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10:1-3 의를 모르는 열심

여러분은 타인의 구원에 대해서 얼마만큼의 관심을 두고 살아가십니까? 어쩌면 우리는 나의 구원에는 관심이 있지만 타인의 구원에는 전혀 마음을 두지 않은 채 교회로 모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또 아니면 내 구원에도 관심 없고 타인의 구원에도 전혀 관심을 두지 않은 채 교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심각한 상태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이 생각할 때 과연 그것이 교회로서의 바른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타인의 구원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있는 자신의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서 이렇게 항의할지도 모릅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문제이고 인간이 전혀 개입할 수 없는데 우리가 관심을 둔들 뭘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항의는 성경적으로는 맞는 듯 여겨지지만 이것은 성경을 오해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1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뭐라고 말씀합니까? "형제들아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쉽게 풀이하면 이런 뜻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마음에 간절히 원하고 기도하는 것은 형제인 너희들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형제인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해서 마음 깊숙이 간절한 원함과 기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인간의 힘으로 구원을 도울 수 없다는 것을 몰라서 이런 말을 하겠습니까? 비록 구원은 하나님에게 달려있지만 바울로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형제들이 구원과 거리가 멀어지는 것이 안타까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즉 형제의 구원에 관심을 두라는 것은, 그들이 구원을 받도록 하나님의 일을 도와주라는 것이 아니라 형제들이 구원과 멀어지는 모습을 보일 때 안타까워하고 애타는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있다는 것은 곧 구원받은 자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알고 있다는 증거이고, 또 자신부터도 구원받은 자의 모습 안에 머물러 살기를 소원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이 희미한 자가 타인이 구원에 머물지 않고 멀어지는 모습에 대해서 애타할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이 희미한 자들이 모이는 교회는 자연히 하늘나라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습니다. 관심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항상 화젯거리는 돈이고 자신을 높여주는 세상 것에 쏠릴 것입니다. 그러나 소망이 굳건하고 하늘나라만 기대하고 사는 사람이 모인 교회는 모든 관심이 하늘나라에 쏠리게 됩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다운 모습인지에 대해서 관심을 두고 살 것이고, 그런 마음으로 모인다면 자연히 누군가가 하늘나라에서 멀어지는 삶을 살아갈 때 애타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타인의 구원에 대해서 애타하는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하늘나라를 소망하고 사는 신자에게는 자연스런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사도 바울이 이스라엘을 바라볼 때,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은 있지만 지식을 쫓은 열심이 아니라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복종하지 않는 열심인 것을 알게 됩니다. 지식을 좇은 열심이 아니라는 것은 의에 대한 깨달음이 없이 하나님을 향한 열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의에 대한 깨달음이 없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세우고자 하는 의는 결국 사람의 의였지 하나님의 의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열심 역시 자기 의를 위한 열심이지 하나님의 의를 세우기 위한 열심이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구원과 멀어진 모습으로 봤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이 열심이 있느냐 없느냐를 따진 것이 아닙니다. 왜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없느냐를 묻는 것이 아니라 의에 대한 깨달음이 없는 열심을 지적을 한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의 관심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열심이 있느냐 없느냐가 관심이 아니라 의에 대한 깨달음으로 하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우리의 열심이 과연 누구의 의를 세우기 위한 열심인가를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 열심이 상대방을 능가하느냐 능가하지 못하느냐는 것은 우리의 관심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러한 경쟁은 전혀 무익한 것입니다. 우리의 열심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결정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제아무리 십자가를 믿는다고 하고 예수님을 말하고 열심이 있다고 해도 열심의 정도를 가지고 경쟁하는 것은 교회로서의 바른 모습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하나님의 의에 복종치 않았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9장의 내용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계속 강조했지만 9장의 내용은 하나님의 자유에 대한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유란 사랑할 자를 사랑하시고 미워할 자를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야곱을 사랑하시고 에서를 미워하기로 작정하신 자유이고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강퍅케 할 자를 강퍅케 하시는 자유입니다. 왜 이것을 하나님의 자유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자유란 자신의 계획과 작정 속에서 그대로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도 내일도 전혀 변함 없이 처음의 계획과 작정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유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자유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인간은 자유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생각과 계획대로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항상 주위의 영향을 받고 살아갑니다. 사람을 의식하고 자기 체면과 자존심 때문에 할 말을 못할 때가 많습니다. 생존의 위협 때문에 마음과는 달리 굴복하고 살아가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것이 자유하지 못하는 삶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유하심은 인간을 전혀 의식하지 않으신 자유입니다. 우리 쪽에서 어떤 열심을 보이고 정성을 보인다고 해도 하나님은 자기 의지로 행동하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러한 하나님의 자유에 대해서 무지했습니다. 자기들의 열성과 정성이 하나님의 결정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할 자를 사랑하고 미워할 자를 미워하신다는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에 복종한다는 것은, 사랑할 자를 사랑하고 미워할 자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자유에 대해서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의로 인해서 사랑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으로 인해서 구원받게 된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의에 대해서 포기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기 의를 포기하지 못했습니다. 자신들이 의를 행해야 하나님의 사랑이 계속 자신들에게 머물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의를 세우기에 힘썼던 것입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구원과 거리가 먼 모습으로 판단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의의 자리에 인간의 의를 올려놓으려고 합니다. 자신의 의가 보여지고 확인되어지는 순간만큼은 하나님의 심판에서 멀어져 있고 대신 축복에 가까이 근접해 있는 자신을 상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부지런함이 바로 이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의의 자리에 인간의 의를 올려놓는데 부지런 한 것이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를 포기하려고 애쓰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에 복종치 않는 모습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붕괴되어 간다면 나타나는 것은 인간의 의에 힘쓰는 모습일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항상 조심하고 살펴야 하는 것은 내 안에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살아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에 대해 의식하면서 하나님의 의의 자리에 인간의 것을 남겨 놓지 않기 위해서 싸우는 삶이 살아있는가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열심은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기를 힘쓰는 열심이어야 합니다. 롬 1:16절에 보면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 말합니다. 복음 자체가 능력이지 우리 쪽에서 능력이 될만한 것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언제나 자신을 근거로 삼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일에 힘쓰는 것이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기를 힘쓰며 살아간다면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에 힘쓰며 살아가는 형제에 대해서 애타하는 마음이 있을 것이고, 자연히 하나님의 의를 보이고자 애쓰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