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9:4-5 이스라엘이 가진 것

전에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에 대해서 잠깐 언급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책에 대해서 반박하는 책이 출판되었는데 책 제목은 '공자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서점에 가보니까 또 어떤 책이 출판되었는가 하면 '대학이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제목의 책이 출판되었습니다. 요즘 죽어야 산다는 제목이 유행인가 봅니다.

그런데 '죽어야 산다'는 제목을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극히 성경적입니다. 요 12:25절에 보면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고 말씀합니다. 뭔가를 잃는 대신 얻어지는 것이 있음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제목도 역시 공자를 잃으면 대신 나라를 얻는다는 의미의 제목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대학이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것 역시 대학을 잃으면 나라를 얻는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세상의 이치와 전혀 맞지 않는 제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내용이야 어떤 제도에 매이고 관습에 매이고 또 대학이라는 것에 매이면 나라가 엉망이 된다는 그런 의미의 내용이겠지만, 어쨌든 제목만 두고 생각하면 다른 귀한 것이 살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귀하게 여겨지는 것을 귀하게 여겨서는 안된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책 제목을 대하면서 저의 머리에 스쳐 가는 한가지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죽어야 산다'는 원칙 아래서 과연 우리에게서 죽어야 하는 것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죽어야 할 것이 살아있기 때문에 살아있어야 할 것이 살지 못하고 죽어 있는 것은 아닌가를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제가 내린 한가지 결론은 '교회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은석교회를 포함해서 모든 교회가 심사숙고하면서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교회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는 이 말에 대해서 반발하는 분도 있을지 모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교회가 살아있으면 예수님이 죽는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스스로 생각하고 활동하고 행동할 수 있는 힘과 의지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죽어있다는 것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도 행동할 수 있는 힘도 의지도 없습니다. 일어나라고 했을 때, 살아있는 자는 그 말에 의해서 스스로의 의지로 일어날 수 있지만 죽어있는 자는 아무리 일어나라고 외쳐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신자는 살아있는 자입니까 아니면 죽어있는 자입니까? 많은 사람들은 이 물음에 대해서 죽어있던 자가 예수님의 은혜로 산자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물론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예수님의 은혜로 산자가 되었다는 말에 대해서 오해들을 하고 있습니다. 은혜로 산자가 되었다는 것을 은혜를 입고 스스로 생각하고 활동할 수 있는 힘이 주어졌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은혜를 입기 전에는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생각도 못하고 신앙의 행동도 할 수 없는 죽은 자였는데, 은혜를 받고 힘을 얻어서 얼마든지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생각을 하고 신앙의 행동을 하며 살아가는 능력을 부여받은 자가 된 것으로 여깁니다. 결국 처음에는 죽은 자였고 선에 대한 가능성이 없는 전적 타락한 인간이었는데, 나중에 은혜를 입은 후에는 살아난 자가 되고 선을 실행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인간이 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한번 은혜를 받은 후에는 또 다시 은혜가 필요 없다는 것이 됩니다. 은혜를 받은 후에 또 다시 은혜가 필요한 경우는 은혜의 힘이 점차 약해져서 신앙이 게을러지고 나태해졌을 때라고 여깁니다. 이것은 성경을 전적으로 무시하고 오직 인간을 중심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인간이 죽은 자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계속 죽은 자라는 것은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산자라는 것은 스스로 활동하고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졌다는 의미에서 산자가 아니라 살려주신 분을 중심으로 하고 살아가게 되었다는 의미에서 산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덤에 갇힌 나사로에게 나오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자 죽었던 나사로가 걸어 나왔습니다. 과연 이것이 나사로 스스로의 의지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 눈이 번쩍 떠지고 '예수님이 나오라고 하니까 나가자'라고 결심하고 움직인 것입니까? 아닙니까? 나사로는 죽은 자입니다. 죽은 자가 나오게 된 것은 말씀이 스스로 실행하도록 한 것입니다. 즉 말씀에 능력이 있고 그 능력이 나사로를 나오게 한 것이지 말씀에 대해서 인간이 스스로 반응한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앉은뱅이더러 일어나 걸어가라고 하셨을 때도, 말씀이 일어나 걷도록 한 것이지 인간에게 일어나 걸을 수 있는 힘이 부여된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앉은뱅이는 오직 예수님만 증거 했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산자의 의미입니다.

살았다는 것은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지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게 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가 살면 예수가 죽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자가 살아서 자신을 자랑하고 드러내고 자기가 체험한 경험을 의지해 버릴 때 자연히 예수님의 은혜는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즉 자신에게 주어진 예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 경험이나 자기 행위를 드러내기 때문에 자기 이름은 살지만 예수님의 은혜는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는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흔히 목사들이 말하기를 살아있는 교회가 되자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말을 하는 목사들이 상상하는 살아있는 교회란 무엇입니까? 열성적으로 활동하는 교회입니다. 죽어 있다는 것은 움직이지 않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활동이 없는 교회는 죽은 교회고 생명이 없는 교회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교회, 생명이 있는 교회로 인정받기 위해서 교인들에게 수많은 활동거리를 제공하고 활동하도록 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살아있는 증거로서 전도를 자랑하고, 선교를 자랑하고, 구제를 자랑하고, 환경운동 등 인간의 활동을 내세우게 됩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예수님은 어디 계십니까? 예수님이 안계셔도, 예수님의 은혜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인간들이 단합을 해서 교회답게 활동할 수 있는데 눈치 없이 예수님이 그 속에 끼어 들어봐야 뒷방 늙은이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있어서 예수님이 살기 위해서는 필히 교회가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살아있는 교회임을 증거하기 위해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업적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교회 되게 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어린양의 피를 믿는 것이지 결코 그들이 가지고 있는 할례나 약속이나 율법이 이스라엘 되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습니다.

4,5절을 보면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이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형제들에 대해서 고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고통은 자신이 마치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듯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당시 유대인들의 처지를 마치 자신의 당한 것처럼 여기고있는 모습입니다. 즉 당시 유대인들의 처지가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음을 말해줍니다. 그것을 아는 사도 바울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그 고통과 아픔의 자리에서 자기 형제들을 향해서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시 유대인들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수밖에 없는 처지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무시하고 사는 것입니다. 은혜를 모르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자랑하고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자랑하고 내세웠습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에서 말한 대로 양자 되었다는 것, 이스라엘에게 영광과 언약과 율법을 세우셨다는 것, 예배와 약속들이 있다는 것,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다는 것, 이러한 것들이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는 자랑거리였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러한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약속을 가졌고 언약이 있고 율법이 세워졌고 양자 되었고 그들의 혈통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났다고 해도 그것이 구원의 조건이 되는 것도 아니고 이스라엘 되는 조건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오해했던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으로 구원받은 줄로 알았습니다. 마치 교회가 주일성소를 가지고 있고, 십일조를 가지고 있고, 기도하고 전도하는 그런 행위들을 가지고 있으면 교회가 되고 구원받는 자가 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역시 이스라엘이 죽어야 그리스도가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죽는다는 것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있는 것을 자랑하지 말고 내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구원과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단이 교단의 전통을 자랑하고 교단에 소속된 교회의 수를 자랑하고 과거의 신앙 행위를 자랑하는 이런 모든 것이 예수를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입으로는 주님의 은혜라고 합니다. 은혜로 이렇게 커졌다는 것입니다. 은혜가 주어진 증거를 외적인 증가를 통해서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예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아는 자라면 결코 외적인 것을 은혜의 결과로 내세우지 않습니다. 다만 그리스도의 사랑을 안다는 것, 그것 하나만으로 은혜를 말하고 은혜에 감사하게 됩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살아있는 교회고 신자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우리에게 오심으로서 우리의 죄에 대해서 책망하시는 이유도 우리를 죽이시고 대신 그리스도를 살게 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만 높임 받고 그리스도만 찬양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죽이시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예수가 삽니다. 교회가 죽어야 예수가 삽니다. 교단이 죽어야 예수가 삽니다. 은석교회가 죽어야 예수님이 삽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다는 고통이 얼마나 큰가를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얼마든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감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데 그리스도의 사랑이 자신을 저주에서 건져주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과연 사도 바울에게 무엇이 더 필요했을까요? '저주에서 건져줌 + 돈'이었습니까? 아니면 '저주에서 건져줌 + 출세'였습니까? 아무것도 필요 없었습니다. 오직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랑이 주어진 이상 바랄 것도 부러울 것도 없는 사람이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을 밀쳐냅니다. 우리의 열심, 행위, 예배당, 이런 모든 것을 밀쳐 내버리고 오직 홀로 있고자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여러분이 가진 것을 나타내려고 하지 마십시오. 돈이든 자식이든 그것을 자랑하지 마십시오. 또는 오랜 세월의 신앙 경력이든, 체험이든, 열심히든 아무것도 가지려고 하지말고 내세우려고 하지 마십시오. 이러한 것을 나타내려고 하는 순간 여러분에 의해서 예수님이 죽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은 모두가 배설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자랑했던 양자됨, 영광이 있고 율법에 있고 언약이 있고, 심지어 그리스도가 자신들의 혈통을 통해서 난 것까지 모두가 배설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알고 난 사도 바울이 육신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지 않았습니까? 병고침 받고, 사업이 잘되고, 교회가 부흥되는 것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저주받은 우리를 건져 주신 것입니다. 이 사랑만 자랑하는 자가 사랑 받은 자입니다. 그래서 진심으로 사랑을 받은 자는 주님을 위해서 자신은 얼마든지 죽어지기를 소원하게 됩니다. 내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살고 사랑과 은혜나 높여지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