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9:17-18 강퍅케 하심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때, 인간 편에서는 '누구는 구원하고 누구는 지옥 보내는가?'라고 불평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랑할 자와 미워할 자를 정해 놓으신 것은 애당초 사랑 받을 자도 미움 받을 자도 아닌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과 미움으로 갈라놓으신 것이 아닙니다. 만약 사랑도 미움도 아닌 중간 위치에 있는 것이 인간이라면 '왜 저 사람은 사랑하면서 나는 미워하는가?'라는 불평을 할 수가 있습니다. 더군다나 사람의 행실도 보지 않고 하나님 마음대로 사랑할 자와 미워할 자를 정해 놨다는 것은 얼마든지 하나님의 불의함으로 보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중간 위치에 있던 자가 아닙니다. 즉 사랑도 미움이 아닌 위치에 있다가 착한 일을 하면 사랑의 영역으로 부름 받고, 나쁜 일을 하면 미움의 영역으로 밀쳐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란 원래 하나님의 원수된 자입니다. 누구나 할 것 없이 모든 자가 하나님의 원수로 태어났고, 따라서 모두가 지옥 가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모두가 지옥 가는 존재인데 그 중에서 누군가를 긍휼히 여길 자로 부르시고 나머지는 그대로 지옥 가도록 놔두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는 긍휼히 여기시려면 다 긍휼히 여겨야지 왜 누구는 긍휼히 여기면서 누구는 그냥 지옥 가도록 놔두시느냐 고 반문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반문에 대해서 하나님은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라고 답을 내리십니다.

하나님이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를 미워하시든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대로 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인간은 반문할 것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원래가 지옥가야 할 자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을 안해줘서 그것 때문에 지옥가게 된 것이 아니라 날 때부터 죄인으로 나기 때문에 이미 지옥갈 자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사랑할 자를 따로 정하신 것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는 사랑을 받은 것으로 끝나는 것입니까? 사랑을 받은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받은 사랑과 긍휼과 자비를 세상에 증거 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사랑할 자로 부르신 자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사랑할 자를 정하시고 부르신 것은 그들을 천국 보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사랑할 자로 부르신 자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해서 세상에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증거 하도록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누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이냐?'라는 구분은 '누가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 하느냐?'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것을 말로 하는 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우리도 주님의 십자가를 믿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사랑을 말한다고 해서 증거 되는 것이 아니라 16절의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는 말씀처럼 우리가 원하고 애쓰고 달음박질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고자 하셨기 때문에 사랑을 받게 된 것임을 증거 하는 것이 참된 증거인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사랑할 자와 미워할 자를 정하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이름을 세상에 전파하기 위해서이지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인간을 위해서라면 모든 자를 다 사랑하는 것이 더욱 더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데 도움이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옥 보내는 자는 하나도 없이 모든 인간을 사랑해서 천국가게 한다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더욱 더 빛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되면 사망 속에서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이 증거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팽개친 채 단지 구원만 좋아하고 박수하는 것만 있을 것입니다. 마치 오늘날 성탄절을 지내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날 성탄절에 하나님의 심판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세상을 심판하시는 것인데, 심판은 빼 버린 채 구원을 말하고 사랑을 말하기 때문에 예수가 좋은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이름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심판 없이 사랑만 있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은 심판 속에서 자기 백성을 건지시는 것으로 증거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로를 강퍅하게 하셔서 하나님의 능력과 이름을 온 땅에 전파하시는 것입니다.

17,18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바로를 세우시고 그를 강퍅케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우리에게는 한가지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바로를 강퍅하게 하신 것이라면 바로의 강퍅한 마음은 하나님이 집어넣으신 것인가? 이런 의문이 들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에 강퍅을 집어넣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바로가 강퍅하게 된 이유는 하나님에게 있지 바로에게 있지 않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하게 하신다는 말씀은 무슨 의미입니까?

출 4:21-2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애굽으로 돌아가거든 내가 네 손에 준 이적을 바로 앞에서 다 행하라 그러나 내가 그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그가 백성을 놓지 아니하리니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놓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모세가 바로에게 가서 이적을 행해도 바로가 이스라엘을 놓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했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출 7:13절에 보면 "그러나 바로의 마음이 강퍅하여 그들을 듣지 아니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고 말합니다. 모세가 바로를 찾아가서 지팡이를 던지자 뱀이 됩니다. 그런데 바로가 애굽의 술객들을 부르자 그들도 지팡이가 뱀이 되게 합니다. 그러자 아론의 지팡이가 술객들의 지팡이를 삼켰는데도 불구하고 바로의 마음은 강퍅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도 지팡이를 뱀으로 만들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했다는 것은 인간을 의지할 수 있는 사건들을 바로 앞에서 일으키는 것입니다. 술객들이 지팡이를 뱀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모세를 무시한 것입니다. 이것이 강퍅케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하게 하십니다. 예를 들어서 교회에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사람을 보내십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사랑을 입지 못한 자들은 마음이 강퍅해집니다. 즉 하나님을 보기보다는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을 바라보고 그를 힘있는 자로 높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누군가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가 열심히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눈에 세상 것이 보이게 하시고 세상 힘이 보이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의지하게 하시는 것, 이것이 강퍅하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지만 세상을 의지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하나님 때문에 세상을 의지하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본래 날 때부터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는 자로 태어나는데 그 본성을 끌어내셔서 마음을 강퍅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출 8:15절에 보면 "그러나 바로가 숨을 통할 수 있음을 볼 때에 그 마음을 완강케 하여 그들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바로에게 개구리 재앙을 있게 합니다. 그러자 바로가 견디다 못해서 모세를 불러서 이스라엘을 내보낼 테니까 개구리를 떠나게 해달라고 합니다. 모세가 그 말을 듣고 개구리를 모두 죽게 합니다. 그러자 바로는 개구리가 사라짐으로서 한숨 돌리게 되자 마음이 다시 달라진 것입니다. 바로는 여전히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환경을 보고 자신을 봅니다. 그래서 숨을 통할 수 있게 되자 다시 이스라엘을 내보내면 노동을 시킬 사람이 없어지고 그렇게 되면 자신에게 손해가 되는 것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게 하심으로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하시는 것이 바로를 강퍅하게 하신 하나님인 것입니다.

바로는 이렇게 재앙을 받으면 내보낸다고 했다가 재앙이 사라지면 마음을 바꿔버리기를 반복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과 똑같습니다. 우리 역시 환경이 힘들고 어려워지면 하나님을 찾다가도 편안하면 하나님을 팽개치고 편안함을 즐기기가 일쑤입니다. 항상 내가 중심 되어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기로 하신 자는 마음을 강퍅하게 한 자가 깨달을 수 없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내가 바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할 자라는 사실입니다. 나 자신이 마음이 강퍅한 자이고 내가 바로 진노의 대상이고 하나님의 원수임을 깨달을 때 그러한 자신을 위해서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에 손을 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바로를 강퍅케 하심으로서 무엇을 드러내십니까? 그것은 인간은 모두 강퍅한 자이고 망해야 할 대상임을 드러내십니다. 이스라엘이 장자 재앙에서 살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바로처럼 강퍅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 역시 애굽을 보고 살아가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애굽에서 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속에 하나님이 사랑하기로 한 자들이 있습니다. 결국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를 세워서 강퍅케 하시고 이스라엘을 사랑하심으로서 주어야 할 인간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십니다. 그리고 인간의 원함과 달음박질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로 구원하심으로서 하나님의 이름을 온 땅에 전파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마음을 강퍅케 한 인간들은 오직 세상을 보고 살아갑니다. 세상만 보고 살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와도 세상 것을 구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그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거대하고 화려한 예배당을 보이게 하심으로서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하십니다. 이것이 강퍅케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긍휼히 여기시고자 하신 자는 항상 하나님의 긍휼만을 바라보게 됩니다. 나도 마음에 욕심이 가득한 자인데 그런 내가 하나님을 바라보게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이 나를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긍휼히 여기심을 받았다는 증거입니다.

죽어야 할 자가 하나님의 긍휼로 살고 있는 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하나님의 긍휼 앞에서 내세울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보는 겸손으로 살아가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