도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기 위한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변할 수 없는 원칙이 세상의 끝입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그 원칙을 신뢰한다면 세상은 끝이 있다, 세상은 망한다는 원칙아래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럴 때 평소에 아무런 문제가 없이 조용하고 정상적으로 보여진 세상이라 할지라도 분명 다르게 보여질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정상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온통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는 죄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모습으로 보여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 세상을 향해서 '우리 서로 돕고 사랑함으로서 살기 좋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봅시다'는 말이 나오겠습니까? 부자로 살아가고 권력을 휘두르면 살아가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겠습니까? 세상의 마지막에 서서 현재를 바라본다면 가장 불쌍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주의 은혜를 보지 못하고 현실에 매어서 아등바등 살아가는 그 모습들이 안타깝게 보여지게 될 것입니다. 그들에게 내가 알게 되고 나 자신에게 가장 귀한 분으로 자리하고 계시는 그분을 말하고 싶고 소개하고 싶고 그들을 예수께로 인도하고 싶은 마음으로 견딜 수 없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세상의 마지막에 서서 현실을 바라보는 신자일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마지막을 무시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세상이 온통 희망적으로 보입니다. 모든 일에 가능성을 두게 되고 열심히만 하면 뭔가 될 것 같은 충동으로 살아갑니다. 인간의 양심과 도덕으로 살아가면 사회가 아름답게 변할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래서 윤리 운동을 하게 되고 양심으로 살자고 외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 대신에 인간의 윤리와 도덕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장 세상에 유익이 되고 보탬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아는 것보다는 윤리와 도덕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인간에게 모든 가능성을 두고 '하면 된다'는 구호를 외치면서 믿음이라는 말로 사람을 독려하고 열심을 내도록 하는 이런 모습들이 바로 세상의 마지막을 무시하고 현재를 바라보는 자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실태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현실은 '망한다'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세상의 멸망을 잊어버리고 현재를 바라보기 때문에 항상 쓸데없는 것에 매어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눈에 보는 것들은 모두가 사라질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남편도, 자식도, 아내도, 돈도, 교회도 모두가 사라질 것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것에 소망을 두거나 기대를 걸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 우리의 유일한 소망과 희망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마지막에서 건지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신자는 이미 그리스도안에서 건짐 받은 자입니다. 건짐 받은 자의 위치에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나는 구원받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매이는 것이 아니라 '저들은 왜 그리스도의 은혜를 무시하는가?'라는 생각으로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멸망 속에서 우리를 붙드는 것은 우리 죄를 대신하신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닙니까? 그래서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할수록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가 아니겠습니까? 그러한 마음으로 세상을 볼 때 죄속에 살아가는 세상의 현실이 안타까워지고 자신에게는 고통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바로 사도 바울의 마음이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9:1-3)

여러분은 이 본문에서 바울의 어떤 마음을 느낄 수가 있습니까? 바울은 자신에게 큰 근심과 마음에 그치지 않은 고통이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의 근심과 고통은 형제, 골육 친척으로 인한 근심이고 고통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형제 골육친척들이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지 못하는 것에 대한 근심이고 고통이었던 것입니다. 그 근심과 고통이 어느정도였느냐면 마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것 같은 근심과 고통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형제를 향한 바울의 마음이었습니다.

우린 오늘 참으로 신실한 신앙인 이었던 사도 바울의 형제를 향한 마음을 대하면서 우리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남을 탓하기 전에 내가 바로 사랑이 없는 자이고 형제를 마음에 두지 않고 살았던 자라는 것을 자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 역시 심히 부끄러운 자로서 저에 대한 질문을 여러분께 하겠습니다. 여러분,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고통을 아십니까? 아니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그 고통을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마 지금까지 믿는 자로 행세를 했기 때문에, 또 구원받았다고 여겨버렸기 때문에 '만약 내가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 우리는 저주받아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다는 고통을 전혀 모르는 자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지 못하고 그리스도 밖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봐도 담담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예수 잘 믿으면 됐지 다른 사람의 믿음의 문제까지 신경쓰기 싫다는 것이 솔직한 우리들의 태도였지 않습니까? 이런 우리에게 사도 바울은 형제를 향한 자신의 고통과 근심을 말하면서 오늘 우리의 사랑 없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속에 복음이 존재했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채워진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에게 보여지는 사람들은 돈을 기준으로 해서 보여진 것이 아니고, 지식을 기준으로 해서 보여진 것도 아닙니다. 다만 복음을 아는가 모르는가만 기준이었습니다. 아무리 돈이 많고 잘산다고 해도 복음을 모르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무시하는 자에 대해서는 마음 아파하고 근심하고 고통스러워했습니다. 마치 자신이 저주받아 그리스도에게 끊어지는 듯한 마음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형제를 그러한 마음으로 대함으로서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 끊어진 고통이 어느 정도인가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 끊어졌다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살아가는 형제들에게 저주에 처하고 그리스도에게 끊어진 소망이 없는 인생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가를 자신의 마음으로 증거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을 아는 자로서 교회를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입장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교회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주일이면 많은 사람을 만나야 하는지 그 이유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교회에 오는 목적을 겨우 예배드리고 설교를 듣는 것으로 여겨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일에 교회에 나오지 않는 것을 가볍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설교를 듣지 못했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또 다음 주일에 가면 설교테이프가 있는데 그것 들으면 될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해 버리기 때문에 한주일 빠진다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입니다.

물론 주일날 교회에 나오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에 나온다는 것을 나 개인의 문제로만 생각해 버린다면 그것을 잘못된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교회에 나오는 것이 신자 개인의 문제라면, 즉 설교를 듣고 헌금하는 것이 주일에 교회에 오는 목적의 전부라면 굳이 교회에 올 필요 없이 테이프로 제작해서 우편으로 발송하고 헌금은 온라인으로 송금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많은 분들이 교회에 오는 것을 자기 개인의 문제로 생각합니다. 때문에 예배드리고 설교를 듣는 것으로 주일의 모든 목적이 달성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사도 바울이 은석교회를 출석한다면 과연 어떤 마음이겠습니까? 예배드리고 설교 들었다는 것으로 '나 할 일 다했다'고 하고 돌아가 버리겠습니까? 오늘 본문과 같은 바울의 마음이라면 틀림없이 교회를 둘러보면서 누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지 못했는가를 살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끊어진 듯한 근심과 고통으로 그들을 대하게 될 것입니다. 야단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가를 실제 자신의 마음으로 전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도구로 사는 신자에게서 보여지는 교회에 대한 입장인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복음을 알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아는 자는 언제나 교회에서 고통을 당하는 자로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형제를 향한 근심과 고통은 그들의 처지와 자신의 처지를 일치시킨 고통이고 근심이었습니다. '나는 복음을 아니까 구원받았다'는 입장에서 형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 역시 저주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처지로 생각했을 때의 고통으로 형제를 바라본 것입니다. 그리고 '형제들아,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고통이 어느정도인줄 아는가?'를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 저들을 사랑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랑하고 안하고는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사도 바울은 단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고통을 말할 뿐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구원받았다는 것을 생각하지 마시고, 저주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짐의 고통이 어느 정도인가를 묵상해 보십시오. 그럴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대신하시고 우리를 택하셔서 믿음을 선물로 주시고 주님의 은혜를 알게 하셨다는 것에 대해서 다시 한번 깊은 감사를 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고통이 어떠함을 아는 자로서 언제나 고통 당하는 자로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