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천주교에서 '내탓이요'라는 캠페인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내탓이요'라는 글을 쓴 스티커를 차 뒷 유리에 부착을 하고 다니면서 모든 일에 있어서 문제의 원인은 바로 내 자신에게 있다고 보자는 그런 운동이었습니다. 나에게 문제가 있다고 봐버리면 문제 해결은 간단하게 되어지고 문제될게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언제부턴가 모르지만 슬그머니 그 운동이 자취를 감춰 버리고 말았습니다. 효과가 없어서 그런 것이었는지, 아니면 그냥 시작부터 단지 이런 운동이 좋을 것 같으니까 한번 해보자는 식으로 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언젠가 보니까 차에서 '내탓이요'라는 스티커가 사라진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실 '내탓이요'라는 운동이 실효를 거두기 위해서는 진심으로 모든 사람들이 자신에게서 문제점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고 '나에게 문제가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데 단지 내탓이요라는 운동을 하고 있으니까 내가 잘못했다고 인정해 줄께'라는 정도의 것이라면 그것은 단지 위장이고 형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운동을 위한 자기 인정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사람이 스스로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존재라고 여기십니까? 사람이란 끝까지 자기 방어로 나오는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는 관대한 생각을 가지고 바라보기 때문에 자신이 자신을 보면 문제는 가려지고 보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탓이요'라는 운동을 아무리 한다고 해도 사람은 쉽게 자기 탓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은석교회가 헌금이 들어오지 않아서 유지가 어려워 졌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런 형편에서 사람들은 스스로 '그래 내가 헌금을 안내서 이렇게 교회가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구나'라고 하면서 자기 탓으로 인정하겠습니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는 형편이 어렵다'든가 아니면 '나는 할 만큼 했다'는 것을 우선적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 안했는가'를 따지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은 자기 속에서 자신을 해석하고 자신에 대해 스스로 이해하는 본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탓이요'라는 것이 인정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기 속에서 자신을 이해하고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자기 속에서 자신을 점검하고 해석을 하게 되면 끝까지 자기 방어만 나오게 됩니다. 이것은 자연적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말씀 앞에서 자신을 해석하고 말씀으로 자기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럴 때 나는 나를 이해하지만 말씀은 결코 나를 이해하지도 않고 문제없는 자로 보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 5-6절을 보면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선 이 말씀이 나오게 된 배경부터 이해해야 합니다.
10:16절에 보면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이사야가 복음을 전했지만 이스라엘은 모두가 안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1절에 "이스라엘을 대하여 가라사대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셨느니라"는 말씀 역시 하나님은 손을 벌리고 있었지만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순종치 않고 거스렸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만 보면 이스라엘은 구원과 상관없는 자가 된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러한 구절을 보면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느낌은 무엇입니까? 혹시 여러분은 이스라엘의 불신앙에 대한 말씀을 볼 때 '내가 바로 이스라엘 같은 사람이다'는 것을 깊이 자각하십니까? 말씀 앞에서 내가 이스라엘임이 여실히 드러나는 것을 체험하십니까? 아니면 자신의 허물은 가려진 채 다만 제삼자의 입장에서 이스라엘을 해석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말씀을 대할 때 그 말씀이 나의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는 순간으로 대하는지, 아니면 자신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순간으로 대하는지는 참으로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소위 복음을 안다는 사람들이 한국교회를 비판을 하고 욕을 합니다. 저 역시 한국교회를 비판한 적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대하면서 느껴지는 것은 '나는 옳으냐'는 것이었습니다. '너는 과연 옳기 때문에 당당하게 한국교회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냐?'는 생각이 저를 쳤습니다. 복음을 말한다는 것 때문에 나는 정당하다고 생각하고 한국교회를 비판하는 것은 아니냐는 것입니다. 물론 잘못된 교회를 비판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말씀이 나를 비판하고 나의 문제점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를 비판하고 한국교회의 문제점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여긴다면 그것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잘못된 교회를 비판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됨이 보여질 때 저는 분명 그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가 심판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 역시 옳은 자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어떤 교회가 교회 부흥에 욕심을 내고 살아간다면, 저는 돈에 욕심을 내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결국 똑같은 죄인인데 만약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시각으로 비판을 한다면, 이것이 바로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게 하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엘리야를 예로 들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2-4절까지는 엘리야 이야기입니다. 열왕기상 19장에 보면 본문에 해당되는 엘리야 사건이 나옵니다. 엘리야가 활동하던 시대는 북이스라엘에서 가장 악했던 왕이라고 말하는 아합이 왕으로 있던 시대입니다. 당시 아합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을 핍박을 합니다.
이스라엘에는 바알을 섬기는 선지자는 잔뜩 늘어가는데 하나님을 섬기는 선지자는 오직 엘리야만 남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 비가 3년 반 동안 오지를 않습니다.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 450명과 누구의 신이 참된 신인가를 가려내는 싸움을 합니다. 결국 엘리야가 이 싸움에서 이겼고 백성들은 바알 선지자들을 죽입니다. 엘리야는 이제 하나님을 섬기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왕상 19:1-2절에 보면 "아합이 엘리야의 무릇 행한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인 것을 이세벨에게 고하니 이세벨이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고 말합니다. 아합의 아내 이세벨이 사자를 보내서 엘리야를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엘리야는 광야로 도망을 치고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하나님에게 '죽여 달라'고 하소연을 합니다.
엘리야가 낙심한 것이 무슨 이유입니까? 왕상 19:9-10절에 보면 그 이유가 나옵니다. "엘리야가 그 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유하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저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즉 엘리야는 나는 하나님만 섬기고 있는 사람이고 저들은 잘못된 인간들이니까 저들을 쳐서 나를 구원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저들이 나를 죽이려고 하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생각은 오직 자기만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왕상 19:18절에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고 말합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이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는 물음을 하실 때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히 특심하오니"(10,14절)라는 말을 합니다. 엘리야가 자신을 바라볼 때 하나님을 위한 열심이 특심한 사람은 이스라엘에 자신 밖에 남지 않은 것으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즉 나혼자 옳다는 것입니다. 아합과 싸운 사람도 바알과 싸운 사람도 자기 혼자 였으니 그렇게 생각되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너 혼자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남기신 자 칠천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엘리야에게는 그들이 보이지 않았겠습니까? 엘리야는 실제 바알과 싸운 자가 누구고 아합과 싸운 자가 누구인가를 본 것입니다. 신자라면 나처럼 바알과 싸우고 아합과 싸워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야의 눈에 비친 이스라엘은 오히려 주의 언약을 헐고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그러니 엘리야의 눈에 이스라엘에 믿는 자는 자기밖에 없는 것으로 여겨진 것입니다. 그런데 전혀 믿는 자가 없는 것처럼 여겨진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남기신 자 칠천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충격적인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울이 엘리야의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6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은혜가 은혜 되기 위해서는 행위를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행위를 보고 '백성이다 백성이 아니다'라는 판단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비록 하나님을 거스리고 순종치 않았지만 그 행위 때문에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백성은 없다라는 말을 한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가 은혜 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나처럼 안하니까 이스라엘에게 믿는 자는 나 말고는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믿는 자가 없다고 여겨지는 속에 하나님이 남기신 자가 있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이 은혜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된 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애초에 옳은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런 우리가 하나님의 택하심을 따라 믿는 자가 된 것입니다. 이런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나는 옳다'는 말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것은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신을 돌이켜 볼 때 자신에게서 문제가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엘리야처럼 자기 행위를 근거로 해서 자신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했던 여러분의 행위를 근거로 해서 자신을 보게 되면 아마 이 자리에 문제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앞에 세우고 우리의 문제를 이해해야 합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택하심을 따라 되어진 것이고, 나 역시 내가 옳아서 신자된 것이 아니라 문제 투성이인 나를 택하셔서 백성 되게 하신 은혜로 되어진 것임을 안다면 결코 행위를 근거로 해서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혹시 형제가 믿음이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면 바로 그를 위해서 내가 보냄 받았다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그를 비판하고 판단하라고 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를 도와주고 그리스도를 가르쳐라고 보냄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도 애당초 문제투성이였는데 여러분에게 보내진 누군가에 의해서 말씀에 도움을 받고 회개하게 되고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여러분은 항상 복음에 빚진 자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를 은혜 되게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