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 수고하고 애를 써야 한다는 것은 교회가 가지고 있는 기초적인 상식입니다. 수고하지 않고 애를 쓰지 않으면서, 즉 아무런 노력도 없고 하려고 하는 의지도 없이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상식으로 자신의 신앙을 철저하게 유지하고자 하는 인간들에게 상식에 전혀 어긋나는 말을 복음이라고 전했을 때 그 반응은 뻔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들을 귀 있는 자만 들을 수 있는 것이고, 들을 귀라는 것은 성령이 오심으로 가능하게 되어지는 것이다.
결국 성령 받은 자가 누구냐는 것은, 누가 과연 자신의 상식을 벗어난 채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느냐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해가 된다는 것은 자기 상식이라는 울타리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상식을 버린다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냐라고 할지 모르지만, 인간이 스스로 자기 상식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가령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말을 들었을 때 여러분은 그것을 믿겠습니까? 아마 그 말을 듣자 마자 '그런 거짓말이 어디 있느냐?'라고 할 것입니다. 혹 살아났다는 증거를 보인다고 해도 '그 사람이 애당초 완전히 죽은 것이 아니라 기절했던 것이 아니냐?'라는 말로서 죽은 자가 살았다는 것을 부정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처럼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말에 대해서 '거짓말이다'라는 반응을 보이게 되는 것은 여러분의 상식 때문입니다.
우리의 상식은 죽은 사람은 절대로 살아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은 사람이 살았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의 상식이 이해를 용납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죽고 다시 부활했을 때도 사람들은 그것을 믿지 않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신학자들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기에 시체 도난설이니 기절설이니 하는 여러 가지 웃기지도 않는 말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상식에 맞지 않는 성경의 말들을 상식에 맞는 말로 바꾸어서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학자들이 성경을 연구하는 의도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가고 하나님을 배워가는 신학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들어 내는 신학이 되버린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이해와 판단이 상식을 기준으로 해서 되어지기 때문에 상식에서 벗어난 것은 거부하게 되고, 따라서 성경 역시 상식에서 벗어난 말일 때는 거부하게 되는 것이 인간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 성령이 오셔야 한다는 것은 성령이 오심으로서 상식이라는 우리의 기준이 모두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의 상식이라는 것이 잘못되었음을 알게 되고, 따라서 우리 상식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원칙이라는 시각에서 성경을 이해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듭난 자에게서 일어나는 현상이고 하나님이 택한 자에게서만 볼 수 있는 모습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역시 인간의 상식을 전혀 옹호해주지 않은 말씀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시고 미워하시는 것은 인간의 행위를 근거로 하지 않습니다. 이미 태어나기 전부터 선악의 행위가 있기 전부터 하나님에 의해서 결정된 사항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이 인간의 상식과는 도저히 맞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의 상식은 열심히 한 자에게 상을 주고 게을리 한자는 벌을 주는 것입니다. 착한 일을 한 자를 사랑하고 나쁜 일을 한 자는 미워하는 것이 상식입니다.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자연스럽게 선악에 의한 상벌로 흘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태어나기도 전에 사랑할 자 미워 할 자를 결정했다고 합니다. 열심히 십일조하고 기도하고 봉사해서 복을 받을 줄 알았는데 그런 행위를 하기 이전에 이미 복을 받을 자와 받지 못할 자로 결정되었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과연 누가 이러한 하나님의 원칙에 대해서 이해가 되겠습니까?
다음 주일이 성탄절인데, 성탄절만 되면 생각나는 사람이 산타클로스입니다. 산타클로스는 아이들에게 선물을 가져다주는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누구에게 선물을 줍니까? 나쁜 아이 입니까? 착한 아이 입니까? 캐럴 송이라고 하는 크리스마스 노래에도 '울면 안돼 울면 안돼 산타할아버지는 우는 아이에게는 선물을 안주신데요'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 상식입니다. 우는 것은 착한 아이의 행동이 아니라 나쁜 아이의 행동으로 규정을 짓고 그래서 우는 아이에게는 산타할아버지가 선물을 안준다는 것이다. 따라서 선물을 받고 싶은 아이들은 울음이 나와도 선물을 받기 위해서 억지로 참아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교인들의 신앙생활이 꼭 이런 식입니다. 하나님은 나쁜 신자에게는 축복을 안주신다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래서 나쁜 신자로 여겨지는 행동에 대해서는 삼가야 하고 대신 착한 신자로 여겨지는 행동에 대해서는 애를 쓰면서 실천해야 했던 것입니다. 십일조가 착한 신자의 행동이니까 착한 신자로 보여지기 위해서는 십일조를 해야 하고, 기도하는 것이 착한 신자의 모습이니까 억지로라도 기도를 해야 했던 것이 오늘날 교인들의 신앙생활입니다. 결국 자기 상식에 맞추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시고 미워하시는 것은 인간의 애씀과 수고와 착함을 보고 결정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16절에서도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말합니다.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고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우리가 원한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또 사랑을 받기 위해서 애쓴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상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맥이 빠지고 힘을 잃게 만드는 말입니까?
그동안 십일조를 한 것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복을 주실 것을 기대하고 한 행위였는데 십일조 했다고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라고 할 때 '그러면 왜 십일조를 하느냐?'는 반발과 동시에 십일조에 대해서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헌금을 하는 이유가 예수님의 피로서 구원을 얻은 은혜를 담아서 전달하기 위한 도구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질 복의 근거로 생각을 해버리기 때문에 복은 십일조와 상관이 없다고 할 때 십일조를 해야 할 이유가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십일조를 하기 이전에 이미 사랑할 자와 미워할 자가 결정되어 있다는 말을 싫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말은 교인들이 십일조를 하고자 하는 의욕을 꺽어버리는 말이기 때문에 금기시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동안 교회는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열심히 일하고 활동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이고,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하나님이 복주신다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내가 고생하고 힘들지만 나의 이 고생을 하나님이 외면치 않으시고 보상하신다는 것을 생각하면 돈을 내도 좋았고 봉사해도 좋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원한다고 해서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애쓰고 달음박질한다고 해서 복을 받고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고 할 때, 그들은 결국 행동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행동이 없는 교회는 죽은 교회로 여기기 때문에 목사들은 자신의 교회가 그러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 두려워서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말인데도 불구하고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축복의 근거를 자신의 손에 쥐고 있으려고 합니다. 내가 못하면 못한 것만큼 벌을 받고 하면 한 것만큼 보상을 받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축복이 인간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손에 달려있다는 것에 대해서 마음 불편해 하는 것입니다. 축복의 근거가 자신에게 있어야 자기 행동을 보고 안심할 수 있는데, 하나님께 달려있다고 해버리면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해서 축복을 확인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식으로 하나님에게 도전하는 인간들은 '그러한 하나님은 불의한 것이 아니냐?'라고 합니다. 즉 그런 하나님은 인간을 바보 취급하는 하나님이고, 성령을 줘서 거듭나게 했으면서도 거듭난 자가 선도 행하지 못하는 무능한 자로 취급해 버리는 것이 아니냐는 항변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항변의 내면에는 이런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강한 부정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아셔야 할 것은 인간의 상식과 마찰이 없는 복음은 의심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왜 바리새인들과 마찰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리새인들의 상식과 전혀 맞지 않는 말씀만 하셨기 때문입니다. 50%는 서로 통하고 50%는 안맞았던 것이 아닙니다. 100%가 맞지 않았던 것입니다.
복음은 마찰 없이 쉽게 이해되고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속에서 여러분 상식과 끊임없이 마찰되고 충돌되는 과정 속에서 서서히 여러분의 상식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하늘의 원칙이 새로운 상식으로 자리함으로서 비로소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 왜 참된 하나님이신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상식은 잘한 사람은 상을 주고 못한 사람은 벌을 주는 것이 하나님의 공평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잘한 행동을 할 사람이 없다고 할 때, 하나님의 공평은 우리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와야 합니까? 그것은 멸망입니다. 누구도 하나님의 들만한 행동을 할 사람이 없기에 하나님은 태어나기도 전에 사랑할 자를 정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불의라고 할 수 있습니까? 공평치 못한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말입니다.
구원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원한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도 아니고 달음박질한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 받은 자는 이것을 아는 자입니다. 내가 힘씀으로 축복을 받고 구원을 얻는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습니다. 다만 나를 사랑할 자로 부러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모든 행동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담아내는 도구로 여길 뿐입니다. 헌금을 해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담아내는 도구로 생각하고, 예배를 드려도 마찬가지고 봉사를 해도 역시 같은 생각으로 하게 됩니다. 그래서 신자의 행함은 뭔가 받아내기 위해서 애쓰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자로서 자신이 받아 누리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표현하는 수단일 뿐입니다. 때문에 모든 일을 즐거움으로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행동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의지와 애씀으로 행동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자 하신 자를 사랑하신 사랑으로 행동하며 살아가는 신자이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