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10:16-21 부족함이 없는 은혜

지난 주일에 믿음이란 우리 내부의 결단과 선택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님을 말씀 드렸습니다. 흔히 모태 신앙이라는 말을 많이 하기도 하는데, 모태 신앙이라는 것도 믿음이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임을 생각한다면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모태신앙이란 어머니의 신앙을 그대로 물려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즉 날 때부터 기독교 집안이기 때문에 예수를 믿었다는 것이 모태 신앙이 아닙니까? 하지만 믿음을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에게 주시는 은혜로 생각한다면,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선택할 때 기독교 집안인지 아닌지를 따지는 것이 아니시라면 모태 신앙이라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날 때부터 기독교 집안이라면 그것으로 인해서 다만 종교를 기독교로 선택할 수는 있고 교회에 다닐 수 있는 영향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가정이 기독교 집안이라는 것으로 인해서 믿음에 더 유리하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로 이런 생각이었습니다. 왜 그들이 하나님을 자신들만의 하나님으로 생각했습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에게만 하나님이 전해지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대대로 이어가는 것으로 생각을 했기 때문에 원래 신앙의 노선에서 태어나지 않은 이방인에게 하나님이란 해당이 안된다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에게 사도 바울은 믿음은 이스라엘 내부에서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임을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설명하기를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은 자인데, 믿지 않고 어떻게 부를 수가 있으며, 듣지 못하고 어떻게 믿을 수가 있으면, 전파하는 자없이 어찌 들을 수가 있으며, 보내심을 받은 자 없이 어찌 전파하는 자가 있겠느냐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너에게 보내신 자가 있기 때문에 네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역시 보냄 받은 자가 있었기 때문에 그가 전파하였고 전파한 자가 있었기 때문에 말씀을 들은 자가 있고 믿게 된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믿음은 시작부터 하나님이 하신 일이지 이스라엘이 신앙을 잘 이어왔기 때문에 믿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보내신 자가 전파한 말을 누가 믿었느냐고 말합니다. 16절에 "그러나 저희가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하나님이 보낸 자가 전파를 해서 우리가 듣게 되었다면 그 들은 것을 우리가 믿었기 때문에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된 것이 아니냐는 의견을 차단하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은 철저하게 믿음의 문제에 있어서 인간의 그 어떤 노력이나 수고도 개입시키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여러 면에서 인간의 행함을 들이밀 수 있는 구멍을 미리 차단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전파하는 자를 보내셨다고 하자하자. 그리고 그가 전파했기 때문에 우리가 듣게 되었다고 하자. 하지만 들은 것을 믿은 것은 우리가 아니냐?'라는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에 대한 선택권이 우리 자신들에게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야 '지금이라도 내가 안믿겠다'고 하면 되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내가 안믿겠다고 결심하고 교회를 안나가는데, 하나님인들 어떻게 하시겠냐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선택이 하나님보다 더 위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믿게 하신다고 해도 내가 거부하는데 하나님인들 별 수 있는가?'라는 이러한 생각이 바로 불신자의 생각입니다. 이들의 착각은 자신이 지금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내가 안 믿으면 하나님도 별수 없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믿음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즉 애초부터 믿음이 없는 자가 믿음 없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을 해서 '너희가 언제 전파된 것을 믿었느냐?'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인해서 '내가 믿었다'는 말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썼던 자들입니다.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쓰는 것은 자기가 자기를 책임지는 것입니다. 내 믿음에 대해서는 내가 책임질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은혜가 필요 없습니다. 자기 책임 아래 있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목사들이 교인들로 하여금 믿음을 스스로 책임지도록 만들어 갑니다. 믿음의 모든 문제를 여러분이 하기 나름이라는 식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목사는 교인들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교인들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가르침을 받아서 스스로 그 일을 해나가려고 합니다. 자기 스스로 믿음을 관리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게으르게 보이면 스스로 자신을 권면해서 열심을 내어 믿음을 지키려고 합니다. 스스로 희생을 감수해 가면서 선한 일, 좋은 일을 이루어 내려고 합니다.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라는 이 말은 믿음은 전파하는 자에 달린 것도 아니고 들은 자에 달린 것도 아님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전파를 했는데 믿은 자가 없습니다. 결국 믿음은 이사야에게 달린 것도 아니고 이스라엘에게 달린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누구에게 달린 문제입니까?

20절에 보면 "또한 이사야가 매우 담대하여 이르되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하였고"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을 구하지도 않는 자들을 친히 찾아 오셨고, 하나님에게 묻지도 않은 자들에게 친히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결국 믿음은 하나님께 달린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21절에서도 "이스라엘을 대하여 가라사대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손을 벌렸노라 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종일 손을 벌리셨는데 그들은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께 거스려 말하는 백성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말씀의 하나하나가 의미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지 우리의 선택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이었지 우리들의 열심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롬 8:38-39절에서는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없으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이고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에 그 무엇도 이 사랑에서 끊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나를 붙드시는 것이고, 하나님이 나를 믿게 하시는 것인데,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의 믿음과 자신의 사랑을 집어넣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사랑과 믿음은 모두 거짓된 것임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인간의 불신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얼마나 많은 열심으로 은혜와 자비와 긍휼을 베푸셨는가를 말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과연 하나님의 열심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참으로 크신 은혜와 긍휼 하심을 대하고 살아가면서 은혜와 긍휼하심에 부족을 느끼지 않는 삶이었습니까 부족을 느끼는 삶이었습니까? 사실 많은 부분에 있어서 은혜와 긍휼이 나에 대해서 너무 부족한 것 같다는 생각으로 살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은혜에 대한 인간의 반응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에 대해서 순종치 않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에게 종일 내 손을 벌렸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 품에 안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일이 안되면 하나님께 부족하다고 불평이나 늘어놓는 자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이런 우리들이 지금 예수님을 믿겠다고 모여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의지이고 결정입니까? 오전에 말한 대로 우리들이 여호와를 섬길 자로 택해서 이 자리에 모였지만 과연 저와 여러분이 여호와를 섬길 자로 택할 자들입니까? 여호와를 섬기기보다는 여호와로 인해서 득을 보려는 마음만 있던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이 아닙니까? 그런 자가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고 예수님의 희생을 말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고 사랑입니다. 종일 손을 벌리고 있는 하나님을 모른척하고 살던 우리들에게 새로운 지식을 주셔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나아오게 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기가 조금만 힘들어도 하나님의 열심에 불만을 가집니다. 원망을 합니다. 부족하다고 투덜댑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는 전혀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이사야가 전하는 말을 누가 믿었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이스라엘이 듣지 못했습니까? " 소리가 땅에 퍼졌고 말씀이 땅끝까지 이르렀도다"(18)라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일을 몰랐습니까?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 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19)고 말씀합니다. 이방인을 들어서 이스라엘\ 허물을 드러내게 하실 것을 이미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찾지 않아도 문의하지 않아도 찾아오시고 나타나신 하나님입니다. 순종치 않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에게 종일 손을 벌리신 하나님입니다. 부족함이 없는 은혜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은혜가 부족하다고 소리칩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부족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은 종일 손을 펼치고 계신 분입니다. 그런데 왜 부족하다고 여기십니까? 그것은 자기 욕심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구원에 있어서 이미 하나님의 은혜는 충만한데도 불구하고 세상을 생각하기 때문에 채워지지 않은 하나님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책임 아래 사는 것보다는 내가 나를 책임지는 삶을 더 믿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부족함이 없으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부족함이 없는 열심이 오늘 우리를 이 자리에 있게 하신 것입니다. 들어도 믿을 수 없는 우리가 듣고 믿게 되어진 자로 이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열심은 부족함이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열심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의 열심에 감사하며 살아가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