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9:10-13 미리 정하심

현대 사회는 민중들이 교회를 자기 입맛대로 골라 가는 풍토 속에 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교회 경쟁시대이기 때문에 수많은 교회들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른 교회와는 색다른 맛을 제공해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교회는 뭔가 다르다는 인식을 심어줘야 민중들을 모을 수가 있을 것이고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민중들이 교회에 대해서 무엇을 원하는가를 살필 수밖에 없고 민중들이 원하는 것을 교회에 도입함으로서 민중들의 교회로 남고자 하는 것입니다. 결국 현대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라 민중들의 교회로 전락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민중들의 기호가 교회를 다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풍토 속에서 교회가 민중들의 기호를 외면해 버리고 곧이곧대로 성경을 그대로 표현한다는 것은 사실상 교회를 포기하지 않고는 힘든 일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쨌든 교회란 민중들이 있어야 유지될 수 있습니다. 민중들이 외면한 교회는 결국 문을 닫을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교회는 민중들을 확보하기 위해서 철저하게 민중들의 기호에 맞는 교회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민중을 두려워하는 교회로 전락되고 만 것입니다. 아니 아예 처음부터 교회가 아니었다고 해야 맞을 것입니다.

민중의 기호를 의식한 성경은 이미 성경이 아닙니다. 성경이란 처음도 끝도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성경을 곧이곧대로 있는 그대로 드러낼 때 하나님의 말씀이 계시로 드러나는 것이고 그 말씀을 중심으로 모일 때 그 모임을 교회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민중의 기호가 성경을 해석하고 이해하는데 삽입이 된다면 결국 민중의 기호에 맞는 성경으로 탈바꿈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한다면 우리의 기호는 던져 버리고 말씀을 대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상식과 기호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오히려 전혀 반대된 모습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때문에 내 상식에 맞지 않고 내 기호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말씀을 밀친다면 그것이 곧 주님을 죽이는 행위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이 당시 종교인들의 상식과 기호에는 전혀 맞지 않은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죽임으로서 자신들의 상식과 기호를 지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오늘 본문 역시 현대인들의 상식이나 기호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오히려 반대된 입장에 있는 말씀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선함과 착함으로 구원을 확보하려고 하고 신자된 증거로 내세우자 하는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드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비록 교회에 다니지는 않지만 교회 다니는 사람보다 오히려 선하고 착한 일을 많이 하고 사회적으로 본보기가 되는 소위 훌륭한 인격자들 선행자들이 많이 있는데 그들의 행위와 상관없이 단지 하나님이 택하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지옥 간다는 것이 교회를 다니는 사람에게조차 난감한 말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이삭으로부터 난자라야 아브라함의 씨요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아브라함처럼 믿음 좋은 사람에게서 난 자녀라면 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닐까라는 짐작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서 나온 것을 씨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삭에게서 나와야 그것을 씨로 인정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이삭은 인정하시고 아브라함은 인정하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사람에 차별을 두시는 것입니까? 이삭은 되는데 왜 아브라함은 안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사람을 보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선행을 보시고 판단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즉 이삭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담겨 있기 때문에 이삭에게 담겨 있는 약속을 인정하시는 것이지 이삭 자체를 인정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이삭으로 난자라야 자녀로 인정하시겠다는 것은 이삭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경험한 자가 곧 자녀라는 것입니다.

이삭이 경험한 약속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신이 죽어야 할 자리에 하나님이 준비하신 수양이 대신 죽는 것입니다. 즉 수양의 죽음으로 자신이 살아난 것을 체험한 것, 이것이 약속입니다. 따라서 이삭으로부터 난 자녀는 이삭처럼 죽어야 할 내가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이 대신 죽으심으로 살아났다는 경험이 있는 자입니다. 이러한 얘기들은 인간의 상식이나 기호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얘기들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의 상식을 따라가지도 않고 인간의 기호를 인정하지도 않는다는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서 어떤 행위를 찾으려고 합니다. 믿음의 조상다운 행위, 약속으로 태어난 자다운 행위를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괜히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고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약속으로 태어나게 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는 행위를 말하면서 '봐라 믿음의 조상다운 행동이지 않는가? 이런 믿음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잘봤고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지 않았는가?'라고 말하기도 하고 이삭이 순순히 제물 되는 것을 통해서 '이삭의 순종을 보라. 약속의 자식다운 모습이 아닌가?'라고 말함으로서 하나님께 선택된 근거를 인간의 행함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것을 철저히 묵살해 버립니다. 10-13절을 다시 보면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이삭에게는 에서와 야곱이 있습니다. 이 둘 중에서 하나님은 야곱을 택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에서와 야곱은 쌍둥이입니다. 같은 날 같은 시간에 낳았습니다. 결국 누구는 선택하고 누구는 버려야 할 외적 조건이 없는 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13절에서 말씀한 대로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것을 미리 정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기로 이미 작정하신 것입니다. 사랑할만해서 사랑하고 미워할 만해서 미워한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로 작정하셨고 미워하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사랑하고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하나님의 처사가 이해가 되십니까? 이러한 하나님의 처사 아래서 미워하기로 작정된 에서는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자신의 잘못된 행위 때문에 미움을 받는다면 덜 억울하겠지만 행위가 있기 전부터 이미 미움받기로 작정되었다는 것이 에서 입장에서 납득이 가겠습니까?

이렇게 나지도 아니하고 선이나 악을 행하지도 아니한 때에 택했다는 것은 결국 인간의 선행과 악행이 하나님의 택하심에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고 구원에 기준이 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소위 선행을 주장하고 선한 행위가 곧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는 길임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성경에서 삭제해 버리고 싶을 만큼 대하기 싫은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인간의 선행이 하나님의 사랑을 끌어당긴다고 믿고 있습니다. 사랑을 할 만한 사람과 미워할 만한 사람으로 구분되는 것은 인간 행위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행위를 조건으로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사랑을 받게 된 것입니다.

왜 에서가 아니고 야곱입니까? 그 대답은 오직 부르시는 분이 결정하신 선택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데 있어서 우선권이 없는 것입니다. 어떤 행위가 있든 어떤 지위에 있든 상관없이 그것들이 부르심의 우선권으로 작용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교회들이 인간의 행위를 조건 삼아 부르심의 우선권으로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철저한 반발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선택을 통해서 하나님만이 세우시고 허무시는 분이고 살게도 하시고 죽게도 하시는 분임을 확증하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즉 선택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나님이심을 증거 하는 하나님의 자기증거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선택된 자에게서 무엇을 요구하시겠습니까? 선행이 아니라 '하나님이 죽음과 삶의 주인이시다'는 것을 증거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의 결과입니다. 구원이 포기될 수 없는 이유는 우리의 행위를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 근거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우리 행위를 묻지 않으셨기 때문에, 마지막까지도 우리 행위와 관계없이 긍휼과 자비에 의해서 마쳐질 것입니다. 따라서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알게 된 자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만 생각할 뿐이지 자기 행위를 근거 삼지 않을 것입니다.

행위가 아니라 택하심을 따라 일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직 하나님의 능력과 권위만을 세상에 세우시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인간의 행위를 근거로 일하셨다면 세상에 세워지는 것은 인간의 영광과 능력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하심을 따라 일하신다면 행위가 세워질 근거가 없습니다. 오직 창조하시고 택하시고 부르신 하나님만 세워질 것입니다. 하나님만 세우는 자, 그가 바로 택함 받은 자이고 증인으로 사는 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