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9:24-26 부르심

롬 5:20절에 보면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자비하심은 죄, 즉 하나님의 진노의 자리에서 넘치게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은혜가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나게 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의 자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진노 아래 있다는 우리들의 본질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진노 아래 있다는 인간의 본질을 과거의 일로만 여겨버립니다. 예수 믿기 전에 처했던 과거의 본질로 여겨버리고 예수를 믿는 현재에는 나와 상관없는 본질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피로 용서함을 받은 신자가 아직까지 진노 아래라는 본질에 빠져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용서라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은 필히 죄와 진노라는 인간의 본질 속에서 더욱 넘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진노 아래라고 하는 인간의 본질을 옛것으로 돌려버리고 입을 다물어 버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에 대해서 깊이 감사하고 주님의 피만 자랑할 수 있었던 것은 진노의 자식이라고 하는 자기 본질 속에서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엡 2:1-3절에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라는 말씀에서도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는 신분은 과거의 것이니까 다 잊어버리자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가 우리를 어떤 신분에서 건져주신 것인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만약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믿음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으로 여겨버릴 것입니다. 예수 믿고 복받으면 좋고, 설사 안믿는다고 해도 손해볼 것은 없다는 생각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요즘 신자들이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라는 자기의 처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 결과는 주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리심과 피 흘리심에 대해서 시큰둥해진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사도 바울은 말씀하기를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저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9:25-26)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내 백성이라는 말이나,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는 말씀에 초점이 아니라 어떤 자리에서 백성이 되었고 아들로 부름을 입었느냐가 중점입니다.

신자가 백성으로 아들로 부름을 입은 것은, 그냥 지나가던 자를 불러 세운 것이 아닙니다. 백성이 아닌 자를 백성이라고 부른 것이고,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고 부르고,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부름을 얻은 것입니다. 따라서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였다. 사랑을 받지 못한 자였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하나님 백성으로 아들로 부름을 입었다는 것이 뭐 그리 은혜이고 자비인지 시큰둥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본문은 호세아에 기록된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호 2:23절에 보면 "내가 나를 위하여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저희는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호세아 선지자가 이스라엘을 향해서 예언한 말씀입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이 인용을 하면서 이방인의 구원에 대해서 언급을 하는 것입니다.

즉 호세아 때는 죄악으로 말미암아 심판 받고 멸망당한 이스라엘이 회복할 것을 예언한 말씀이지만 사도 바울 시대에는 그 말씀이 이스라엘에 국한 된 말씀이 아니라 전 세계에 국한된 말씀으로 보여진 것입니다. 호 1:10절에서도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같이 되어서 측량할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저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저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사신 하나님의 자녀라 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호세아의 예언을 인용하면서 신자가 부름 받은 것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이 무슨 이유겠습니까? 그것은 부름 받았다는 사실에 대해서 기뻐하기보다는 불러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크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불러주심을 구원론의 입장에서 생각하려고 합니다. 자기 구원의 입장에서 구원을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부르심이 구원과 연결되버리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의 구원으로 연결됩니다. 그러나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부르신 것으로 그쳐 버린다면 결국 내 구원이 강조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는 상대적으로 소홀히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이 경계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구원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언약적 입장에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신자의 부르심은 분명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진 일입니다. 부르심을 받을 가능성이 인간에게는 조금도 없습니다. 이것을 안다면 부름 받은 것에 대해서 즐거워하기보다는 불러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높이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백성이 아닌 자를 백성이라고 하시고,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하시고,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었다는 것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인간은 하나님에게 인정받지 못한 자였음을 말합니다. 자신을 인정받지 못하고 사랑 받지 못하고 백성이 아니라고 부정당한 위치에서 바라볼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가 부름을 입었다는 것은 부름을 입은 것에 대해서 자기 의를 전혀 개입시키지 말아야 할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이 크게 실수하는 것은 자신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입을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은 자라는 것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실수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하나님의 언약의 은혜를 드러내기 위한 조치입니다. 그런데 인간 편에서 부름을 받을만해서 받았다고 해버리면 하나님의 은혜의 조치는 손상을 입게 됩니다. 따라서 사랑을 입지 못할 자를 사랑하시고 백성 아닌 자를 백성으로 부르신 것은 하나님의 부름을 입고자 시도하는 인간의 노력에 대한 심판의 기준으로 활용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구원의 근처에도 갈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 6:9-10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고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는 모든 이유가 그들이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 것을 방해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하나라도 더 구원하기 위해서 열심을 내시는 것이 아니라 잘라내기 위해서 열심을 내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열심히 이해가 될 때 그가 진심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목회자들은 구원시키기 위해서 안달입니다. 구원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운 자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이것저것 열심히 강조하고 지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는 잘라내기 위해서 애쓰십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기에 이스라엘을 구원시키기 위해서 애쓴 것이 아니라 '너희들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전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찾아간 것입니다.

오늘 이 은석교회에 이사야 선지자가 찾아온다면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호세아 선지자가 찾아온다면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은석교회 참 잘한다'라고 말하겠습니까? '너희들이 진짜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다'고 칭찬하겠습니까? 아닙니다. '너희들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절망의 소리만 외칠 것입니다. 그 절망의 외침 속에서 진심으로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는 자만이 생명으로 오신 주님을 바라보게 되고 하나님의 아들로 부름을 입었다고 해도 결코 자신이 부름을 받을만해서 받았다는 엉뚱한 소리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 시대는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시대였습니다. 봐도 알지 못하는 시대입니다. 하나님이 그 마음을 둔하게 하고 귀를 막으셨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의 힘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고 이스라엘 될 수 없는 그런 시대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비유로 말씀을 하신 것도 인간으로 하여금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달을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하셨습니다. 철저하게 구원에 대한 인간의 힘을 막아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말입니다. 인간의 재주와 지식으로는 절대로 말씀을 깨닫고 하나님을 알게 되고 마음이 고침을 받고 돌아오는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만약 인간의 지식으로 스스로 깨닫고 고침 받고 돌아오는 일이 발생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일이 모두가 무산되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부르심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는 언약을 드러내기 위해서 사랑치 않을 자 중에서, 백성이라고 하지 않은 자 중에서 백성으로 불러내고 사랑할 자로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자 되었다거나, 예수님을 안다거나, 복음을 깨달았다는 것에 대해서 절대로 우리의 의나 지식을 끼워 넣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린 모두 애초에 복음에 대해서 무지하고 어리석은 자들이었습니다. 박사나 무식쟁이나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에 대해서만큼은 무지한 상태의 인간이었습니다. 그러한 인간을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부르셔서 알 수 없는 것을 알게 하시고, 되어질 수 없는 것을 되어지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부름을 입은 신자의 입에서 나올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뿐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신자의 삶의 모습입니다. 신자될 수 없는 자가 신자된 것에 감사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여러분의 삶은 충분히 넉넉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