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9:7-9 약속의 자녀

교회의 교회 됨은 오직 그리스도가 기준입니다. 교회가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느냐에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피를 믿으면 그것이 곧 교회입니다. 만약 교회의 교회 됨이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믿음에 선교사 보내기, 윤리운동하기, 사회활동하기, 이런 잡다한 것들을 보탬으로서 되어지는 것이라면 한적한 시골에서 다 쓰러져 가는 예배당에 노인네 몇 명 모이는 교회는 교회 되기에 힘들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시골에 있는 그러한 교회도 교회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도시의 거대한 교회와 과연 동등한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교회란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자들의 모임입니다. 이것 외에 더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습니다. 예배당이 있어야 하고, 목사가 있어야 하고, 장로가 있어야 하고, 좋은 일을 해야 하고, 이러한 것들은 교회 됨에 있어서 전혀 의미가 없는 것들입니다. 십자가에서 흘린 그리스도의 피가 나를 구원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믿습니다'라는 그 마음 하나면 이미 교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니 교회 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한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이스라엘에서 난자라고 해서 이스라엘 되는 것이 아니라는 내용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자신들만 가진 것이라고 자부심을 가졌던 약속이나 율법, 그리고 메시야가 자기들의 혈통으로 나신다는 것까지도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스라엘은 어린양의 피로 난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어린양의 피로 살았다는 것을 믿는 자들, 이들이 바로 이스라엘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역시 같은 의미의 말을 하고 있습니다. 7절을 보면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논리가 과연 우리들의 상식에 맞는 말입니까? 세상 상식으로 볼 때는 분명히 아브라함에게서 난 자면 다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이삭 역시 아브라함에게서 난 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서 난 자가 아브라함의 씨가 아니라 이삭으로부터 난 자가 아브라함이 씨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육신의 자녀와 약속의 자녀 때문입니다.

8절에서 말씀하기를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고 합니다. 세상의 인간이 둘로 구분되고 있습니다. 육신의 자녀와 약속의 자녀입니다. 약속의 자녀만이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왜 이렇게 세상 인간을 둘로 구분하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도 인간을 둘로 구분하셨습니다. 알곡과 가라지 입니다. 알곡은 곳간에 들이고 가라지는 불에 태운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을 둘로 구분하는 배경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심판이 있기에 산자와 죽은 자로 구분되는 것입니다. 심판에서 산 자는 약속의 자녀입니다. 약속의 자녀만이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절대 불변의 원칙입니다.

약속의 자녀는 인간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가 바로 약속의 자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약속의 자녀가 되자라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약속의 자녀가 되자는 것은, 약속의 실현 능력이 우리에게 있다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약속의 자녀는 되는 것이 아니라 되어집니다. 따라서 신자는 약속의 자녀란 어떤 자인가를 찾아서 자신을 항상 점검하고 내가 지금 어떤 길을 가는지를 확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아브라함의 씨는 자녀가 아니고 이삭으로 난 자라야 아브라함의 씨가 되는 것입니까? 약속의 자녀는 무엇이고 육신의 자녀란 무엇입니까? 약속의 자녀란 약속에 의해서 태어난 자이고, 육신의 자녀란 육신에 의해서 태어난 자를 의미합니다.

창 6: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신이 사람과 함께 하지 않은 상태, 그것을 가리켜서 육체라고 말합니다. 여호와의 신이 함께 할 수 없는 인간 된 것은 인간이 더러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아담이후로 육체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육신의 자녀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러면 모두가 육신의 자녀인데, 어떻게 약속의 자녀가 따로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까? 요 1:13절에 보면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로 난 자들이 따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육신의 자녀와 약속의 자녀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약속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의 차이입니다. 육으로 난 자는 그리스도를 의지하지 않습니다. 오직 육을 의지할 뿐입니다. 즉 눈이 보이는 것을 의지하고 힘으로 삼는 다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 약속이란 믿을만한 것이 못됩니다. 약속에 무슨 힘이 있습니까? 약속이 여러분의 아들을 대학에 들어가게 해줍니까? 약속이 여러분에게 돈 다발을 안겨줍니까? 약속에는 오직 천국만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약속에 대해서 가볍게 생각해 버립니다. 이들이 바로 육으로 난 자들입니다. 육이 아닌 것은 가치 없게 취급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삭으로 난 자가 아브라함의 씨라고 여김을 받는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두 아들이 있습니다. 이삭과 이스마엘입니다. 이스마엘이 먼저 난 아들이고 이삭은 나중에 난 아들입니다. 본문에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는 것은 이스마엘을 아브라함의 자녀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은 약속을 믿지 못하는 아브라함의 생각에 의해서 태어난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아들을 기다리면 됩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나가도 약속이 실현될 가망성이 없자 인간의 방법과 수단을 동원해서 아들을 낳게 됩니다. 즉 사래의 여종인 하갈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아들을 낳은 것입니다. 그리고 뒤에 이삭을 낳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 이삭을 바치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삭을 바치기 위해서 모리아 산으로 데려갑니다. 그리고 이삭을 죽이려는 순간 하나님의 말씀이 들립니다. 이삭을 죽이지 말고 숲에 가면 수양이 있으니까 그 수양을 이삭 대신 제물로 바치라는 것입니다.

이삭을 바치라고 하신 하나님이 이삭 대신 수양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이것이 이삭을 통해서 보여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내가 죽어야 할 자리에 대신 죽을 자를 준비하신다는 것입니다. 대신 죽을 자를 준비하신 하나님, 아브라함은 '여호와이레'라는 말로 준비하신 하나님을 부릅니다.

이삭이 약속의 자녀라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아들이다'는 의미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삭에게 담겨 있는 약속은 대신 죽을 자를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삭으로 난 자라야 약속의 자녀라는 것은, 내가 죽어야 할 자리에 나 대신 죽을 분을 하나님이 보내신다는 것을 믿고 사는 자를 가리킵니다. 신약식으로 말하자면 내가 죽어야 할 자리에 그리스도가 대신 죽으심으로 나는 산자가 되었습니다는 고백으로 사는 사람, 이가 바로 약속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영에 의해서 난 자입니다.

우리가 이삭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죽어야 할 처지였는데, 다시 하나님이 대신 죽을 수양을 준비하심으로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준비하신 수양으로 인해서 죽은 자가 산 것입니다. 이것이 이삭에게 담겨 있는 부활의 약속입니다. 그리스도로 인해서 살았다는 것, 이것이 바로 부활된 자로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삭의 마음이 우리에게 있느냐는 것입니다. 있으면 그가 바로 약속의 자녀입니다.

육신은 심판의 대상입니다. 우리가 바로 심판의 대상인 육신의 자녀였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성령이 오셔서 그리스도를 알게 하셨습니다. 나 대신 죽은 분이 누구인가를 알게 하셨습니다. 세상 상식이 깨어지고 내 생각과 마음이 깨어지고 새로운 생각으로 새로운 마음으로 살아가는 자가 되었습니다. 거듭난 자가 된 것입니다. 새로운 자가 된 것입니다. 육이 들어 있던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들어 있는 자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아니면 죽어야 했던 존재가 바로 나 자신임을 마음 길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약속의 자녀입니다. 주님 때문에 살았습니다, 그 고백 한마디가 약속의 자녀임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