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 사람들은 단 몇 %라도 인간에게 가능성을 남겨두고 싶어합니다. 즉 인간에게 있는 자질을 가지고도 충분히 하나님을 찾고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오게 된 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면서 그 은혜 때문에 오늘날 한국 땅에 교회가 들어서게 되고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올 수 있도록 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오도록 역사 하신 분이고, 그 덕분에 우리가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에 있는 사람들이 로마서에 나오는 '복음에 빚진 자'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를 하겠습니까? '우리나라에 외국의 선교사가 복음을 전파한 것은 복음에 대해서 빚을 진 것이다. 이젠 그 빚을 갚아야 한다'라고 말하면서 빚을 갚는 것을 아직 기독교가 들어가지 못한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겠습니까? 즉 선교하는 것을 복음의 빚을 진 것을 갚는 것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할 때 한가지 우리를 난감하게 만드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전파된 후에는 예수님을 믿지 않은 책임을 인간에게 묻는다 할지라도 기독교가 전파되기 전에는 그 책임을 물을 수가 없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저도 신학교에서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 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라고 했을 때, 이 말씀이 충족될 수 있는 가장 첫 번째 조건은 '예수가 전파되어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가 전파되어 있지도 않은데 '예수 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가 전파되기 전에는?'이라는 의문이 등장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보편적으로 하게 되는 대답은 '그것은 그 시대 사람들의 양심에 의해서 판단된다'라는 것입니다. 즉 선한 양심이었으면 그 양심이 법이 되어서 그 사람을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대주의'라는 사람들은 각 시대마다 구원의 조건이 다르다는 말을 합니다. 율법이 없을 때는 양심 시대인데, 그때는 양심이 법이 되어서 구원을 받고, 율법이 주어졌을 때는 율법이 법이 되어서 구원을 받고, 예수님이 오신 후로는 예수님의 피를 믿음으로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문들이나 말들이 나오게 되는 것은, 인간에게 믿음에 대한 가능성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사임당이나 이순신 장군이나 율곡 이이 같은 그런 청렴한 사람들은 기독교만 전파되었다면 얼마든지 예수님을 믿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전파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몰라서 못믿었을 수도 있는데 예수님을 믿지 않아서 지옥 간다면 너무 억울한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대해서 항변을 한다면 어떤 항변이겠습니까? '왜 이순신 장군이 살아있을 때 기독교가 들어오도록 하지 않았습니까?'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항변이 인간에게서 나온다는 것 자체가 인간을 믿고 있는 것이고 인간에게 가능성을 두고 있는 결과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복음을 거부한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에게 오늘 본문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19절,20절에 보면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라고 말씀합니다.
18절에 보면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오직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자만 긍휼히 여김을 받고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택하지 아니한 자는 하나님이 그 마음을 강퍅케 하시며 구원을 방해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말할 때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반발이 뭐겠습니까? 마음이 강퍅케 되어 하나님을 믿지 않게 된 책임을 하나님에게 돌려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고자 하는 자를 강퍅케 하신다면 인간의 강퍅함에 대한 허물을 인간에게 묻을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인데 인간이 어떻게 그 뜻을 거부하겠습니까? 하나님이 강퍅케 하시니까 강퍅할 수밖에 없다면 하나님은 인간을 허물할 수 없습니다'는 반발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에게서 이러한 반발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미리 그에 대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러한 반발에 대해서 고개가 끄덕거려지지 않습니까? '그런 반발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수긍이 되지 않습니까? 긍휼히 여김을 받는 것이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고자 한 것 때문이고 강퍅한 것 역시 하나님이 하고자 했기 때문이라면 모두다 긍휼히 여기시지 않는 하나님을 탓하고 싶은 마음이 없겠습니까? 이러한 인간의 반발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라는 말로써 일축해 버리고 맙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의 입장에서 인간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장에서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하나님과 인간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창조주는 피조물의 입장에서 일하시지 않습니다. 피조물이란 단지 창조주의 마음과 목적과 계획을 드러내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여러분이 진흙으로 뭔가를 만든다고 합시다. 그럴 때 진흙의 입장을 생각해가면서 만들지는 않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진흙으로 항아리를 만들려고 했는데, 그렇게 되면 항아리로 만들어진 진흙이 얼마나 기분이 나쁘겠는가? 그러니까 진흙의 입장을 생각해서 멋있는 도자기를 만들자' 이런 생각으로 그릇을 만들자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과 피조물이 바로 이런 관계에 있습니다. 피조물된 우리가 우리 입장에서 창조주에게 '왜'라는 단어를 동원해서 하나님을 힐문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란 '창조주 앞에서 피조물이 어떤 존재인가?'를 제대로 인식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긍휼히 여길 자는 긍휼히 여기시고 강퍅케 하실 자는 강퍅케 하신다는 말씀이 하나님의 긍휼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에게 각각 어떻게 들려지겠습니까? 긍휼을 아는 자는 긍휼히 여김 받을 수 없는 자신이 긍휼히 여김 받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할 것입니다. 하지만 긍휼을 모르는 자는 인간의 노력이 들어 있는 긍휼만을 이해하게 됩니다. 세상에는 착한 사람들도 많이 있고 그들도 얼마든지 믿을 수 있는데 단지 복음을 몰라서 안믿고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긍휼히 여김을 받을 자와 강퍅케 할 자를 하나님이 미리 정하셨다는 것에 대해서 인정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 안에서 시작된 우리의 결심과 의지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부르셨고 긍휼히 여기고자 하셨기 때문에 주어진 마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는 자는 하나님이 불러주시고 긍휼히 여기심에 대해서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시지 않았다면 나는 죽을 자이고 강퍅한 자로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 자인데 긍휼히 여기고자 하셨기 때문에 긍휼 안에 있게 됨을 감사하게 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의 긍휼을 아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긍휼을 아는 자가 '왜 저 사람들은 긍휼히 여기시지 않는 것입니까?'라는 반감을 보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21절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권리입니다. 귀히 쓸 그릇 천히 쓸 그릇은 하나님이 정하시는 것이지 피조물인 우리들의 의견이나 입장이나 생각을 고려해서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도 귀한 그릇이 될 자질이 있는데 왜 천한 그릇으로 만들었는가?'라는 힐문을 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시지 않아도 복음만 전해진다면 얼마든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에 감사할 수 있는 자질이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멸망당할 자입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건짐 받은 자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모든 자를 건진다는 것이 아니라, 멸망의 자리에서 누군가를 택하시고 부르셨다는 것에 있습니다. 긍휼히 여기시는 것도 하나님의 권세이고 강퍅케 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권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왜 모든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지 않는 것입니까?'라고 한다면 결국 '하나님은 악하다'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나 같으면 모든 사람을 다 긍휼히 여길 것이다'는 이런 생각이 곧 하나님보다 더 선한 위치에 있고자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진노에서 건짐을 받은 긍휼과 사랑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우리의 원함과 달음박질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일방적인 부르심이고 긍휼히 여기심 때문이며,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다면 나는 결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에 감사할 자가 아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긍휼을 아는 신자는 언제나 긍휼히 여기심과 사랑하심만을 자랑하며 살아갈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