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9:27-29 부딪히는 돌

오늘 본문은 이방인의 구원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이 구원을 얻은 것은 무엇 때문이냐는 것입니다. 30절에 보면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라는 말씀을 함으로서 이방인의 구원은 인간의 행함이나 인간의 의가 아님을 말합니다. 이방인은 의를 좇지 아니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의를 얻었다는 것이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이 의를 얻을 수가 있는 것은 의란 인간의 행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방인의 의를 믿음에서 난 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의를 추구하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다면 이는 인간의 신실함에서 얻어진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함에서 얻어진 의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31절에서는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라고 말씀하면서 이방인과 이스라엘을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즉 이방인은 의를 좇지 아니한 자였고 이스라엘은 이를 추구하고 열심히 좇는 자들이었는데, 결과적으로 의를 얻은 자는 이방인이고 의의 법을 쫓아간 이스라엘은 의에 이르지를 못했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한 자는 의에 이르지 못했는데 열심히 안한 자가 의에 이르렀다는 것과 같은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얘기가 이해가 되십니까?

물론 여러분은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얻는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의 행함으로는 의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도 인정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인간의 열심이라는 부분에 들어가면 갈등을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안한 자와 열심히 한 자를 서로 비교를 한다면 열심히 한 자의 손을 들어주고 싶은 것이 바로 우리들의 속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은혜가 있으니까 열심히 하지 않겠느냐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어질 때가 많은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열심히 한 자와 하지 않은 자를 비교하고 있는 것이지, 열심히 안한 것이 옳고 열심히 한 것은 결국 자기 의라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 제가 말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과연 무엇을 좇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열심히 하든 하지 않든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주어지는 의를 좇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코 열심히 안한 것을 정당화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의를 좇지 않는 이방인들이 의를 얻고 반대로 의를 좇았던 이스라엘은 의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의를 좇지 않는 것이 옳고 의를 좇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의를 좇지 않았으면 의를 얻었을 것이라는 의미의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32절에 보면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고 말합니다. 즉 의를 좇고 좇지 않고가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의지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구원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실패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실패를 말하기 위해서 이방인을 대비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실패한 것은 의를 좇았기 때문이 아니라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한 결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대로 하면 이스라엘의 입장에 있어서 이방인은 의에 대해서 전혀 함께 애쓰지도 않았고 추구하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실패하고 이방인은 의에 이르렀다는 것이 됩니다. 여러분이 이스라엘의 입장이라면 과연 이 사실에 대해서 이해를 할 수 있겠습니까?

지는 시간에 남은 자에게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스라엘이 전부 다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남은 자만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남은 자에 대해서 긍정적인 모습으로 평가하려고 하지 말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의 긍정적인 모습이 무엇이겠습니까? 열심과 애씀이 아니겠습니까? 열심과 애씀으로 남은 자에 대해서 판단하려고 한다면 결국 이스라엘 안에서 더 힘쓰고 더 애쓴 자가 누구냐를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남은 자는 하나님이 남기신 자이지 인간의 애씀이나 열심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남은 자란 인간의 행함과는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이 남기신 자를 말하는 것과 같이, 의라는 것도 전혀 인간 쪽에서 추구함이 없이도 하나님의 신실함에 의해서 주어진 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 믿음을 의지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행함을 의지한 것입니다. 이것이 의에 이르지 못한 이유입니다. 도대체 믿음을 의지한다는 것과 행함을 의지하는 것이 어떻게 다르기에 이런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까? 이스라엘이 믿음을 의지한 것이 아니라 행함을 의지했다는 말을 보면, 인간은 누구나 믿음을 의지하든 아니면 행함을 의지하든 둘로 구분되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의지하고 사느냐에 의해서 생명과 심판이라는 엄청난 결과가 주어진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이 문제를 심각한 마음으로 대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생각할 때 여러분 자신은 행함이 아니라 믿음을 의지하고 있다고 생각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기도하고 교회 나오고 헌금한다고 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피로 천국 간다는 것을 믿는다'고 하는 여러분 스스로의 고백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천국 간다는 것을 믿으니까 나는 믿음을 의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있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예수님의 피로 천국 간다는 그 고백이 과연 여러분의 삶에도 담겨져 있는지를 봐야 합니다. 즉 믿음이 믿음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삶으로 이어지고 있는가를 봐야 하는 것입니다.

32절에 보면 이스라엘이 행함을 의지한 것을 가지고 부딪힐 돌에 부딪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33절에서는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 8:14절을 보면 "그가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거민에게는 함정, 올무가 되시리니"라고 말씀하고, 사 28:16절을 보면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이라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한 돌을 두십니다. 이 돌은 믿는 자에게는 피할 곳이 되지만, 믿지 않는 자에게는 거치는 돌이 되고 걸리는 반석이 될 것입니다. 믿는 자만이 부딪힘과 걸림에서 수치를 당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고 추구하는 자는 수치를 당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두신 돌을 왜 믿지 않는 것입니까? 그것은 그 돌이 믿을만한 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 돌을 믿고 의지하다가는 자신들이 추구하는 것을 얻을 수가 없다는 불안감 때문에 차라리 자신들의 열심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행위로 말미암는 자들이란 하나님이 세우신 돌을 거부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으로 안심하기보다는 자신에게 열심 있고 행함이 있는 것으로 안심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심으로 예수님의 은혜로 의를 얻는다는 것을 믿고 사는 자라면 순수하게 예수님의 피가 의지되어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행함과 예수님의 피로서 안심하고 살아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자신에게 믿음의 증표라고 생각되어지는 기준이 따로 존재하고 그 기준 되는 행함이 없을 때는 안심을 하지 못하고 행함이 있을 때 안심을 한다면 그것이 바로 행함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신자에 대해서 오해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열심히 쌓아 가는 것입니다. 많이 쌓으면 그것이 잘한 것인 줄로 오해를 하는 것입니다. 고전 3:10-11절을 보면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많이 쌓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터로 삼고 쌓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내가 얼마나 쌓아 올렸는가를 보고 사는 자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터로 삼아 쌓아올리는가를 보고 사는 자입니다. 이것이 신자 됨의 구별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보기에 터로 삼을 기초석이 자신의 모든 것을 의지하기에 단단하지 않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돌을 치우고 대신 자신의 행함을 터로 삼아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기초가 그리스도라면 그것으로 이미 의를 얻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행함이 기초라면 그 위에 우리들의 어떤 행위를 쌓는다고 해도 그것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의 행함이 의가 되어서 그 의로 의에 이른 자가 성도라면 이미 의에 이르렀기 때문에 의에 이르기 위해서 무엇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고, 때문에 아무런 행함이나 추구함이 없이 의를 얻었다는 말을 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마 7:24-27절에 보면 반석 위에 집은 지은 자와 모래 위에 지은 자가 나옵니다. 바람이 불자 한쪽은 무너지고 한쪽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집을 부실하게 지었기 때문에 무너진 것이 아닙니다. 단지 '모래 위냐 반석 위냐'의 차이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세웠느냐를 묻지 않습니다. 무엇을 세우라는 것도 말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 위에 세움을 받았느냐는 것입니다. 항상 여러분 자신이 무엇을 기초로 삼고 살아가는지를 살피십시오. 예수님이 삶의 기초로 되어 있는지 아니면 여러분의 수고와 노력과 애씀을 기초로 삼고 살아가는지 살피십시오. 예수님이 여러분의 걸림돌이 아니라 거치는 반석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쉼이 있게 하는 기초돌인지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