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글자 자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즉 성경에 기록된 문자가 조합되어 있는 낱말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문자 자체가 하나님을 계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는 경우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계시되어질 때입니다. 말씀이 의도하고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성경을 읽고 설교를 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의도와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문자가 조합된 책에 불과할 뿐입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인간이 지식이 아닙니다. 성경은 성령이 해석하십니다. 성령은 곧 하나님의 마음이고 그리스도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령으로 해석되어진 성경만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이 지향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요 16:13-14절에 보면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성령이 오시는 것은 성령 받은 자를 진리로 인도하기 위해서입니다. 성령은 자의로 말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들은 것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성령은 성령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이것이 성령이 지향하는 것입니다. 즉 성령의 목적은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으로 해석되어지는 성경이라면 인간을 지향하는 해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만 나타내는 해석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영광, 그리스도의 의를 지향하는 해석이 되어질 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고, 그렇지 않고 인간의 영광이나 의를 지향하고 드러내는 해석이라면 그것은 단지 문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역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의 영광을 지향하는 이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5절에 보면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라고 말합니다. 모세가 어떤 말을 했습니까? 레 18:5절에 보면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 나는 여호와니라"고 말합니다. 모세는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그 의로 말미암아 산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그 누구도 율법의 의를 행함으로 산 자가 발생하지를 못했습니다. 모든 인간이 율법의 의에 대해서 실패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십니다. 그분이 세상에 오셔서 율법의 완성자가 되십니다. 즉 율법의 의를 이루신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나를 믿으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하십니다. 율법을 행하면 살리라는 모세의 말이 예수님에 의해서 '나를 믿으라 그리하면 살리라'는 말씀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래서 4절에서 말한 대로 예수님은 율법의 마침이 되신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이 처음부터 지향하는 바였습니다. 그래서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대로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행함의 의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지향하는 한 의, 즉 그리스도의 의를 믿으며 사는 것이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의 사실적 의미는 율법이 말한 항목을 하나하나 실천하지 못한다는 의미이기보다는 율법이 지향하는 그리스도의 의를 믿지 않고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하지 않고 사는 것, 이것이 바로 율법의 요구에 순종하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바리새인들은 비록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율법에 철저한 자로 여겨졌겠지만,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율법이 전혀 무엇인지도 모르고 율법에 순종하지도 않는 불신앙으로 보이셨던 것입니다.
지금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로 삽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무엇을 요구합니까? 6-8절을 다시 보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합니다. 그래서 좀더 알기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같은 의미의 구약의 말씀을 인용을 하겠습니다.
신 30:11-14절에 보면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이 아니요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도 아니라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와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고 말합니다. 로마서의 말씀과 같은 의미의 말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가르치고 난 후 '이 명령들이 너희들에게 어려운 것도 아니고 먼것도 아니다'는 말을 합니다. 다시 말해서 명령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가 하늘로 올라가야 하고 바다를 건너서 먼 곳까지 가야하는 수고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행한다는 것은 너희들이 스스로 말씀을 찾아가야 하고 스스로 행해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 아니다는 얘기입니다. 만약 말씀을 이스라엘이 이루어야 한다면 말씀은 크나큰 짐이고 굴레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행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말씀을 이루실 분이 따로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말씀이 마음에 있기 때문에 행할 수가 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말씀이 마음이 있다면 그는 말씀에 의해서 그 마음이 다스려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말씀이 그를 다스리기 때문에 자연히 말씀에 순종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억하고 본문을 보면 이해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는 어떻게 말합니까?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약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라고 한다면 그것은 하늘에 계신 예수님을 땅에 모셔 올려는 의도이고, 누가 음부에 내려 가겠느냐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결국 스스로 예수님을 찾아서 하늘로 가고 또는 음부로 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착각하는 믿음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들 스스로 예수님을 찾아가야 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저 멀리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고, 우리가 예수님을 찾아서 열심히 가는 것을 믿음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모세의 말을 인용을 하면서 믿음이란 찾아가는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찾아가는 것은 율법을 스스로 행하려는 수준입니다. 자신 스스로 의를 행하려는 수준, 이것이 바로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입니까? 이것을 말하는 것이 8절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무슨 뜻입니까? 말씀은 곧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어디에 있습니까? 모세 말대로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네 입에 있고 마음에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 마음에 있다면 그것은 누가 집어넣은 것입니까? 우리입니까? 우리가 성경을 외우면 말씀이 우리 마음에 들어갑니까? 말씀이 마음에 있다는 것은 우리들의 힘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말씀이 우리에게 찾아오신 것이지 우리가 스스로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찾아가는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에 찾아오신 말씀을 믿는 것, 이것이 바로 믿음이 말하는 의라는 것입니다.
요일 4:9-10절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말합니다. 보내신 사랑이고 찾아오신 사랑이지 우리가 찾아가고 우리가 요구한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신자는 다만 주어진 사랑에 감사하고 찾아오신 의를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위해서 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에게 찾아오신 분을 믿게 되어진 것뿐입니다. 때문에 믿음을 내세워서 자신을 자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누구든지 자기 믿음을 자랑한다면 그는 자기 스스로 예수님을 찾아갔고 자기 스스로 말씀을 붙들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자기 스스로 찾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이 찾아다닌 열심을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우리 스스로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면, 누가 열심이 있든 없든 그것으로 믿음을 비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찾아오신 분을 믿게 되어진 것인데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단지 감사할 뿐이지요.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 뭐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을 붙들기 위해서 기도가 필요하다거나, 성경을 읽는 것이 필요하다거나, 봉사가 필요하다는 등의 생각을 벗어버리십시오, 믿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찾아오신 분을 믿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9-10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여러분, 구원이 어디에 있습니까? 입에 있고 마음에 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예수님을 찾아서 믿었기 때문에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죄인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믿음을 주심으로 예수님을 주로 믿게 되어진 것을 고백하고 믿는다면 그가 바로 구원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행함이란 이미 구원받은 자로서 나타나서 자연스런 열매이지 인간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하며 살아가는 자라면, 그에게서는 자기 자랑이나 믿음을 비교한다거나 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예수님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에게 찾아 오셨습니다. 그래서 멸망을 받아야할 우리가 산 자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으로 믿어지신다면 이제 여러분에게 남은 것은 찾아오신 사랑과 긍휼을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