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무능함은 스스로 구원을 볼 수 없다는데 있 습니다. 구원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구원을 볼 수 있는 지혜가,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추구하는 구원은 참된 구원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고, 구원이 아닌 것을 구원이라고 고집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 구원을 볼 수 없도록 하는 그 힘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행위의 의입니다. 행위의 의는 인간으로 하여금 은혜의 능력에 복종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건을 드러내도록 하는 효력을 발생합니다. 즉 구원이란 자신이 심판을 받아야 할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행위의 의는 자신의 경건으로도 충분히 심판을 피할 수 있다고 믿도록 만들어 버리는 효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위의 의가 인간으로 하여금 구원을 보지 못하도록 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의 행위의 의를 보시고 구원과 심판을 결정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실체를 드러내심으로서 우리가 의로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의로우시며 때문에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의로움으로 인해서 의롭게 되어지는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이해를 한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의가 머무를 수 있는 사람을 구분하는 기준을 행위의 의로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잘못됨을 드러내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6-7절에 보면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그런즉 어떠하뇨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졌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본문이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은혜를 말하려거든 행위를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은혜를 받은 자는 은혜를 받을만한 의로운 행위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을 한다면 은혜는 은혜가 아니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7절에서 말씀하기를 이스라엘도 택하심을 입은 자가 구원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택하심을 입었다는 것은 그들의 행위가 기준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스라엘을 언급하면 '그들은 예수님을 죽인 자들이 아닌가?'라고 말합니다. 즉 예수님을 죽인 자들이 무슨 행위의 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나는 예수를 죽인 자가 아니다'라는 주장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 말대로 그가 예수를 죽인 자가 아니라면 결국 그에게는 예수님이 전혀 필요 없다는 주장이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온 것이지 의인을 부르러 오지 않았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과 상관이 있는 자는 죄인이지 의인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스스로 의인으로 자처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자기 경건이 자신을 의로운 자로 여기게 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죄인으로 선언하고 회개하라고 외치는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참된 구원을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구원을 방해하는 걸림돌은 그들의 악한 행동이 아니라 오히려 경건한 행동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경건한 의의 행동이 자신들을 죄인으로 보지 못하도록 방해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회개를 외치면서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밀쳐낸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악한 행동이 구원을 얻지 못하도록 한다고 여기지만, 사실 구원에 있어서 걸림돌은 의의 행동입니다. 경건의 행동, 선하다고 생각되고 의롭다고 여겨지는 행동들이 구원을 막고 방해하는 걸림돌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이 이해가 되십니까? 앞서 말씀드렸던 것을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우리가 악한 행동을 했고 선하고 의로운 행동을 하지 않았다면 자신에 대해서 부끄러워하고 자신의 의를 자랑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의의 행동을 하고 나면 자신의 죄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의가 보이게 됩니다. 의가 보이기 때문에 의의 행동에 대해서 하나님이 보상해 주는 것은 당연하고 의의 행동이 있는 내가 구원을 받는 것이 옳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결국 주님의 십자가를 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걸림돌을 제거하기 위해서 아무 행동도 하지말고 살아가라는 것입니까? 그것이 아니라 자기 행동을 자신의 경건과 의로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떤 행동을 한다고 해도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은 여전히 죄인이며 주님의 피로 인해서 구원을 얻을 수밖에 없는 무능한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착하고 선한 것이며 거짓이 없는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이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가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이 이해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의롭다는 것은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주님의 의가 있어야 살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지 인간의 행동에 의해서 의로워지고 경건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인간의 행동에 의와 경건의 의미를 둔다면 결국 행동을 기준으로 해서 의롭고 경건한 신자와 그렇지 못한 신자로 구분을 하게 될 것입니다.
신자는 주님의 의안에 머무는 자이지 자신의 의에 머무는 자가 아닙니다. 자기 의 안에 갇히게 되면 자신의 실체를 보지 못하게 되고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은혜의 도움을 멸시하게 됩니다. 이것이 완악한 것입니다. 7절 마지막에 보면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 졌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남은 자란 5절에서 말씀하는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택하심을 입지 못한 남은 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완악하여 졌다고 말하는데, 이들의 완악은 자신의 의에 머무름으로 인해서 은혜의 도우심을 멸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택하심을 입은 자와 입지 못한 자의 구별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택하심을 입었다는 것을 단지 하나님이 천국에 보내신다는 것으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택한 자들에게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지나가게 됩니다. 하나님이 택한 자들에게 하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택하심을 보도록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로 인해서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택하심을 입은 자는 자신의 의를 부인하게 되고 자신을 경건치 못한 자로 여기게 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도우심과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택하심을 입은 자는 그 어떤 경건과 선함과 의의 행동을 한다고 할지라도 스스로 자신의 경건과 의에 갇히지를 않습니다. 경건과 의와 선함 안에서도 여전히 자신을 경건치 못한 죄인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참다운 의로움이며 경건입니다.
8절에 보면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날까지 저희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고 말합니다. 완악함이란 택하심을 따라 되어진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은혜의 도우심으로 되어진다는 것을 멸시하고 자신의 의로운 행동의 효력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완악한 상태는 곧 심령이 혼미한 것이고, 보지 못하는 눈을 가진 것이고, 듣지 못하는 귀를 가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하나님이 주셨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의 완악함의 책임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이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하는 눈과 듣지 못하는 귀를 주셨기 때문에 완악해지고 은혜를 멸시하게 된 것이 아니냐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은 인간이 본래 혼미한 심령이 아니고 보지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상태가 아니었는데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원래 인간은 하나님을 볼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상태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이 신이 되어지는 것에 관심을 두고 부터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보다는 자신을 신되게 할 수 있는 것에 관심을 두게 됩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 아닙니까? 그때부터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항상 자신의 이득을 생각하며 자기를 주장하고 고집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실체인데, 굳이 또 하나님이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 귀를 주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인간 스스로 그러한 상태로 나아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사 29:11-12절에 보면 "그러므로 모든 묵시가 너희에게는 마치 봉한 책의 말이라 그것을 유식한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대답하기를 봉하였으니 못하겠노라 할 것이요 또 무식한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대답하기를 나는 무식하다 할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이미 눈이 감겨서 소경이 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말씀으로 남겨 두신 것이 아니라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말씀으로 남겨두신 것은 아무나 구원받지 못하게 하시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결국 성경을 통해서 인간의 심령이 혼미해졌고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완악한 상태라는 것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혼미한 심령을 주시고 보지 못하는 눈과 듣지 못하는 귀를 주셨다는 말씀의 뜻입니다.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주심으로 인해서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만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9-10절에 "또 다윗이 가로되 저희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옵시고 저희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저희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시편 69:22,23절의 내용입니다. 시편에 보면 "저희 앞에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시며 저희 평안이 덫이 되게 하소서 저희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게 하시며 그 허리가 항상 떨리게 하소서"라는 다윗의 간구가 나옵니다. 이 말을 사도 바울이 인용을 하고 있는 것은 인간이 자신을 의지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멸시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스스로 의지하는 모든 것을 꺽어달라는 내용입니다. 즉 인간의 완악함은 자신에게 믿을만한 것이 있을 때 그것을 신뢰함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멸시하는 것이고, 택하심을 입은 자는 자신의 행위가 신뢰할 만한 것이 결코 되지 못하고 오로지 주님의 행위만이 의로움이고 나를 돕는 힘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인간의 행위의 의는 인간을 자신만만하게 만듭니다. 신뢰할 것을 스스로 만들어 내고 그것을 신뢰함으로서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가를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듣지도 못하는 귀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러한 사람들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자는 어떤 모습으로 등장을 합니까? 자신을 경건치 못한 자로 봅니다. 자신의 불의함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음을 알고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찔림을 받습니다.
구원은 선한 행위가 아니라 우리를 심판하는 은혜의 말씀을 받음으로써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희망은 자신을 경건치 못한 자로 인식하고 자신에게 희망을 두지 않으려고 하는 자들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희망을 두고 자신을 고집하는 것은 완악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