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10:11-13 수치를 받지 않음

신앙생활이란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서 애쓰는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만난 그 자체를 말합니다. 만약 신앙생활이나 믿음의 의미를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한 것에 둔다면 결국 그리스도를 만나지도 못한 상태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믿음을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과연 그리스도를 만나지도 못한 상태에서 신앙생활이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과연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한 우리들의 노력이나 열심을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믿음이란 그리스도를 이미 만났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믿음이지 하나님을 알아가고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만나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이미 선포된 말씀 안에서 우리에게 항상 등장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등장하신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11,12절을 보면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서 여러분은 어떤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하시는 예수님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 말을 '예수님은 우리들의 자존심을 세워주시는 분이다'는 의미로 이해하시면 안됩니다.

사람들이 자존심을 세우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부끄러움을 당한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수치를 받는 것입니다. 수치를 받는다는 것은 자존심이 무너지는 것이고, 자존심이 무너진다는 것은 세상에서의 자신의 존재 가치가 몰락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삽니다.

돈을 벌고자 하는 것도 결국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으려는 것이 아닙니까? 자식을 공부시키려는 것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교회에서 이런 저런 일에 열심을 내려고 하는 것도 혹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기 위한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닙니까?

이렇게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서 애를 쓰는 우리들에게 예수님은 '나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앞서 말한 대로 세상에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해준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즉 돈을 많이 벌게 하셔서 돈 없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해주신다는 것이 아니고, 자식이 잘되게 해주셔서 남보다 못난 자식 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해주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먼저 생각해 봅시다. 과연 돈 없는 것이 부끄러운 것입니까? 물론 도박으로 인해서 돈 없는 자가 되고, 사치한다고 돈을 물 쓰듯 쓰느라고 돈 없는 가난한 자가 되었다면 부끄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돈 없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돈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 것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돈 없다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단지 우리들 스스로 남과 비교하면서 돈이 없음으로 인해서 남들보다 초라하게 보이고 남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지 못한 것 때문에 자신을 초라하게 여김으로 부끄러움을 느낄 뿐입니다.

자식이 남들보다 성공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것이 부끄러움입니까? 절대로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자식이 성공을 해서 부모가 원하는 일만 하고 있다면 세상이 잘되어 갈 수 있습니까? 세상은 궂은 일, 초라하게 보이는 일을 하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에 일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세상은 가진 것이 없고, 초라한 일을 하고, 자식들이 못났다는 이유로 이웃을 부끄럽게 합니다. 결국 가진 것이 없고 초라한 직장을 가진 사람은 세상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끼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서는 그런 것으로 부끄러움을 느낄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세상 것으로 우리를 판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행위를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주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하신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을 행하지 못하면 그것을 부끄러움으로 여겼습니다. 오늘날도 교회에 이러한 모습이 있습니다. 인간의 행함을 내세워서 행함이 없으면 주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한다고 말합니다. 부지런히 행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운 모습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행하지 못한다는 것이 부끄러움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행함을 들고 나오는 것이 부끄러움입니다. 우리의 행함, 우리들의 의를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은 주님의 의로 이루어진 것이지 우리의 의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주님의 의만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주님의 의는 하나님에게 기쁨이고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그 의를 내세우고 하나님께 나가기 때문에 부끄러움을 당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가져야 할 부끄러움은 우리의 의를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오른 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인데 우리는 내가 한 것을 내 가슴속에 차곡차곡 묻어둡니다. 그리고 필요할 때마다, 내 자존심을 세우고 자신을 자랑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하나씩 꺼내서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데 사용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들의 모습에 부끄러움을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의가 나를 의롭게 하고 천국가게 하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내 의를 포기하지 못하고 가슴에 묻어두고 나를 자랑하고 내세우는 자신의 못남과 어리석음에 대해서 거룩하신 주님의 십자가의 의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예수님을 만난 신자입니다.

여러분, 주님 앞에서 자신의 못남을 발견하고 부끄러움을 느끼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주님을 만난 신자입니다. 하지만 주님 앞에서 자신의 부끄러움을 발견하지 못한 신자는 주님을 만난 신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의는 항상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부끄러움을 발견한 신자라면 나보다 초라한 직장에 다니고, 나보다 돈이 없고, 나보다 못 배운 사람을 만난다 할지라도 결코 그를 부끄럽게 만들지 않습니다. 부끄럽다는 느낌이 들게 하지도 않습니다. 진심으로 자신을 부끄러운 존재로 여긴다면, 항상 주님을 만난 자로 산다면 그 증거는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보내신 약자를 통해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보다 못나 보이는 형제 앞에서 과연 부끄러움을 느낄 수가 있습니까? 만약 느끼신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행함이 아니라 말씀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삶속에 행동하시는 말씀이 함께 하는 결과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행함이 있다면 그것 역시 말씀의 의지 우리의 의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자는 세상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하나님이 있게 한 자리에서 살아갈 뿐입니다. 주신 것만큼만 받고 누리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부끄러움이 아닙니다. 소유에 의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 일을 못한다고 해서 부끄러움을 느낄 필요도 없습니다. 교회 일이 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단 여러분이 형제를 위한 교회 일에 소홀히 한 것이 세상에서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얻기 위해서라면 교회 일을 하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 할 것이 아니라 아직까지 세상 것에 매어 사는 자신의 불신앙에 부끄러워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한다고 하셨는데 왜 부끄러워하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의가 우리의 모든 허물을 덮고 가렸기 때문에 주님의 의로 인해서 하나님 앞에서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렇듯 주님의 의가 우리를 부끄럽지 않게 하셨는데, 항상 세상 것으로 인해서 부끄러워하고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못남에 대해서 부끄러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그는 주님을 생각하기보다는 자신을 생각하는 자기 때문에 신자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12절에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의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잘 지키고 거룩해 보이는 행함이 많다고 해서 의가 더 많이 부여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주님의 의는 선물이지 인간의 행함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의는 모든 자에게 차별이 없이 동일하다는 것, 이것이 바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13절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한대로, 주의 이름을 부를 자는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착한 일을 하고 양심이 바르고 도덕적인 사람이라고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나 마음만 먹으면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하나님이 믿음을 선물로 준 자에게만 해당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구든지'는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은 누구든지 하나님이 작정하신 자에게는 믿음을 줘서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실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쪽에서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을 받을 자격이 있는 자를 선정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물을 받을 자격도 없는 자가 선물을 받았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 없는 자가 주님의 이름을 부르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못난 자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그리스도의 피를 우습게 여기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 앞에서 우리는 부끄러워 질 수밖에 없습니다. 은혜와 사랑이 날 살렸는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내것을 내세우고 자랑하는 우리들의 한심스런 모습이 부끄러울 뿐입니다. 세상 것이 없는 것이 전혀 부끄러움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없다고 해서, 남보다 적다고 해서 부끄러워하고 실망하는 우리들의 모습이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으려고 체면치레하고, 자신을 가리고, 돈을 모으고, 열심을 내려고 했던 우리들의 모습이 너무나 부끄럽습니다. 주님 앞에서 진심으로 부끄러워하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은 모든 사람에 대해서 부요한 자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