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10:13-15 아름다운 것

행함에 있어서 믿음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행함을 자기 의를 세우는데 사용하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의를 세우는데 사용하느냐로 구별됩니다. 이런 점에 있어서 이스라엘은 믿음이 없었다는 것을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썼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자신에게는 의가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교회를 나오고 성경을 이해하는 모든 것까지도 자신의 의가 아님을 아는 것입니다. 헌금을 하는 것도 구제를 하는 것도 기도를 하는 것도 자신의 의가 아님을 알 때 비로소 하나님을 믿는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이런 믿음이 없을 때 자연히 경쟁관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서로가 힘써 자기 의를 세우고 각자 세운 의를 가지고 비교하고 경쟁하고 자랑하는 모습만 드러낼 뿐입니다. 이스라엘 역시 이러한 의의 개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행하는 것은 고스란히 자기들의 의로 쌓아진다고 여긴 것입니다. 세상에서 행한 의가 하나님 앞에 차곡차곡 쌓여가게 되고 나중에 그것을 근거로 해서 상을 받게 된다고 여긴 것입니다.

오늘날도 이스라엘과 똑같은 생각으로 하나님을 찾고 믿음을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자기 행함이란 참으로 소중한 것으로 남아있게 될 것입니다. 행함이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신앙이 있고 위대하고 존경받을만하고 착하고 신자답다고 하는 많은 칭찬을 받게 합니다. 그래서 힘써 행하기에 열심인 사람들도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인간의 의라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알고 있습니다. 자신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도 예수님께서 자신을 찾아오셔서 되어진 일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음의 문제에 있어서 인간의 행함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런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13절에서 바울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합니다. 누구든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문제가 참으로 간단한 것처럼 여겨지는 말씀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이 뭐 그리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입만 벙긋하면 되는 일이 아닙니까? 입을 벌려서 '예수님'이란 호칭을 하는데 힘이 드는 것도 아니고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어려운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구원을 쉽게 여기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뭐든지 쉽게 얻은 것에 대해서는 소홀히 여기는 것이 사람이지 않습니까? 결국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버리기 때문에 자신이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었다는 것에 대해서 아무런 감격이나 감사가 없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착한 일을 많이 해라 그러면 구원을 얻는다'는 말보다도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 더 쉽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구원의 문제는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 역시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우리들의 의지와 노력으로 가능한 일이라면, 구원 역시 우리들의 힘으로 가능한 일이 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거짓말이 되버립니다. 죽을 필요도 없는 일에 쓸데없이 죽은 예수님이 되버립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이 기도하면서 '주여'라고 부른다고 해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나는 쓸모 없는 인간입니다'라는 의미입니다. '나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고 무능하고 불의한 인간이기 때문에 주님이 아니면 나는 안됩니다'라는 고백이 바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과연 이것이 자존심이 있는 인간에게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사람은 비록 말은 '나는 쓸모 없다'라고 해도 그 마음 한구석에는 그래도 남보다 나은 것이 있다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하다 못해 돈 한푼 없는 가난뱅이라고 해도 자기 자존심을 세우려고 합니다. 가령 돈 많은 사람들이 사치하며 사는 것을 볼 때 그들을 욕을 합니다. '나 같으면 돈을 저렇게 쓰지 않겠다'라고 하면서 자신에게 의를 둡니다. '나도 돈이 있으면 저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이다'는 고백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전적 자기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고, 자기 포기란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고 선물이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연히 구원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선물이지 않습니까? 이럴 때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된 것에 대해서 감사하게 되고, 나같은 인간이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된 것이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기 때문에 자기 자랑을 하지 않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바울은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14-15절의 말씀을 가지고 설명을 합니다.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14-15절) 이 말씀을 문자적인 이해에만 매달리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구원을 얻는 것인데 사람들이 듣지 않고 어떻게 주의 이름을 부를 수가 있는가? 따라서 우리가 전도를 해야 사람들이 복음을 듣게 될 것이고 복음을 들으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생기게 될 것이 아닌가? 그래서 전도하는 발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대개 이런 식으로 이해를 하고 해석을 하게 됩니다. 본문 내용의 구조가 그런 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라고 하고는 믿지 않는 자를 어떻게 부르겠는가? 라고 합니다. 또 듣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믿을 수가 있으며 전파하는 자도 없이 어떻게 들을 수가 있으며 보내심을 받지 않았으면 어떻게 전파할 수 있는가? 이런 식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말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결국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된 것은 전파하는 자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 깊게 살펴야 하는 것은 15절에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라는 구절입니다. 이 말씀은 전파를 하되 전파하도록 보내신 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 스스로 전파한 것이 아니라 보내신 분이 따로 존재하십니다. 그분이 보내심으로 전파하게 되었고, 전파함으로서 듣는 자가 있게 되고, 들음으로서 믿게 되고 믿음으로서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른다면 그것은 주님을 믿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에 대해서 들은 적도 없이 어떻게 주님을 믿을 수가 있습니까? 들어야 주님을 믿게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들었다면 누군가가 나에게 말을 했기 때문에 듣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에게 주님을 말한 그는 내가 원해서 부른 것입니까? 바울은 주님이 보내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지금 우리들이 주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면 그 모든 것은 주님이 나를 전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도는 주님이 하시는 것이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다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했다면 그는 단지 보내심을 받은 자입니다. 행 9:15절에 보면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말합니다. 사울이 믿는 자를 핍박하기 위해서 갈 때 주께서 사울에게 나타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의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해서 택한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주의 이름을 전하는 분은 주님 스스로 하시는 일입니다. 바울은 단지 택한 그릇일 뿐입니다.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된 것은 모두가 주님이 누군가를 택한 그릇으로 삼아 우리에게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알았다면 그것 역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누군가를 보내셨기 때문에 되어진 일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선지자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선지자로 인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행함과 노력으로 신앙을 지키고 유지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 없는 것이고 참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래도 한가지 생각은 남을 것입니다. 어쨌든, 전하는 자가 있어야 듣고 믿어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있게 되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결국 또 다시 전해야 한다는, 즉 전도해야 한다는 문제로 되돌아가 버립니다. 물론 전하지 마라는 것도 아니고 전도하지 마라는 것도 아닙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흔히 전도를 단지 '예수 믿으라'고 말하는 것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물론 말하는 것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하는 것이 전도라면 전도는 주님이 하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앞서 말한 대로 입으로 하는 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예수 믿으라'는 말은 굳이 택함 받지 않아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 없이도 할 수 있는 것이 '예수 믿으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전도란 무엇입니까? 15절 하반절에 보면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는 말을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아름답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차라리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입이여'라고 말하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겠습니까? 말은 입으로 하는 것이지 발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전한다는 의미를 단지 말에 두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발은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들의 삶 자체입니다. 결국 삶 자체가 좋은 소식을 전하는 그릇으로 택함 받았다는 것입니다. 좋은 소식을 담을 그릇은 여러분의 입이 아니라 바로 삶이라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면서 주님으로 인한 구원에 감사하면서 마음에 주님을 담고 살아가는 그 삶이 좋은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그러한 삶이 있게 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주님입니다. 주님이 누군가에게 주님을 믿게 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알게 하시고 주님을 아는 자로 그에게 보내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주님의 일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주님의 일을 담고 살아가는 그 삶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주님이 아니면 우리는 주님을 듣지도 믿지도 부르지도 않을 자들입니다. 그러한 우리를 전도하셔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되게 하셨다면 그것은 나 개인의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차압하셔서 주님의 그릇으로 쓰시겠다는 의도가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아신다면 이제 여러분의 삶은 여러분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있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삶은 여러분의 욕심과 여러분의 일과 목표를 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일과 주님의 목표와 주님의 마음을 담아야 할 그릇입니다. 그릇으로 살아가면 그것이 주님께 쓰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길거리에서 '예수 믿으세요'라고 소리치는 것이 전도가 아닙니다. 집집마다 다니면서 전도지 주는 것이 전도가 아닙니다. 주님이 믿게 하셔서 구원을 얻게 된 것에 대한 은혜와 감사로 살아가면 됩니다. 내 삶은 내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는 생각으로 사시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삶을 자기 것으로 여기고 자기 욕심껏 살아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주님의 전도를 내가 방해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부름 받은 인생입니다. 주님을 알고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었다는 것, 이것만으로도 여러분은 책임과 사명이 주어진 삶이 되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이 책임과 사명에 충실하셔서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여러분으로 인해 전해지는 인생을 살아가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