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9:6 이스라엘

롬 8:35절에 보면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신자가 그리스도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이 신자를 붙들고 있기 때문에 환난, 곤고, 핍박, 기근, 적신, 위험, 칼과 같은 상황에서도 그리스도를 의지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믿음이 좋아서 어떤 어려움에서도 주님만 의지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포기하지 않도록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하나님이 택한 자는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보여주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을 보지 않습니다. 즉 인간이 잘하면 사랑하고 못하면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하셨기 때문에 무조건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은 인간을 보고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보고 일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결코 포기되어지지 않는다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가지 의문을 가져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을 가리켜서 약속의 민족이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민족이라면 이스라엘은 구원에 있어서 결코 포기되어져서는 안되는 민족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멸망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까? 이러한 의문은 구원이 포기되어지지 않는 이스라엘과 구약에 나오는 이스라엘을 같은 의미로 생각하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본문 6절에 보면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라고 말씀합니다. 분명 이스라엘에게서 난자라면 이스라엘 사람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한국 사람을 통해서 난자라면 다 한국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에게서 났다고 해서 다 이스라엘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유대인에게는 아주 충격적인 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껏 그들이 생각하는 이스라엘 사람은 할례와 율법과 제사와 약속 등등의 것을 소유한 자로 생각했습니다. 4-5절을 보면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라고 말씀하는 대로 양자됨, 영광, 언약, 율법, 예배, 약속, 자신들의 혈통으로 나신 메시야, 이러한 조건들이 자신들을 이스라엘 사람으로 굳게 보증하고 있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스라엘에게서 났다고 해서 다 이스라엘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지금까지의 전통적인 생각과는 다른 것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을 어떤 조건을 갖춘 상태로 이해를 했습니다. 즉 이스라엘이 되는 데는 율법이 있어야 하고 제사가 있어야 하고 약속이 있어야 하고 메시야가 그 혈통으로 나야 한다는 등의 조건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조건을 갖춘 민족은 바로 우리 유대인 외에는 없으니까 우리가 바로 틀림없는 이스라엘이다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스라엘이란 혈통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분명 이스라엘의 조상 중에는 아브라함이 있습니다. 야곱이 있고 이삭이 있고 모세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셔서 쓰셨던 모든 인물이 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조상이었습니다. 그런 조상의 후손이 바로 자신들이니 만큼 자기들이 이스라엘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의심할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부정하고 나선 분이 예수님입니다. 마 3:9절에 보면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고 말씀하심으로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의미를 전혀 다르게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로마서를 살펴오면서 분명히 알 수 있었던 것은 이스라엘이 무엇을 오해했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율법이 주어져 있고 그 율법을 지킴으로서 이스라엘다움이 유지되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격이 지켜진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율법을 행함이 아니라 믿음이 곧 이스라엘다움이고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과 유대인의 대립이었던 것입니다.

유대인은 이스라엘에게서 나면 이스라엘이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스라엘에서 났다고 해서 다 이스라엘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말한 이스라엘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우선 생각할 것은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이스라엘 되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그들에게 율법을 주고 제사를 드리게 하고 그들의 조상에게 약속을 하셔서 그 약속을 믿고 사는 민족이 되게 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러한 것들이 있음으로 이스라엘 된다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한결 같이 '너희 죄가 사함 받기 위해서는 대신 피 흘릴 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율법이 이것을 말하고, 제사가 이것을 말하고, 약속이 이것을 말하고, 할례가 이것을 말합니다. 내 죄를 대신 지고 죽는 자, 즉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내가 산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율법이고 할례이고 제사고 약속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말하는 참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에게서 난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난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서 난자라면 이스라엘이라는 자신의 혈통을 자랑하고 높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로 난자라면 그는 그리스도의 피를 자랑하고 높이게 됩니다. 참 이스라엘과 참 이스라엘이 아닌 자의 차이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게서 났다고 해서 다 이스라엘이 아니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나는 내 죄를 대신 지고 죽으신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는다'는 고백이 없다면 그는 이스라엘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시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에 자기 죄를 알고 주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바로 그리스도의 긍휼과 은혜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역시 율법을 통해서 자신의 죄인 됨을 알고 제사를 통해서 대신 죽은 분의 피로 인해서 살았다는 것을 알고 약속을 통해서 우리의 의가 아니라 대신 오신 분의 의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을 안다면 이스라엘이나 이방인이나 그리스도의 피안에서 한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안에서 한 백성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로 난자는 자기의 죄인 됨을 알고 대신 피 흘리신 주님의 공로로 살았다는 생각으로 사는 자들이기 때문에 결국 같은 생각과 같은 마음으로 모여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피안에서는 가문도 교단도 종교도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오직 나같은 죄인을 위해서 대신 죽으신 주님의 피흘리신 긍휼과 자비로움으로 살았다는 것만 있을 뿐입니다. 즉 주님의 긍휼로 산자만 있을 뿐이지 재건교인이니 합동이니 고신이니 기독교인이니 불교인이니 하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종교는 다 같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가 틀려서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신 죽으신 긍휼과 은혜로 살지 않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 스스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자랑했지만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면 분명히 아브라함과 같은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행위를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의로 보셨습니다. 따라서 만약 유대인이 진심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말하려거든 아브라함이 자신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을 믿은 그 믿음이 그들에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을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 인정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그 모습이 있는 자가 진심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누구입니까? 그리스도의 피로 난자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그냥 나온 것이 아닙니다. 장자 재앙에서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바름으로서 죽음에서 살아남으로 말미암아 나오게 된 자들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란 어린양의 피로서 살아난 자들이라는 의식이 사라지면 안되었습니다. 어린양의 피로 살았다는 의식이 없다면 그들은 이스라엘이라 인정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민족적인 이스라엘은 성경에서 말씀하는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택한 자로서의 이스라엘은 자기 죄를 아는 자들입니다. 내 죄를 대신 지시고 피흘리신 예수님의 공로로 내가 살았다는 것을 고백하며 모이는 무리들이 이스라엘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교회입니다.

신자란 예배와 기도와 성경과 헌금 전도 등등의 교회 행위를 가진 자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신자란 자기 죄를 아는 자입니다. 그리고 대신 피 흘리신 주님의 의로 살았다는 것을 고백하며 감사하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참된 신자는 자신에게 주어져 있는 그 어떤 것도 자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신자되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로 새롭게 태어난 자들이 모이는 모임입니다. 이 교회에서는 오직 그리스도의 피만 높이고 자랑합니다. 피로 인해서 살아났기 때문에 나를 살리신 피만 자랑하게 되는 것이 정상이지 않습니까? 돈으로 산다는 생각을 가진 자는 돈을 자랑할 것입니다. 남편의 사랑으로 사는 자는 남편의 사랑을 자랑할 것이고, 보석으로 사는 자는 자기 몸의 보석을 자랑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는 그리스도의 피로 살았습니다. 죽어야 할 악한 우리들이 주님의 의의 피로 죄를 용서받고 살았습니다. 이것을 아는 신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 마음에서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마음과 동일한 마음으로 사는 것이고 그가 바로 참 이스라엘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